병영성에 대한 정비계획은 지난 1997년에 울산시가 처음 마련했다. 그러나 당시 제안되었던 내용은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정치권의 지지를 받지 못해서 활용되지 못했고, 2010년에 다시 중구청이 종합정비기본계획을 재차 수립하였다. 두 계획 모두 필자는 깊이 관여하였는데, 중구청의 경우는 현재 확인되는 것처럼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범위 안에 있는 성곽 유구를 중심으로 정비를 진행하고 있어서 소극적이라는 생각이다.

 

 

 

12_톱1_병영성 사본.gif

발굴이 진행중인 병영성 사문지. 오른쪽으로 둥글게 튀어나온 것이 ‘옹성’이다.

 

즉, 병영성을 향후 중구 발전, 나아가서 울산발전에서 어떻게 자리매김시킬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접어둔 채로 정비가 진행되고 있다. 즉, 성벽이 둘러싼 전체 영역에 대한 정비가 아니라 띠처럼 긴 성벽만 정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문제의 원인은 지역사회가 한 목소리로 병영성을 지키고자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성벽은 문화재로 지정되어도 성곽 내부는 도시계획도로가 결정되고 병영로가 확장되었다. 남문일대에는 상업지역이 결정되었다. 당연히 건축물이 들어서고 고층빌딩도 늘어난다. 한마디로 병영성의 공간구조는 무너져 버렸고 풍경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병영성은 그 입지가 독특하다. 첫째, 지형의 경우, 말발굽 모양으로 이어져 있는 구릉 정상에 성벽과 북문, 동문, 서문이 자리 잡고, 주요 시설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골짜기 안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입지를 가진 성곽을 특히 ‘포곡식(包谷式)성’이라고 한다. 따라서 정문인 남문은 골짜기 끝부분, 즉 가장 고도가 낮은 곳에 위치한다.

 

둘째, 성이 바닷가에 접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마 처음 경주 토을마리(즉, 모화)에 있는 기박산성에서 지금의 병영성으로 경상좌병영이 옮겨올 때는 해군 기지인 수영도 겸할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병영성에서 가까운 반구동 포구에는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초까지 ‘전선소’가 있었는데, 고읍성에 병영이 있었을 때는 같은 장소나 다를바 없었다.

 

셋째, 군사시설이 높은 산위에서 내려와 백성들 속으로 들어왔다는 점이다. 고려와 조선의 시대적 차이점이다. 기박산성은 마우나오션 리조트 입구에 있다. 옮겨 온 곳은 ‘거마곡(巨?谷)’으로 지금의 병영인데, 이 지명은 ‘큰 말골’ 즉, ‘큰 마을’이 된다. 남구 신정동에도 ‘거마’라는 마을이 있었기 때문에 도로명으로 남아 전한다.

 

12_톱2_병영성 사본.gif

정비가 완료된 병영성 성벽(동문-북문 구간) ⓒ한삼건

 

 

이처럼 병영성이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지금도 동문에서 북문에 아르는 성벽 위에서 보면 북으로는 토함산부터 남으로는 울산만과 울산시가지 일대가 눈앞에 펼쳐진다. 병영성이 가진 이런 조망은 병영 이전 논의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즉, 염포왜관에서 가까워서 왜인들에게 병영성이 항상 노출되는 문제가 있어서 조선시대 내내 영천으로 이전하자는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

 
최근 신문을 보면 울산광역시 중구청이 지난 9월 24일에 ‘울산경상좌도병영성’(이하, ‘병영성’) 서문지 정비사업에 착수했다. 사업비 10억원을 투입해서 서문지에서 북문지 방향으로 162m 구간에 대해서 내년 3월까지 성곽 체성과 치성 1곳을 정비한다는 것이다. 공사내용은 현재 남아 있는 성곽에 대한 정비와 함께 회곽도를 마사토로 포장하고, 성벽 내탁부분과 성벽과 해자 사이의 잔디식재와 수목 정비 등이다.


이 구간 약 400m거리 1만9,796㎡ 면적에서는 지난 2012년에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가 시·발굴조사(시굴조사 1만8,296㎡, 발굴조사 1,500㎡)를 실시했다. 조사결과 시기별로 성벽 축조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조사된 유구는 체성, 옹성(甕城), 치성(雉城) 3개소, 해자(垓字), 수혈(竪穴)주거지, 구상 유구 등 다양했다. 이번 정비는 이런 조사결과를 근거로  추진되는 것이다.


병영성 정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성벽정비를 목적으로 지난 2010년 10월부터는 12월까지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는 병영성 동문지에서 북문지에 이르는 300m 구간을 시·발굴조사해서 체성과 함께 치성 3곳과 해자 등의 유구를 확인했다. 이 조사내용을 바탕으로 2012년에 정비가 이루어져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이밖에도 1985년에는 병영성 동남쪽에 있던 베름산에서 성벽에 대한 매장문화재조사가 있었고, 1999년에는 북문지 조사, 2002년에는 병영초등학교 정문부근에서 진해루 부지가 발굴되었고, 2002년과 2003년에는 ‘병영로’ 개설을 위해 북문지 부근에서 발굴이 진행되었다.

 

또 2009년에는 병영초등학교 체육관부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다. 1985년의 조사는 1987년에 병영성이 사적 제320호로 지정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병영성 성벽과 성곽 안팎의 여러 곳에서 매장문화재 조사가 이어지는 것은 이곳이 조선 건국 후 불과 15년이 지난 1417년에 성곽이 축성되어 조선이 멸망하기 15년 전인 1895년에 그 역할을 마친 병영성이기 때문이다. 무려 478년간 현역으로 기능을 한 것이다. 특히 만 3년 후인 2017년은 병영성 축성 600주년이 된다.

 
이처럼 병영성이 500년 가까이 살아남은 과정에는 많은 곡절이 있었을 것이다. 크게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들 수 있고, 민란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어떤 구조물도 500살 가까이 나이를 먹으면 몸에 탈이 난다. 그래서 병영성은 조사하는 곳마다 축조 방식에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이는 전문가들이 밝힐 일이다. 그보다는 이 병영성이 처음 지어진 후 1437년까지는 당시 울산군치소였다는 점을 지적해 둔다. 실제로 완전한 병영성으로 기능한 것은 1437년 이후가 된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왕조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등에서 읽을 수 있다. 즉 세종실록 7년(1425) 10월 18일 기사에는, 병영성이 완공되어 울산군 치소를 함께 옮기려 하나 백성들이 현재 사는 곳을 떠나기 싫어하고, 수령과 아전은 조석으로 장군에게 문안하고, 윗 손님 접대와 치다꺼리를 꺼려서 가지 않으려 하며, 결국 병영은 구 읍성(고읍성)에 남고, 울산군 치소만 새로 지은 병영성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다음해인 1426년부터 1436년까지 10년간은 울산에서 병영성이 폐지되어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