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말고 다른 공간을 구하세요. 냉장고도 꽉 채워요. 곧바로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해놔요. 일이 닥쳤을 때 막상 갈 곳이 없으면 계속 당해요. 다른 사람한테 당신 상황을 알렸나요? 지금부터라도 당신 친구들한테 당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남편의 실상을 제대로 알려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당신 편이 되지 않아요. 그동안 아무 말 없더니 무슨 말이야, 지금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그동안 너희 부부는 더없이 다정했잖아. 어느 게 진짜야? 다들 이렇게 말할 겁니다.”
눈물이 가득한 채 여자가 상담 선생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런 식이면 양육권 소송에서도 불리합니다. 당신은 아무한테도 남편의 폭력을 말하지 않았잖아요. 지금껏 다른 사람들도 까맣게 모르던데, 당신 남편이 주먹을 휘둘렀다니 그 말을 어떻게 믿죠? 상대편 변호사는 당신을 거짓말쟁이로 몰 거예요.”


미국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가정 폭력을 당하는 주인공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해결책을 알려준다. 비록 내가 닥친 상황은 아니지만 어쩌면 알고 지내야 할 상식을 전해 받은 양 나는 드라마 대사를 곱씹었다. 모임을 나가서 다른 이에게도 이야기해 주었다. 이 드라마의 전체적인 맥락은 ‘폭력’이다. 농도가 다르고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등장인물은 모두 폭력과 관련된 처지이다. 누가 왜 어떻게 얼마만큼 폭력에 다가서는가를 세심하게 살피는 드라마라서 원작 소설을 읽었음에도 흥미로웠다. 첫 회에 눈길을 끌면 드라마를 계속 보는데 이 미국 드라마가 그랬다.


요즘엔 우리나라 드라마보다 영국, 미국, 일본 따위의 해외 드라마를 많이 본다. 이름하여 미드, 일드, 영드. 각국의 드라마는 나라 이름만큼이나 다르다. 대부분의 해외 드라마는 시즌제이다 보니 시즌이 끝날 때마다 감질도 나고 다음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 꽤 한참을 기다려야하지만 새 시즌을 놓칠 수 없는 드라마들이 많다.


미국 드라마는 상황을 피하지 않고 아니, 과장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정리한다. 또한, 범죄물, 판타지물을 막론, 장르가 다양하고 풍부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다만 시즌을 더할 때마다 등장인물 간의 관계가 막장을 치달을 때가 종종 생긴다. 언젠가 영화 사이코의 배경이 된 모텔을 모티프로 한 드라마를 봤는데 배경 설정도 그럴싸하고 인물도 초반에는 좋았는데 뒤로 갈수록 억지스러웠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미드는 불필요한 장면, 군더더기 인물이 없을 정도로 깔끔한 편이다.


영국 드라마는 이야깃거리가 풍부하다. 셰익스피어의 나라답게, 다양한 서사의 문학 작품이 많은 나라답게 드라마에서도 이야기를 버무리는 솜씨가 뛰어나다.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영국 귀족의 다양한 삶을 보여준 다운튼 애비, 오래된 이야기 속 탐정을 현대에 부활시킨 셜록, 영국 근대사에 숨은 피의 역사를 한 가문의 역사에 맞물려 그린 피키 블라인즈는 내가 흥미롭게 본 영국 드라마이다.


반면 일본 드라마는 잔잔하다. 대사도 조용하다.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다가 끝에 가서야 언성을 높이는 식이다. 우리나라 드라마와 비슷하지만 다른 인간관계를 그린다. 대부분 등장인물 서로의 관계에 탐닉하는 내용이 많다. 또한, 개인의 소소한 이야기가 아니라 단체 안에서 생활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드라마의 배경과 상황이 우리와 꽤 비슷한 편이다 보니 공감이 가기도 하지만 피치 못할 상황에 여러 인물이 얽히고설키다가 화해하고 성공하는 이야기가 많다. 결론은 늘 한 가지, 즉 어떤 교훈을 주는 거대담론으로 끝이 난다. 그러다 보니 해피엔드가 대부분이다. 역시 일본인의 기질과 다르지 않다. 물론 내가 본 해외드라마가 그 나라 드라마의 평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한, 시청률이 검증(?)된 드라마들만 봤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나라 드라마 중에서도 그 나라에 맞는 드라마가 해외로 팔리듯이 말이다.


우리나라 드라마는 어떨까? 지상파를 비롯한 방송국에서 숱한 드라마를 방송한다. 일주일 내내 사극에서 현대물, 판타지물까지 방송하는 장르도 다양하다. 배역을 맡은 배우의 팬이라서 혹은 어쩌다가 보기 시작해서, 친한 이의 추천으로 보기도 하지만 끝까지 흥미진진한 드라마는 별로 없다. 특히 요즘은 더 그렇다. 야심차게 시작한 이야기는 중간도 가기 전에 힘을 잃고 휘청거린다. 그러면 덩달아 나도 힘을 잃고 채널을 돌리고 만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영드의 서사, 미드의 선명함, 일드의 세심함이 깃든 드라마를 기다린다. 드라마는 작금의 고단한 우리의 현실을 벗어나게 하는 타임머신임에 틀림없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