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사진1

<영국으로 건너가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세계의 다양한 악기와 버스킹을 해 본 풍부한 경험은 국악 기획 공연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하였다.>


국악이라면 인간문화재가 생각나고 뭔가 올드한 느낌이다. 우리 것은 좋은 데 딱히 끌리지는 않는 국악에 대한 편견을 깨려는 창작국악집단이 있다. 젊은이로 이뤄진 파래소는 시민들 속에서 국악의 새로운 부활을 꿈꾸고 있다.  


1. 국악연주자가 된 계기는?


저는 지금 ‘파래소’ 대표를 맡고 있고, 대금연주자로서 국악을 전공했다. 연주자의 정체성으로는 대금이 첫째다. 대금 연주소리를 20대에 군대 들어가 듣고서 그 소리에 반해서 제대 후 전공을 바꿨다. 처음에는 자동차 관련 과를 전공했기에 군대에서 정비병으로 근무했다. 시점이 엄청 절묘한 타이밍이었던 것 같다. 추석에 경계근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달이 엄청 훤하게 떠있는데 상병이 부는 대금소리가 들리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잘 부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 마음이 와 닿았다. 대금과 만나게 된 그 타이밍이 마치 연출된 것처럼.


2. 대금을 전공까지 하게 된 이후 생활은?  


돌아보면 30대 중반 10년~15년을 버라이어티하게 살았다. 주변에서는 ‘쟤는 원래 그렇다.’, ‘좀 엉뚱하다.’, ‘갈피를 못 잡는다.’ 식으로 이야기를 들었다. 부모님이 오픈된 분이어서 집안 제지가 없었기 때문에 주변 눈길은 별 신경 쓰지 않았다. ‘네가 생각한 것이면 해라.’ 어머니는 전업주부시고 아버지는 현대중공업 직원이었으니 생활은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편이라 좀 방임적으로 키우신 것 같다. 나름 장단점이 있었다.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20대 작은 이벤트처럼 스물다섯 살 때 대금으로 대학을 새로이 입학했다. 친구와는 남다른 열정이 넘쳐서 열심히 했는데 2년을 끝내고 나서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세계 3대 페스티벌이라고 하는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한 달 동안 가 있었다. 우연한 계기로 3국 공연이었던 악기, 사람, 음악 페스티벌에 신선한 충격을 받고 협연도 해보고 참여자와 대화해보고 싶었는데 3주 갔다 오고 나서 ‘휴학을 하고 영국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휴학을 하고 그 때 12월에 영국을 갔다. 대금은 국악에 한정된 것인데 이렇게 다양한 음악이 있고 같이 음악을 나누고 싶은 열정에 어디를 가야하지 하다가 영국을 가야겠다고 결심하고 어학연수를 갔다. 1년 반 영어학교 등록을 했다. 내 전공을 집중할 시기였기에 갈등도 많았지만 그걸 상쇄할 정도의 뮤지션을 만나서 협연도 해봤다. ‘동양 악기하는 사람인데 같이 협연할까요?’하면서 매일 버스킹을 했다.


중간에 사람 많이 오가는 마켓이 있었는데 그 시장 근처에서 버스킹을 했다. 혼자 야외로 나와 연습도 하고, 같이 연주도 하는 버스킹 문화가 많이 발달해 있었다. 버스킹을 하면 던져주는 동전도 단가가 높았다. 하나가 1파운드이고 그때 당시 우리 돈으로 2300원 정도이니 그걸 모아서 저녁거리를 사고, 런던 외곽지역에 있어 주말이면 센터에 가서 템즈강변에서 버스킹을했다. 주말에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자리다툼까지 있으니 일찍 가서 자리를 잡고 버스킹을 하면 ‘동양 애가 희한한 악기를 한다.’고 관심을 가져 주었다. 일본 악기인 샤미샘(삼미선, 세 줄로 된 기타)과 같이 공연을 해보자 해서 프리로 해보니 음이 풍성해지고 사람이 더 몰리더라. 그렇게 동양악기로 두 명이 협연을 시작, 수익도 많이 늘더라.
그 후 아프리카 젬베 연주자, 타악기까지 결합을 하니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더라. 그래서 ‘우리, 팀 결성해서 주말마다 다니자.’ 이렇게 되었다. 연습도 하고 아리랑이나 오키나와 민요도 같이 연주했는데 지금도 교류하며 연락하며 지낸다.


3. 그 버스킹 경험은 어떤 변화를 만들었나?


지금은 그 때 만난 다른 분은 각자 자기 성장을 했겠지만 그 때 버스킹했던 경험은 공연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닌 관객 반응, 여러 악기들의 변수를 가지고 여러 가지 조합을 시도해 본 것이다. 다시는 그렇게 자유롭게 다양한 악기를 조합할 경험은 가지지 못할 것이다. 공연 기획할 때 그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그 후 학교로 복학해서 전공을 열심히 했다.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른 살에야 국악과를 졸업했다.

 

4. 국악과에서 기본으로 배우는 것은 어떤 것인가?


자기 악기인 대금은 주 전공을 하고 국악인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장고, 가야금, 거문고 기본적으로 다해야 한다. 노래도 기본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
파래소는 한 명의 사람이 기본적으로 두세 개의 악기를 다루면서 공연을 한다. 적은 인원으로 많은 효과를 내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자기만의 색을 보여주는 방식이라고 보면 된다. 


5. 외국 음악이나 팝송을 우리 전통악기로 연주하는 것이 인기를 끈 적이 있는데 어떻게 보나?


그런 음악은 ‘퓨전음악’이나 ‘크로스오버’ 등 다양한 말로 불린다. 우리는 창작음악 작품을 주로 하기에 퓨전음악 같은 역할을 갖고는 있지만 일반 시민과 가까운 음악이 아니다. 조금 어색한 음악이고 하니 이해하기 쉽게 접근하려고 한다. 마냥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되지 못하더라. 음악 자체로서 친근감 있게 알려져야 한다고 본다.


팝송, 서양 음악을 주로 연주하고 우리 악기를 매개체로 하는 방식. 음악 연주자로서 사회적 작업이지 않겠나? 우려하는 부분은 핵심적인 부분이다. 연주단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조건 대중성, 흥행성만 따라 가면 주객이 전도되는 위험성이 다분히 있다. 행사에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최적화된 내용을 클라이언트 요구 시에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파래소 색깔이 뭐냐고 하면은 그래도 우린 내세울 것이 있다. 우리 색깔은 생각보다 하드코어 하다. 무속음악, 궁중음악, 경상도, 전라도, 무속음악을 중심으로 하는 다크 원조격인 음악을 하고 있다. 창작음악, 우리들에 맞는 음악을 하고 있다.


6. 무속음악하면 뭔가 쟁쟁거리고 음과 소란한 음악을 생각하기 쉬운데...


무속음악이라고 하면 주술적인 행위나 점을 치는 그러한 면을 보는 의식적인 음악이라고들 많이들 생각을 하는데 물론 방송이나 매체를 통해서 접하는 그런 음악도 무속음악의 일종이지만 무속음악은 지역에 따라 또 정서적 특징에 따라 훨씬 더 다양한 음악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경기도에서 많이 하는 경기도 도당굿, 경상도 동해안 별신굿, 전라도 지역의 씻김굿이 있다. 파래소는 그중에서 씻김굿을 기반으로 많은 작품을 제작하고 있는데 주술적이거나 의식적인 행위의 음악이 아닌 무속음악이 품고 있는 다양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가령 죽음을 슬퍼하고 행운을 기도하고 아픔을 나누는 마을의 정서적인 역할을 하는, 그리고 그러한 행위에서 발생된 인간의 감정을 노래하는 무속음악의 정서를 연구하고 개발하고 있다.


7. 주로 어떤 식으로 공연이 이루어지는지?


공통적인 것이 지역 행사다. 지자체 행사나 기업 등 행사다, 전야제 공연이 대부분이고 초대 받아서 가는 것이고 꾸며주러 가는 것이다. 그 외에는 공모사업 진행, 문화예술진흥기금 정기적인 연주회를 열고 음악, 공연에 대한 공모사업을 시행하는 것이다.  


우리가 자체로 진행하는 ‘사랑방 음악회’는 공연 공간 자체가 작기 때문에 서른 분이 오면 꽉 찬다. 모시고 싶은 분은 따로 공지해서 모인다. 사랑방 음악회는 안 하면 안 할수록 돈을 번다. 수익이 남는 것은 아니고 수익구조와 관계없다. 일반 시민이 국악을 잘 몰라서 그러니 풀뿌리 역할을 누구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 생각으로 하는 것이다. 연주 공간으로는 작은 공간이 연주자에겐 훨씬 부담스럽다. 그만큼 부담을 주기에 역량 강화 차원에서 하고 있다.


마이크를 대지 않고 하기에 원래 국악의 생음을 들을 수 있다. 사랑방이 주는 매력은 국악의 기원 그 자체다. 원래 국악이 연주되는 곳은 큰 공간, 합주 공간이 아니다. 독주 방식에 맞춰져 있어 오히려 특화되어 있으니 사랑방으로 한 것이다. 국악 오케스트라 악단은 마이크를 쓰지만 원래 서양 오케스트라는 마이크를 쓰지 않는다. 국악은 태생 자체가 여러 합주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관현악이 들어오면서 그 형식에 맞춰진 것이다. 사랑방 음악회는 국악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나름 고민한 것이다.


10사진2

<창작 국악으로 씻김굿을 하는 것도 망자와의 소통이다. 대금 연주자로서 그가 들려주는 소리도 또한 음악으로 푸는 언어다. >


8. 전에 사랑방 음악회에 참석했는데 여고생 등 오빠부대가 있는 것 같던데.


우리 파래소 연주자들은 모두 젊은 부류다. 국악 연주이지만 젊은 친구들이 많다보니 학생들의 선망 대상이 된다. 어릴 때부터 접하지 않아서 그렇지 음악도 하나의 언어다. 음악을 들을 때 성시경 발라드 이러는 것처럼 음악을 언어의 코드로 공유한다. 국악은 그렇지 않고 종종 과거 방식이기에 원초적 토대 자체가 얕다. 전통 국악 가사의 80%는 한자이고 고사성어가 아주 많이 들어있다. 받아들이기 힘든 태생적인 문제가 있다.


국악인들이 그걸 인정하고 알아듣도록 통역, 크로스오버를 부탁한다. 일단은 그러한 음악적 통역으로 대중들이 국악의 세계에 입문하기 쉽도록 가교역할을 하고 그 후에 자연스럽게 그들이 찾아서 우리음악을 듣게 만드는 자연스러운 시장이 이루어지는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악회에 오신 분들이 ‘우리 국악이 이렇게 좋은 것인지 몰랐다’ 하면 ‘여러분 죄송해 하지 마세요. 여러분 잘못이 아닙니다. 접하는 교육 문제예요. 여러분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관공서 문제일 것입니다.’ 한다.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하면 되지 않겠느냐? 단순히 내가 좋아하면 내 친구도 좋아하지 않겠느냐고 한다.
국악은 언어가 다르다. 교육이나 과정이 다르다. 연주자 단체도 개인 연구해서 지도로 풀어야할 문제, 관공서를 찾아서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문제는 국악을 어떻게 쉽게 다가가게 할 것인가이다. 그런 모순이 있으면서도 희망을 가진다. 갈 길이 멀다.


젊은 친구들 모습에 두 가지 모습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국악을 보고 판단할 기회가 제대로 열려 있지 않다. 기존 전통적이고 고리타분한 이미지가 대중에게 각인된 모습이다. 지역단체들이 풀뿌리운동이 된다면 좋겠다. 파래소를 통해서 앨범을 하나 사게 하면 너무 신난다. ‘작지만 큰 일 했구나.’ 생각하게 만든다. 


9. 왜 울산의 버스킹 문화는 잘 이뤄지지 않는다고 보나?


국악은 국악인이기에 지적할 수 있다. 현실을 직시했으면 좋겠다. 국악인이 대부분 지원받아서 가고 있다. 클래식, 대중음악 어느 것 하나 지원 받는 것은 별로 없다.


국악은 지켜야 할, 보호해야 할 생각으로 접근하고 기대니까 국악을 새로이 만들거나 관객 개발하는 것에 게을리 할 수도 있다. 인디펜던스(자립)들은 고민해야 한다. 우리들은 그렇지 않아도 학교 강사로 갈 수 있고 국악 연구가 대중성이 없기 때문에 도와주는 것은 좋은데 이런 것들이 오히려 창작의 발목을 잡는다. 파래소 같은 경우는 창작 음악으로 승부 보려고 하고 있으나 ‘왜 굳이 그래야 하는가?’하고 생각하는 단체가 있을 수도 있다.


버스킹 문화가 잘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중구청이 지원하고 만들려는 노력은 있지만 의도적으로 만들려는 작위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영국이 버스킹 문화의 출발지이기도 한데 관에서 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이뤄졌다. 에든버러 축제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이 길에서 그냥 연주를 해 버린 것이 프린지(변두리) 문화의 출발이다. 그 문화를 내치지 않고 수용한 결과다. 그렇게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문화에서만 만들어진다. 에든버러가 보강 흡수하여 만든 ‘프린지 페스티벌’이 우리의 현 시점과 맞지 않나? 안 맞으니 버스킹 판이 벌어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아직 원하지 않는구나 생각해야 한다.


관에서 작위적으로 만들려는 것이 혹 자연스런 움직임에 방해되지 않을까도 생각해봐야 한다.
문화 활성화에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버스킹 공간만 제공하고 음향 장비를 지원하든지 건물 주인들에게 협조를 받는 정도가 맞을 것이다. 주말에 조금의 출연료를 주면 보급이 잘 될지 더 기다려 봐야 한다.


또 다른 문제는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너무 의식한다는 점이다. 특히 국악은 버스킹하면 예술가마저도 남의 눈을 너무 의식한다. 앞으로는 젊은 친구들이 극복하려 노력하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 남사스럽게 생각하는 문화가 많다. 영국 버스킹은 자신이 좋아서 연주하고 길을 가다가 공연 앞에서 멈춰서면, 자연스레 동전을 줘야 하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
관객도 공연 보는 것을 망설이고 남 눈치를 본다. 관객들마저도 군중이 있어야 겨우 끼어서 보는 분위기라 아직 시기상조라고 본다.


10. 단체는 어떻게 운영 유지를 하나?


예술가는 배고프다는 공식은 풀지 못한 숙제이다. 예술은 스폰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역사적으로도 귀족들의 스폰서 없이는 안 되었다. 국악의 시장이 있나 없나? 하는 것도 고려할 문제다. 그냥 음악 하나의 카테고리니까 기대지 말고 ‘시장의 법칙’대로 자생할 수 있는 기반 자체가 없다.


국악 강사로 학교로 보내주고 지금 파래소의 5년차 대표인데 3개년 단위로 계획을 짜고 있다. 지난 3년은 내실을 다지고 배고픈 상황이었는데 운영하면서 대표 1인은 월급 받으며 살 수 있는 기초를 만들려 죽자 살자 하니까 내 입에 풀칠은 한다. 앞으로 3개년 같이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니 다음 단계 문제로 넘어가더라.


전국적으로 지원을 안 받고 월급 받으며 살아가는 단체가 있는데 ‘우리도 저렇게 되면 좋겠다.’ 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들어가면 엄청난 박봉이다.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괴리감이 엄청 크다.


공연을 보고는 ‘저렇게 잘 하는데 어찌 돈을 못 벌어?’ 이래는 되는데 어디서 돈을 벌어올 것인가? 울산에 국악 연주 단체는 우리 포함해서 여러 개가 있는데 사물놀이, 무용단체도 있고 대부분 각자 일 있고 행사시 수당 형태로 받는다.


11.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바램이기도 하고 많은 이들이 파래소를 통해서 국악, 창작 국악, 극단의 팬이 되길 바란다. 대부분 20대로 구성된 젊은 국악단으로 홍보하고 젊은 국악인이 활동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 울산에 있고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물을 만들고 있다.


파래소는 정해진 패턴이 없다. 저렇게 또 다른 방식을 만들어 신진 국악인들이 기존의 길을 좇아가거나 기존 단체에 속해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보여줘서 ‘파래소도 하는데 우리도 해보자.’ 하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예술가에 대한 바람이다. 국악 음악은 작은 시장이지만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