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정확한사랑의실험

<신형철 | 마음산책 출판 | 2014. 10.>


아, 정말이지 90년대는 영화를 이야기하기에 끝내주는 시대였다. 당시 나는 정성일이 초대 편집장이었던 잡지 <KINO>를 성전 모시 듯하며 감독별로 연대기별로 필모그래피를 줄줄 외던 지독한 비디오 키드였다. 그 잡지에 나온 글들은 영화 전문 용어들로 가득했다. 누벨바그, 미장센, 오마주, 필름 느와르, 부르주아 낭만주의와 데카당스, 네오리얼리즘 등등... 지적 허영이 심했던 나는 다른 영화잡지들은 외려 신변잡기적이라고 하대하며 <KINO>만을 추종하고 그 안의 콘텐츠들을 숭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최근의 나에게 영화 평론은 바쁜 일상 속 영화를 빨리 골라 보는 데 필요한 단순 가이드로 전락해 버렸다. 대신 내 책 읽기는 한동안 육아서와 요리책, 교육 관련 문헌들로 채워졌다. 난 어느새 세 아이의 엄마이자 수학교사가 된 것이다.


이러한 나에게 신형철의 <사랑의 정확한 실험>은 너무 오랜만에 만난 친구로 다가왔다. 영화평론집을 평한다는 것은 내겐 당연 주제 넘는 일일 수 있다. 난 그저 이 책이 지닌 매력이 무엇인지 짧게 이야기해 보련다.
신형철은 원래 문학평론가다. 책을 펴서 몇 페이지를 읽다 말고 중간에 숨을 골라야만 하는 때가 있는데 심히 아름다운 문장들 탓에 따로 사색을 필요로 한 까닭이다. “둔한 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책을 읽을 때처럼 영화를 보고 또 보는 것뿐이었다. 한 편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대여섯 번 보고 나서 열 줄로 이루어진 단락 열네 개를 쓰고 나면 한 달이 갔다. 누군가에게는 이 책이 부정확한 사랑의 폐허로 보이겠지만,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고 변명할 수는 없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책머리에’).


별점 매기기와 작품 해부를 위한 칼 대는 행위에서 한 걸음 벗어나 감독의 의중을 가장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러나 정확하게 해석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곳곳에 역력하다. 박찬욱의 말을 빌리자면 “신형철의 비결은 내 보기에 도식화다. 개념을 가지런히 놓고, 단계를 나누고, 비교해서 차이와 유사성을 지적하는 작업 말이다. ...논리의 수립이나 정식화 같은 것을 예술 창조와 작품 해석의 적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뜻밖에 많은데 그런 사람을 만나 백날 떠들어봐야 내 입만 아프고 이제 이 책 한 권 툭 던져주면 되겠다.”(추천사에서).


신형철의 글을 읽을 때 찾아오는 정갈함의 쾌는 바로 예술작품을 그만의 논리 정연함으로 재해석하여 마치 ‘벙어리가 말문이 열리는 듯’ 시원히 뚫어 주는 데에서 온다. 이러한 신형철의 예술을 대하는 과학적 태도와 글쓰기에 개인적으로 크게 매료되고 말았다.


신 작가의 평론 방식은 요즈음 트렌드인 스토리텔링 방식이다. 네 가지 주제-사랑의 논리, 욕망의 병리, 윤리와 사회 그리고 성장의 의미-밑에 소주제들을 펼쳐 각각에 맞는 영화들을 가져다 엮어서 우리도 같이 연계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생산해낸다. 예를 들면, 그가 <러스트 엔 본>을 이야기할 때 그 대립구도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들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다큐멘터리 <블랙 피쉬>가 들어와 또 다른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에서 <로렌스 에니웨이>와 <더 따뜻한 색 블루> 이야기 중 그는 “소수자라는 말의 용법이 너무 진부해져서, 이제 그 말은 로렌스나 아델 같은 아름다운 단독자들의 생명력을 죽여버린다.”고 했다. 평소에 내가 품던 성소수자 영화들에 대한 아쉬움을 잘 만져주는 부분으로 같이 앉아 성정체성에 대한 그의 진보적인 생각을 더 들어보고 싶어졌다.


평소에 후배들이 이런 비아냥을 해댄다. “누난(언니는) 김기덕 홍상수 영화 좋아하잖아...(비식).” 그중 한 후배는 “이 두 사람의 영화는 술자리에서 우연히 합석한 어떤 예술병 걸린 중년 남자가 자기고백형 넋두리 너무 오래 하는 거 예의상 억지로 들어야 하는 느낌? 그나마 홍상수는 무시하고 안 들으면 그만인데 김기덕은 소주병 깨면서 깽판 칠 분위기라서 더 억지로 드는 기분이라고 할까요?(웃음)” 그래 맞다! 우리 현대인의 초상화를 보는 기분이 그러하다. 작가는 ‘인간의 생일’에서 이들의 영화들이 “우리가 인간임을 상기시키는 선물”(p.99)이라며 욕망의 굴레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보는 그들의 따뜻한 시선에 감사를 전하기도 했다.


신형철이 최고 등급으로 쳐 주는 평론은 그 작품을 읽지(보지) 않아도 될 만큼 글 자체가 독립적인 에세이로 역할을 해내는 글이라고 했다. 이 책에서는 <스토커>의 ‘근본 은유를 찾아서’가 내겐 그러하다. 좋아하는 감독의 것이지만 놓쳐버리고 만 영화였는데 그의 글을 읽고는 오히려 이 영화를 보지 않기로 했다. 특히 ‘성장은 살인이다’(p.183) 부분은 소름이 돋는 경험이었다. 그 다음으로 쳐 주는 평론을 그는 독자들로 하여금 찾아서 읽고(보고) 싶게 만드는 글이라고 하였다. 이번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읽으면서 늦은 밤 잠을 아껴 찾아본 영화는 <라이프 오브 파이>, <피에타>, <러스트 엔 본> 그리고 <로렌스 에니웨이> 등이다. 가볍게 그의 평론을 훑은 다음 영화를 보고 다시 정독하였다. 놀랍게도 엉성한 그림이 비로소 그럴 듯하게 완성되었다.


작가가 다룬 모든 영화를 맛보고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부분적으로 같이 경험함으로써 내 머릿속 시냅스들이 춤을 신나게 추며 새 짝지들과 결합했고, 가슴은 따뜻이 데워져 입가엔 미소가 달달하다. 확실히 이 책으로 인해 나의 영화 보기 제2막이 열렸으며 감히 글쓰기도 시작해보겠노라는 허영 찬 결심도 해본다. 영화 읽기 사이사이에 나름의 여백을 허락해 마치 같이 작업한 것 같은 충만함까지 주신 신형철의 책 <사랑의 정확한 실험>을 이번 여름에 영화 애호가들께 강력히 추천한다.
그레이스 신 노스런던 컬리지에이트 제주 수학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