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

<아버지 김일운과 윤이상 선생과의 인연은 김희자 선생의 피아노 재능을 매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


김서령 작가 여자전(女子傳)에는 ‘한 여자는 한 세상이다’라는 글이 나온다. 역사는 거시적인 ‘나라와 민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을 통해 더 생생히 살아 있다. 역사적 가치로 인정받느냐 아니냐는 그 다음 일이다. 김희자 님의 개인 삶에는 윤이상 작곡가와 아주 친했던 아버지(김일운)의 추억이 있다. 윤이상 작곡가와의 인연을 소개한다. 올 해는 윤이상 작곡가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다.   


1. 아버지와 윤이상 선생의 인연은 어떤 것인가?


어릴 때 윤이상 선생님께서 현악4중주를 한국에서 작곡했는데 프랑스 가기 전에 사인을 해서 이 악보를 주셨다. 그 때가 아마 선생님 나이가 아버지(김일운) 나이와 비슷한 서른여덟아홉 살 정도셨다. 그 당시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인 걸로 기억하는데 벌써 열 곡 정도 피아노곡을 취입했다. 아버지는 나를 프랑스 국립음악원에 보내고 싶어 했는데 부모 동행을 조건으로 내세우고 병원을 하니 같이 떠나지 못하고 윤이상 선생님과 같이 보낼 생각을 하신 것 같다.(선친이나 윤이상 선생님이나 같은 통영이 고향이다.) 내가 태어나서 윤이상 선생님 영향인지 돌 지나면서부터 피아노를 했다. 1회 독주회를 다섯 살 때 마산의 강남극장에서 했는데 윤이상 선생님은 내가 아버지 옆에서 걸음도 겨우겨우 걷고 페달에 발이 닿지 않으니 피아노를 칠 발판을 만드는 등 성의를 보이셨다.


선생님은 일찍이 프랑스 유학을 떠난다. 선생님은 사범학교를 나와서 음악 선생님이셨는데 프랑스 파리에 음악 작곡가로 유학을 떠나려고 하니 그 당시 피난 중에 만난 음악대학 숙명여대학장인 이애내 선생님의 도움을 받은 걸로 알고 있다. 학장님은 독일 베를린대 졸업을 하신 분이니 그 쪽 인맥이 통했던 것 같다. 그 당시 나는 초등학교 1학년 정도였다.


6.25사변이 지난 후 아버지가 윤이상이가 우리 딸을 프랑스에 데리고 가면, 가정이 어려우니 아버지가 학비를 내어 공부하시게 하자, 같이 가는 걸로 준비하셨다. 그 때 당시는 그런 사실을 몰랐다. 나를 직접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서류가 미비했는지 따라가지 못하고 취입한 피아노 열 곡을 들려줘서 시험 치게 되었다. 기악 종류에서 세계에서 100명 이상 모였는데 최연소 15명을 뽑는데, 합격해서 피아노 바이올린 등 기악 종류에서 최연소자로서 입학하게 되었다. 저 벽에 붙여둔 것이 그 증명서다.


프랑스 유학길에 오르려는데 그동안 부모님께 숨겼던 중이염이 만성이 되었는지 출발 일 주일 전에 귀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당시 피부비뇨기과를 했던 선친이 일본, 미국 수술할 병원을 알아보니 의학기술이 발달 못해 당장 수술은 안 하고 60% 정도 성공률이 있을 때 수술하자고 결론이 났다. 지정된 기간에는 입학을 못하고 음악학교 재발급 서류가 나왔는데 내가 죽기 전에 언제든지 입학하겠다면 받아준다는 평생입학증에 해당하는 서류였다. ‘죽기 전까지 오라’는 허가증을 받았으니 지금까지도 언제든 프랑스학교를 가서 피아노 공부를 해봐야지 하는 회한은 남아있다. 윤이상 선생님은 프랑스 파리에서 1년 유학을 마치고 음악이론과 작곡 등을 배우기 위해 서베를린으로 갔고, 얼마 되지 않아 동백림 사건이 터졌다.


세월이 조금 흐른 후 그 당시에 유명세가 있어서 선생님 추천서에 사인만 하나만 있으면 세계 어느 대학도 입학이 가능할 정도였다. 언제 오려거든 오너라. 난 막 결혼해서 아이 하나 낳고 있다가 시집에서 음악과 피아노 배우기 위한 유학 등 그런 것이 통하지 않는 집안이어서 불가능하구나 하는 마음을 먹었다. 그 조건을 헤쳐 나갈 용기도 여건도 안 되었다. 그 증명서를 평생 가지고 있으니 아직 그 꿈을 못 버렸다. 그 때 단지 귀가 나빠서 파리에 못 간 것을 평생 동안 후회하고 있다. 종종 나는 애들한테 ‘파리 에펠탑 밑에서 죽을 거다’라고 말한다.


동백림 사건이 터지니까 사람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서 막 조사를 했는데 서랍, 숟가락, 은수저가 몇 개인지까지 다 적더라. 하지만 엄마나 아버지는 간첩단 사건이니까 가족을 보호하느라 아버지가 세세한 내용도 이야기 안 하고 노출을 시키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다녀간 사람들이 중앙정보부인지도 꿈에도 몰랐다.


2. 그 뒤에 윤이상 선생님 흔적을 찾는다든지 접촉하려는 생각은 안 해봤는지.


6~7년 전에 통영에 있다는 윤이상 전시관 유품을 보았는데 잘해 놨더라. 책 몇 권 있는데 피아노 악보, 내가 윤이상 선생님으로부터 제일 처음 받은 음악악보 책은 없더라. 그래서 내가 가진 선생님의 그 책을 기증해야겠다 마음먹었다. 언제 기회 되면 기증할 것이다. 윤이상 선생님 사모님을 만나는 것 자체가 뒷조사 당할까 두려움도 있고 그 때는 용기를 내지 못했다.


전에 베를린 해외여행을 갔을 때 윤이상 선생님을 만나 볼 요량으로 나 자유시간 좀 달라 내가 가볼 데가 있다고 요청했더니 가이드가 펄쩍 뛰면서 그 간첩을 왜 만나려고 하냐 하면서 펄쩍 뛰길래 만나지 못했다. 그 뒤에 선생님이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다. 사모님 만나려고 하니 겁도 나고 피아노 열심히 해서 잘 되었으면 당당히 선생님을 뵐 수도 있었는데 울산에서 피아노 개인 레슨이나 했던 것이 너무 부끄럽더라. 그 당시 이야기가 너는 최고의 연주가가 되어야지 그 연주가 안 되면 교수를 하는 것이고 그것도 안 되면 동네에서 가르치는 일을 한다고 종종 말씀하신지라 부끄러워 못 만났지.


저기 사진, 앉아 계신 분이 윤이상이고 서 계신 분이 아버지다. 간간이 커피 석 잔을 타서 저기 사진 앞에도 커피를 자주 올린다. 부모님 기일 때는 제사상에 윤이상 선생님 밥까지 떠서 같이 모신다. 커피는 자주 올려 드린다. 9월 때 100주년 기념행사를 한다고 하니 그런 내 마음을 전할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기회가 생겼다

.
어릴 때 윤이상 씨를 그런 단면만 본 것이 내가 아는 모습이었다. 한 3년 전에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여동생 집에 갔다. 여동생과 남동생 두 명 사이가 안 좋아서 서로 못 찾고 있는데 오바마가 영주권을 해결하지 못 하고 있어 초청자였던 남동생을 찾으려고 했는데, LA 친구한테 이야기를 들으니 한국에 있는 형제 중에 전화번호를 대봐라, 알아보고 연락 주겠다고, 누가 연락이 왔는데, 남동생 얘기가, 누나가 울산에 사는데 자형이 보현사에서 제를 지내는데 그것도 나오고, 우리 남편이 재산이 없어진 이후 부인, 자식은 안 주고 남동생, 여동생에게만 나눠 주었더라 이야기도 나오더라. 우리 아버지는 평생 누나에게만 투자했는데 왜 그리 바느질만 하고 있냐고 짜증을 내더라. 통영의 화가, 문학가, 한의사, 한약방 이런 분들도 아버지가 많이 도왔다는 기록이 나와 있더라. 우리 대에는 누나 하나 성공시키기 위해 그렇게 뒷받침을 했는데 누나는 왜 그러고 있냐?


짐작인데 아버지가 간첩 사건에서 빠질 수 있었던 것이 독일 이후에는 연결이 안 되었던 것 같아서 그런 것 아닌가 싶다. 감옥에 있을 때 면회도 한 번 못 갔는데 아버지 말씀이 ‘겁이 나서 너희를 다치게 할 것 같아 못 가겠다.’ 그 때 그 뒤로 윤이상 선생님과 연결이 끊어진 것이다.


06-2

<다섯 살 때 열 곡의 피아노 연주곡으로 취입도 할 만큼 그의 피아노 연주 실력은 프랑스음악대학으로부터도 인정 받았다.>


06-4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사진. 왼쪽이 선친이고 오른쪽이 윤이상 선생이다. 간간히 이 사진 앞에 커피를 올린다.>


3. 직접 윤이상 선생님으로부터 사사를 받은 적이 있나? 피아노 연주 이야기를 더 해주신다면? 


윤이상 선생님은 작곡을 좋아하시고 재주가 많으니까 첼로도 하시고 했다. 내가 사사받은 분은 공선정 선생님이었는데 이 분 조카가 바로 우리나라 최초 안과를 연 공병우 박사다. 공 선생님이 조카와 같이 피난을 왔다. 이 분이 4년을 우리 집 가정교사로 있었다. 공 선생과 서울 이애내 학장님에게도 레슨을 받으러 일 주일에 한 번은 갔는데 이애내 학장님으로부터 직접 사사 받았다. 서울대 음대 졸업생 1등으로 졸업한 장석영, 1등으로 입학한 백낙호 선생님으로부터 사사 받았다. 아버지가 선생님을 여러 명 붙여서 피아노를 배우게 했다.  


6.25전쟁 치를 당시 피부비뇨기과를 시작할 때 엑스레이 기기를 독일에서 사왔는데 부산에는 부상병들이 밀려들어오는데 한 대 밖에 없어서 돈을 엄청 버셨다. 마산 의신유치원을 졸업하고는 바로 부산으로 이사를 갔기에 피난을 간 것은 아니었다. 이승만-프렌체스카 사진을 집에서 종종 보았는데, 아버지가 총각 때는 대통령 따라다니는 촬영기자 생활을 한 것이었다. 사진관을 마산에서 개업했다가 부산에 갔는데 딸을 출세 뒷바라지를 하려면 의사가 전망있는 직업이라는 조언을 윤이상 선생에게 듣고 경북의대를 들어갔다. 윤이상 선생님이 공항을 떠날 때 10년 정도 지나 만날 때 자네는 의학박사가 되고 나는 음악가가 되어서 다시 만나자 이러셨다. 그것이 내가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때 의사가 되니 부산에서 엄청난 거부가 되셨다.


그 당시 윤이상 선생과 별 생각을 다하신 것 같았다. 처음에는 미국에 보내려고 대청동, 미국 공보국 근처에 살았는데 사람들이 피난을 오니까 거지가 많으니까 자갈치 시장 가서 거지들 데려와 목욕시키고 마당에 말뚝을 박고 그물처럼 만들어서 흔들침대처럼 백 목사님을 모시고 대청동 고아원 임시 막사를 만들었다. 거제동 어디에 정식으로 고아원을 차렸다더라. 대사관도 임시건물로 썼다. 딸 여권을 만들기 위해 대사관도 끌어들이고 별일을 다하셨다. 바로 미국을 보내려고 여덟 살까지 학교를 보내지 않고 아홉 살까지 미국에 바로 보내려고 했다.


여섯 살 때 기억은 희미한데 남녀 미국 해군장교가 전쟁 중에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반주를 하게 되었다. 3부두에서 작은 배로 나가서 오륙도 뒤쪽에 있던 군함에 올라갔는데, 군인 100여 명이 고깔모자를 쓰고 파티를 한다고 그 때 아이스크림이라는 것을 처음 먹어 봤다. 피리도 불고 양산 자체가 귀했던 시절에 꼬마 양산도 받았다. 선물로 준비한 3D코드도 인형도 한 트럭을 받았다. 3년 동안 부산 하야리아 부대를 일요일마다 들어가 여러 곳에서 연주를 했다. 나는 1학년일 때, 6학년이었던 피아니스트인 한동일 씨(울산대 재직)도 같이, 와이스베리 선교사로부터도 레슨도 받을 정도로 아버지는 나를 피아니스트로 키우기에 열심이었다. 드레스를 여러 벌, 선물 여러 박스 받았고, 그 당시 애기 양산이며 화려한 옷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임시 고아원을 하던 때라 국제적십자 몇 트럭으로 온 구호품으로 화려한 어린이옷들이 많았는데 낮에는 아버지가 무서워 피아노를 종일 치고 밤에 주무시면 구호물자를 뒤져 원하는 대로 옷을 입었다. 패션이나 주거생활을 앞서가는 체험이 있어 지금 옷을 만드는 일을 하는 모양인지 모르겠다. 와이스베리에게 레슨을 배우러 갔는데 프랑스 아내가 살림 사는 모습이, 그 집 풍경이 새로웠다. 그 동경을 하게 되니 집 꾸미고 옷 만드는 게 내 몸에 배이게 되었다.  


4. 그 당시 선생님 피아노 실력 평가는 어떻게 받았나?


내 평가보다는 지금 피아니스트인 백건우 씨 아버지 말씀으로 들은 것이 더 신빙성이 있을 것 같다. 가족이 온천장에 살다가 미국으로 이사 가기 직전에 마지막 한 이야기가 있는데 “희자야, 너는 아들이 두 명인데 왜 피아노를 안 가르치나? 둘째는 대단한데 잡아 가르치려고 했는데 못 잡아 둬서 안됐다. 모차르트를 듣는데 세계에서 섬세하게 치는 것은 너가 최고다. 기초를 원래 튼튼하게 배웠는데 이내애 선생님이 바하 곡은 최고인데 그걸 최고로 치는 분한테 완전히 배웠는데 안 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깝냐?” 하시더라.


건우 집에는 피아노도 없고 교회에서 잠깐 치는 등 연습이 부족하니 피아노 레슨 등 다리를 놔주었다.


5. 클래식 음악은 악보대로 치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사람마다 다른 느낌의 피아노 선율이 다른 것은 어떤 것인가 설명할 수 있나?


지금 국민대학교 음대 교수인 윤철희 교수(이후락 씨 누나 손자)에게 피아노를 가르칠 때이다. 남자애인데도 옷에 달린 레이스꽃을 만져보고 했다. 기초적인 것은 내가 가르치지만 그 애가 좋아하는 것을 보고 그 느낌을 피아노로 쳐보라고 하는 것이다. 백양사에 올라 보름달을 보면서 그 느낌대로 피아노를 쳐보라고도 했다. 설명이 잘 안 된다.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국제시장 들어가는 곳에 부산 왕자극장이 있는데 교향악단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카덴차라고 반주 없이 혼자 치는 부분이 있는데 악보는 있지만 연습대로 안하고 내 느낌대로 쳤던 적이 있는데 연주 끝나고 아버지에게 엄청 혼났다.


마산에서 유치원을 다니면서 사진관을 했는데 마당이 컸다. 일본 가셨을 때 활동사진기를 사가지고 왔는데 변사처럼 직접 자기 목소리를 녹음을 해서 활동사진을 만들기도 하셨다.


하와이 훌라춤 치는 걸 찍어 왔는데 어머니는 타올 두 개를 입혀 하와이풍 춤을 쳐보라고 했고 동네사람들 다 오라 하고 그 앞에서 춤추고 했다. 그 때 마음대로 취하듯 춤을 췄던 기억이 난다. 그 이후로는 부끄러워 춤이나 노래를 부른 적은 없다. 그런 신명과 끼는 내 속에 있었던 것 같은데 피아노 소리로 나온 것 같다.


옷을 만드는 일도 생각에 박혀 왔으니 음악을 틀고 분위기를 만들어 황홀경에 들면 기술이 아니라 그냥 가위 들면 바로 나온다. 우리 며느리가 요즘 취미가 붙어서 가르쳐달라고 오는데 이건 가르칠 것이 없는데 그냥 가위들고 베면 되는데 설명하며 가르칠 것이 없더라. 그냥 얼굴만 꿈벅꿈벅 보고 가더라. 조금 미안하기는 하더라.


6. 피아노 연습은 어느 정도 했었나?


아버지는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어느 피아노든지 잘 쳐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분이셨다. 피난 중에 부산 경남에 모인 피아노는 안 쳐본 피아노가 없을 정도다. 그 당시 피아노가 있다고 하면 초대를 안 해도 가서 비위가 좋아 소문 듣고 가서 무조건 ‘우리 딸에게 피아노를 치게 해 달라’ 했다. 내 피아노도 열세 대를 바꿨다. 내가 터치가 센 편이라 하루 열여덟 시간 정도 연습을 하는 것이니 손톱을 깎아본 적이 없다. 그 당시 건반은 상아로 만든 것인데 그것이 손가락 터치로 닳아서 없어지고 나무바닥이 보일 정도였다. 나는 ‘그랜드’, ‘야마하’, ‘이바하’ 등 안 쳐본 피아노 제품이 없을 정도였다. 독일제 ‘스타인웨이’ 피아노 빼고는 다 쳐보았다.  


하루 열여덟 시간 쳤고 아버지는 이부자리를 펴준 적이 없고 하니 잘 때도 피아노 뚜껑에 엎드려 자고 연습시간을 채워야 하니까 힘들어 쉬려고 화장실에 조금 오래 앉아 있으면 창문을 통해 물벼락을 안길 정도로 키웠다. ‘세계에서 모차르트를 제일 아름답게 치는데 제자들 가르치는 일도 안 한다는 것이 말이 되냐’ 하더라. 나는 피아노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너무 열심히 몰입해서 그런지 어느 때부터인가 피아노만 보면 머리가 아프고 토하게 되었다. 원인을 알 수 없었다.


7. 예술작품 활동하고 작년에는 국전 대상을 받은 걸로 아는데요.


옷이든 뭐든 가위만 들면 뭘 만들까 구상을 따로 안 해도 바로 만들 수 있다. 음악도 틀고 분위기 좋게 하고 가위를 들면 저절로 되었다. 나는 다른 이 집에 안 간다. 가도 별로 볼 것이 없다. 어떤 분이 제가 손재주가 있으니 뭘 해도 만들어내겠다 해서 하나 만들다 보니 이런 작품까지 만들게 되었다. 과거에 아파트나 집을 꾸미는 일을 한 10년 해봤다.


인테리어 일은 마지막 일이 가지고 있던 유화나 그림이나 일로 끝나는데 인테리어 분위기를 망치는 경우가 많더라. 그것이 항상 불만이었다. 그림에 대한 갈등이 생기더라. 그 분위기에 맞는 한 색으로 무채색으로 해보는 방식을 고민하게 되었고 남은 천조각 쪼가리가 있길래 세탁을 해서 한 것이다. 유럽 작년 재작년 노르망디 전시회를 한 적이 있고 갤러리를 다 구경하고 루브르 박물관을 봤는데 내 그림을 각 노르망디와 걸면 내 작품이 가장 멋지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국전에 낸 이 작품은 청와대 벽면에 내걸만하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었더니 당선이 되더라.


피아노를 배운 제자들 발표회가 과거 강변 근처에 있던 울산 천도극장에서 있었는데 제자들 연주복을 보니 너무 촌스럽더라. 그래서 장에 가서 형형색색 천을 사서 밤새 열 명분 옷을 만들어 입혔다. 피아노 연주는 뒷전이고 드레스가 더 낫더라. 가까운 분들이 ‘선생님 손은 나중에 박물관에 기증해야 한다.’고 한다. 바느질을 처음 해본 것이 다섯 살 때였다. 우리 어머니 바느질 솜씨가 좋았는데 연주회가 잡혀 있었는데 엄마 한복을 베어서 옷을 만들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급성 맹장염이 와서 내가 직접 가위를 들고 잘라서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기장이 안 맞아서 어려워하고 있으니 할머니가 마지막 손질을 해서 만들어주더라. 바느질도 이렇게 하루아침에 된 것은 아니다.


8. 울산에서 제일 컸다는 천지상회 이야기 등 울산에 산 이야기를 좀 해 달라.


스물세 살 때 울산으로 시집을 왔다. 시집와서는 꽃이 예쁘게 피면 꽃이 시드는 것이 아까워 꽃을 말리는 일을 하니까 ‘무슨 한약방 차리냐’ 하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는데 그 당시에는 울산에는 꽃을 말리는 일은 없었는데 그런 일을 했다.


천지상회는 설탕, 밀가루, 전국에 대리점 열여섯 개나 가진 가게였는데 잡다한 것을 몇 백 개 파는 잡화도매상이라고 보면 된다. 경남일대 총판이니까 사고파는 규모가 엄청났다. 제일제당에서 설탕은 하루에 대여섯 대 트럭으로 올라오기도 했다. 제일제당에도 자주 갔는데 이병철 님과 가락국수도 같이 드셨다. 울산세무서에선 납세 1위가 천지상회였고 모든 잡화를 다 취급했다. 울산요식업회장 전철우 씨가 우리 시아버지 밑에서 20년 가까이 우리 가게에 있었다.


얼마 전 점치러 가서 만난 점쟁이 이야기가 시부님(이규봉)은 장날마다 울산 거지들 모아서 국밥 먹이고 하셨단다. 좋은 일 하셨다고 칭찬을 많이 하더라. 한 때 남편이 피아노 대리점도 했는데 윤철희 씨가 아주 어릴 때 콩쿠르 대회를 나갈 때 우리 가게 제품인 호르겔 피아노(삼익악기 전신)을 이용했는데 제품을 홍보하기 위해 ‘호르겔 피아노’ 밤새 준비해 이름을 새겨 붙였다. 본사에 자랑을 했더니 사장에게 보내줬다. 마침 스타인웨이 공장장이 와 있었는데 너무 기발한 발상이라며 홍보 특허를 하라고 할 정도로 나름 효과가 있었다.


06-3

<제33회 대한민국미술대상전 대상. 인터리어 일을 하다가 주변 권유로 우연히 발견한 그의 재능은 국전 대상을 받는 작품을 만들었다.>


9. 윤이상 선생님과 더 기억나는 일화가 있다면? 


어느날 숙명여대 이애내 선생님에게 배우러 가기 위해 아버지와 윤이상 선생님과 같이 열차를 탔는데 서울까지 10시간이 걸렸다. 악보 책은 아버지가 들고 윤이상 선생님은 녹음기 큰 걸 들고 간다. 나는 소꿉 장난감을 들고 탔다. 


이애내 선생님 레슨 받았던 친분으로 프랑스 유학 서류 꾸밀 때는 숙명여대 학장으로 계셨던  선생님 도움을 받은 걸로 알고 있다.  


10.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내 작품을 설명해달라고 하면 난 설명할 것이 없다. 피아노를 치든 옷 만드는 것이든 내 작품도 설명할 길이 없다. 그냥 되었기 때문이다. 


내 작품이 걸리면 잘 어울릴 것 같은 공간을 잘 아는데 두바이가 생각나더라. 중동 두바이 왕국이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으니 그 색감과 무채색 내 작품이 아주 잘 어울릴 것으로 생각한다. 50~60년이 흐르고 난 뒤라도 그런 건물에 내걸리는 것이 소원이다. 루브르 박물관에도 하나 내걸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작품을 한다. 당장은 최근 김정숙 여사님이 독일에서 윤이상 선생님을 기리며 동백나무 심은 것도 그렇고 내 예술작품으로 고마운 마음을 청와대에 전하고 싶다. 그런 바람으로 아버지와 윤이상 선생님께 기도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작품도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다. 그러면 굳이 프랑스 파리 에펠탑 아래서 죽을 일 없다. 이런 이야기는 내 자식에게도 다 한 적 없는데 이런 이야기를 다 한다. 이 인터뷰가 좋은 계기가 될 것 같다. 


인터뷰어 이동고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