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문수사 법당

<문수사 법당. 보현대에서 바라본 문수사 법당 영역. 바로 앞 지붕이 공양간이다. 맑은 날 동해가 보인다.>


문수산의 8부 능선에 문수사가 있다. 어떤 방향으로 문수사를 오르든지 간에 일정 지점에 이르게 되면 울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문수사는 절벽에 축대를 세워 공간을 넓혀 만든 절이다. 문수사의 풍수 형국은 천 길 낭떠러지 바위 위에 제비가 집을 지은 듯한 ‘연소형(燕巢形)’이다. 재물과 액땜, 건강, 장수가 연소형 명당의 풍수 발복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문수사를 젊은 여자가 꽃을 바치는 ‘옥녀헌화형’ 명당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법당 앞 남암산이 왼팔을 가지런히 하고 오른팔을 길게 뻗어 문수산에 무언가를 전해주는 모양새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여자가 꽃을 바치고 제비집은 지은 자리에 문수사가 있다


문수사에 가보면 알겠지만, 문수사는 문수산에 없고, 청량산에 있다. 지도에는 청량산도 없다. 결국 문수사는 문수산도 청량산에도 없다.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문수산과 영축산을 함께 일러 청량산이라 했다. 영축산

은 붓다가 법화경을 설법한 산이고, 문수산은 문수보살이 현신한 산이다. 청량산(중국 오대산)은 그곳에서 문수보살을 만났던 자장율사 때문에 우리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문수암이 있어 청량산은 문수산으로 개칭된 듯하다.


16명부전과 삼층석탑

<명부전과 삼층석탑. 명부전은 한때 극락전으로 가장 오래된 건물이었으나 2005년 신축했다.>


문수사의 창건과 관련한 구체적 역사는 전해오는 것이 없다. 즉 신라 때 창건되었다고 하나 누가 언제 창건하였는지는 불분명하다. <삼국유사>의 연회국사와 관련한 문수고개, 아니고개 지명과 경순왕의 무거 지명과 연관 지어 볼 수 있지만, 사찰 창건과는 실질적 구체적 관련성은 없다. 자장율사 창건설도 마찬가지다. 문수사의 역사는 1799년(조선 정조 23)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 절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사찰이 유지된 듯하다. 또 문수사 칠성탱화(1855년, 철종 5년), 석가모니 후불탱화(1861년, 철종 12년), 지장탱화(1893년, 고종 30년) 등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중창 불사가 있었다고 보인다.


현대는 한암 스님의 상좌였던 애국지사 조용명 스님(1906~2003)으로부터 시작한다. 통도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김말복, 배기철 등과 배일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항일활동을 하다가 1941년 구속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 통일종단 발족과 관련하여 활동하다가, 불교정화 문제가 일단락된 후 1962년 문수암에 주석하였다. 문수사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바뀌게 된 것은 1983년 청하당 성원 대종사(1927~2002)의 중창 불사 원력과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시주 공덕, 그리고 신도 대중의 염원에 힘입어 지금의 대가람을 이루었다. 스님은 조계사 및 통도사 주지를 하고 중앙종회 의원, 영축총림 부방장,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을 역임하였다. 또 한국불교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理)와 사(事)를 겸비한 거목이었던 스님은 통도사에서 2002년 입적할 때, “쉬고 싶다. 쉬어라.(一切放下, 休去休去)”라는 임종게를 남겼다.


재물복 있는 아들 낳기를 바란 아낙과 롯데 신 회장의 시주 불사


가난했던 둔기마을의 한 아낙이 가난이 너무 몸서리쳐져서 이곳 문수사를 찾아서 재물복이 있는 아이를 점지해 달라고 부처님께 열심히 기도한 뒤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롯데 신격호 회장이라 한다. 그 어머니가 중창 공사를 해줄 것을 아들에게 부탁하여, 신 회장은 어머니의 염원대로 청하 스님 때 대대적인 시주를 하여 지금의 문수사 가람 형태가 갖추어졌다. 그 후 향과(香果) 스님을 거쳐 현재의 월파(月把) 스님이 1999년 11월 취임하여 또 중창 불사를 하고 문수암을 문수사로 개칭하였다. 통도사 주지로 일주문 건립과 성보박물관을 건립하였던 스님은 조계종 원로의원으로 월하스님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형 사제가 이미 입적한 구하문손의 문장으로서 통도사의 영축법맥을 잇고 있다.


16문수사 범종루

<문수사 범종 주변은 문수사의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문수사는 범종루를 기준으로 요사 영역과 법당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요사 영역에는 공양간 건물과 스님의 거처인 동시에 수행공간인 보현대가 있다. 법당 영역에는 종무소, 대웅전, 명부전 그리고 극락전, 약사전, 산신각이 있다. 현재 절의 경내 면적은 4053제곱미터로 그 위에 건물 10동 연건평 470.37제곱미터이다. 공양간 뒤에는 용왕대가 있다. 그 옆 계단을 오르면 보현대다. 문수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건물이다. 지금의 보현대는 처음 보현암이라 불리어진 문수산 남쪽 중간지점 칠기점에 있었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1920년경 마지막 주지는 범안당 스님이라 전해지고 있다. 그 후 보현암은 문수암에 귀속되어 보현각이라 불렸다. 1994년 청하 스님이 중창하여 보현대로 개칭하여 보현보살, 문수보살,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을 모시고 있다.


문수사는 산문, 일주문, 천왕문이 없다. 하지만 주차장에서 오솔길을 걸어 병풍바위 아래를 지나 오르는 바위 사잇길 통천문(通天門)이 기둥 없는 산문 역할을 한다. 그곳에서 바위에 올라 보면 울산이 한눈에 내려 보이고 고개 들어 보면 바로 문수사가 있다. 입지적 조건과 주변의 빼어난 경관은 문수사가 성지임을 되새기게 해주고 있다.


문수사 범종루는 다른 사찰의 일주문 역할까지 하며 승속을 구분하는 경계지점이기도 하다. 범종루는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2층 사모지붕 건물이다. 범종루 밑이 경내로 드나드는 유일한 문이다. 종루 오른쪽 기둥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수사(首寺) 문수사”라 적혀있다. 범종루 상단에 “청량산(淸凉山) 문수암(文殊庵)” 편액과 범종 주련 글씨는 통도사 방장을 역임한 노천 월하스님의 것이다. 주련은 당 현종 때 과거에 낙방한 시인 장계가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고소성의 풍교에서 숙박하며 쓴 <풍교야박〉이다. 이 시와 관련한 그림이 통도사 명부전에 있다. 1987년 낙성한 범종루와 범종 역시 롯데 신 회장이 대시주자이다. 범종루 현판은 병인(1986)년 12월 청하 스님의 글씨이다.


16문댐돌

<문댐돌. 문댐돌은 종교의 본질이 기도, 소원 성취임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바다 같은 터럭, 수미산 같은 겨자씨를 보려하는 마음 어디 있는가


법당 마당에 서면 종무소와 법당이 남향으로 서 있다. 대웅전은 겉으로 보아도 웅장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법당이 예불의 공간으로 협소하여 대웅전 앞에 건물을 확장하였다. 대웅전은 정면 다섯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역시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시주로 신축되었다. 건축에 사용한 나무는 백두산 홍송이다. 대웅전 주련은 삼면마다 그 내용이 각기 다르다. 서쪽 주련은 문수보살과 관련한 것이다. 남쪽 주련은 “가는 터럭이 큰 바다를 삼켜 먹고, 겨자 씨앗에 저 수미산 들어있네.”로 시작하는 글로 통도사 극락암 무량수각에도 걸려있다. 글씨는 구하스님(九河 天輔 1872~1965)의 것이다. 동쪽 주련은 통도사 대웅전에도 있는데 역시 구하스님의 글씨로 보인다. 마하승기율 제7권(摩訶僧祇律 卷第七)의 오백미후(五百??) 설화, 즉 “오백 원숭이가 우물에서 달을 건지는 이야기”와 관련한 주련이다. 잘못된 지도자를 따를 때 달을 건지려는 무모함이 오백 원숭이를 죽게 하였다. 혹은 달을 건져 부처님께 공양하려는 갸륵한 마음씨가 나중에 원숭이들이 뒷날 다시 태어나서 오백 아라한이 되었다는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외벽에는 문수, 보현보살 벽화가 왼쪽 오른쪽에 그려져 있다.


법당 꽃살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면에 석가여래좌상을 모시고, 왼쪽에는 지장보살 입상과 보현보살 좌상을, 오른쪽에는 문수보살 좌상과 관음보살 입상을 각각 봉안했다. 석가 여래좌상은 2004년에, 문수 보현보살 좌상은 2003년에 조성된 것으로 화원은 청원 스님이다. 불상 위에는 붉은 빛의 닷집이 층층 지붕을 하고 있고, 천장에는 용들이 호위하고 있다. 법당의 불상 뒤쪽 중앙의 석가모니 후불탱화는 1986년 만봉(萬奉, 1910~2006, 속명 이치호) 스님이 그린 것이다. 만봉 스님은 우리나라 최고의 단청장이었다. 단명할 것이라는 점술가의 권유 때문에 여섯 살 때 서울 봉원사에서 출가한 스님은 1928년 당대 최고의 금어 김예운 스님을 만나 불화의 세계에 접하게 되었다. 스님은 단청에서 시작해 불화까지 두루 잘 그리는 금어였다. 스님의 불화작품은 남북한을 통틀어 중요 사찰과 문화재에 남아 있는데 금강산 표훈사, 유점사, 경회루, 경포대 등이 대표적이다.


16문수사 공적비

<문수사 공적비>


2008년의 보현 문수보살 후불탱화와 법당 왼쪽의 1998년 감로탱, 오른쪽의 1997년 목각 신중탱 역시 청원(靑苑, 속명 이희옥) 스님의 작품이다. 스님은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미술학과 교수이자 스님으로서는 최초의 목조각장 인간문화재다. 석정 스님에게서 단청과 불화를 사사했다. 30세에 검정고시를 거쳐 1986년 독학으로 대입 검정을 거쳐 1988년 동국대학교 미술학과에 입학하고, 대학원까지 마쳐 마침내 교수까지 된 입지전적인 스님이다. 감로탱은 의지할 곳 없이 떠도는 영혼들에 감로와 같은 법문을 베풀어 지옥에서 구출하는 그림이다. 지옥과 현생의 삶이 하단에 공존한다. 아쉬운 것은 여전히 농경사회 생활이라 현실성이 빠져있다. 이제는 지금 여기의 삶이 그려져야 할 것이다.


지옥은 우리의 삶 가까이 늘 있다


대웅전 법당 오른쪽 작은 마당 위에 명부전이 있다. 명부전은 한때 극락전으로 월파 스님이 2005년 새로 준공하기 전에 가장 오래된 건물이었다. 명부전 옆에 3층 석탑이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1층의 탑신은 길고 2, 3층은 짧아 상승하는 느낌은 있지만 안정감이 다소 없어 보인다. 지붕돌 모서리에는 풍경을 달았던 풍탁공이 남아있다. 한때는 풍경의 청아한 소리 문수사를 휘돌았을 것이다. 외벽화는 심우도 그림으로 모두 일곱 개이고 마지막 그림은 일원상으로 마무리했다. 그림의 공간이 부족한 탓이다. 명부전 안에는 민머리의 지장보살을 모셨다. 한손에는 석장을, 또 다른 손에는 보주를 잡고 있다. 후불탱화는 지장시왕도이다. 그런데 이 탱화에 다 표현하지 못한 지옥 모습을 건물 내벽화에 네 개를 그렸다. 도둑질을 하거나 빌려간 물건을 갚지 않은 중생들을 무쇠솥에 끓이는 화탕지옥(火湯地獄). 돈을 듬뿍 받고도 나쁜 음식을 대접한 자, 쌀을 팔아도 되를 속여 적게 준 자가 가는 곳으로 죄인을 형틀에 가두고 큰 톱과 작은 톱으로 열두 가지 뼈를 썰면서 산채로 토막토막 분해하는 거해지옥(鋸解地獄).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은 중생들이 못이 박힌 침상에 누워 중생의 몸에 못을 관통하게 하는 철상지옥(鐵床地獄). 살인, 역적, 강도, 고문, 도둑질을 한 자가 가는 곳으로 독사들이 우글거리며 온몸을 감아 물어뜯는 독사지옥(毒蛇地獄). 초등학교 시절 학교 앞 문방구에는 이 지옥도 그림을 책받침으로 판 적이 있었다.


16문수사 원경

<문수사 원경. 남암산쪽에서 바라본 문수사, 병풍바위 위에 위태롭게 자리하고 있다.>


명부전 옆 돌계단을 지나면 또 다른 종교적 공간이 나온다. 미륵전과 약사전이라 되어있지만, 건물은 없고 빈 곳이다. 이 공간은 전통 신앙적 영역이기도 하다. 절벽 왼쪽 계단을 올라가면 검은 돌이 세 개 있고, 바위는 움푹 패여 있다. 그리고 주변 벽에는 동전을 붙여놓았다. 바위나 벽은 문댄 흔적 때문인지 검은색이 군데군데 보인다. 이곳이 바로 문댐돌의 공간이다. 큰 자갈돌을 손에 쥐고 바위 바닥을 문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녀노소 이곳을 방문한 사람은 소원성취해달라고 빌며 문지른다. 바위가 더 움직이지 않거나 동전이 붙으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한다. 문댐의 행위는 고대부터 있었다. 성혈이 그 흔적이다. 고대인의 기도 형식은 지금도 유전되고 있다.


간절함은 이루어지고 미륵불은 역사의 계기를 만든다


기도발(祈禱發)은 모든 종교의 힘이다. 기도는 일종의 정신 집중이고 그 집중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심리이다. <꿈꾸는 다락방>의 저자 이지성이 말한 “간절히 원하면 꿈은 이루어진다. (R=VD, Realization is Vivid Dream.)”가 그것이다. 간절히 생생하게 기도하면 실현되고 현실이 된다. 개인의 기도가 모여 역사의 기도가 되기도 한다. 그 기도의 중심에 미륵부처가 있다.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먹고살기 힘든 시기에 미륵 신앙이 등장했다. 미륵은 주로 하층민에게 희망의 대상이었다. 전쟁과 기아, 패륜, 각종 질병이 횡행하는 국가, 사회적 말기 현상에서 미륵 신앙은 민중 봉기의 원천이 되어왔다. 그 미륵부처가 문수사에 있다.


16문수사 초파일

<문수사 초파일>


미륵 석불을 모신 암벽은 꽤 높은데 표면은 바위 일부가 깨어진 듯 다소 거칠다. 결가부좌하고 있는 석불은 비교적 작은 편이다. 암벽에 시멘트로 감실을 만들고 대리석을 잘라 비를 피할 수 있는 처마를 만들었다. 광배와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석불은 오른쪽 어깨부터 팔꿈치까지 떨어져 나갔다. 돌은 다소 붉은색이 감도는 화강암이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대각선 형태로 검은 색선이 돌에 새겨져 있다. 양 눈썹 사이에는 동그란 동전같이 패여 있다. 상호는 원만하지만, 마멸이 무척 심하고 나발에 육계가 표현되어있고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대의는 우견편단으로 입었으며, 옷 주름이 굵은 편으로 무릎 위까지 흘러넘치고 있다. 두 손은 배 위에 맞잡고 있다. 석불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청하스님이 청량사지 인근에서 발견하여 모시어 온 것이라 한다. 미륵 석불 옆에 새롭게 감실을 만들고 약사여래석불좌상을 모셨다. 1990년 청하 스님 때, 울산 경진여객 대표 서정만 회장의 대시주로 서원석재에서 조성했다.


대웅전이 깨달음의 공간이라면 극락전, 약사전, 산신각은 기도의 공간이다. 산신각은 측면 두 칸, 정면 세 칸의 건물이지만 정면 공간을 기도 공간으로 더 확장하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북쪽에 있는 엄청난 인등이다. 이렇게 많은 인등이 켜진 공간을 본 적이 없다. “인등기도동참제자소원성취도량”이란 팻말이 보인다. 문수, 보현으로 나누어져 있는 인등은 수천 개가 넘는다. 문수 인등이 5천개가 넘는다. 문수사가 기도도량임을 확실히 깨달을 수 있는 공간이다. 건물 정면에는 칠성을, 좌측에는 산신, 우측에는 독성을 모셔놓았다. 칠성탱은 2010년, 독성탱은 1956년, 산신탱은 1961년에 조성한 것으로 이 세 탱화에는 금어에 대한 기록이 공통적으로 없다.


16감로탱 부분

<감로탱(1998. 청원 스님) 부분도. 지옥과 현실이 공존하고 있다. 아귀는 먹지 못하는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가뭄에 산신령이여, 비를 내려주소서


올해는 예전과 달리 가뭄이 무척 심하다. 문수산에 기우단이 있었다. 박시무(1828~1879년)는 산신령에게 가뭄에 단비를 내려주기를 간곡히 소원하는 기우제문을 지었다. “기도하면 문득 감응하여, 우리 남쪽 지방을 윤택하게 하는데 … 처음에는 거북등처럼 터지더니, 나중에는 물고기가 사는 못도 말랐네. … 제단을 깨끗이 쓸고, 깨끗한 몸으로 간절히 축원 드리네. 부디 밝게 감통하는 은혜를 베풀어, 흡족하게 단비를 내려 주소서.” 산신령이 감복하여 비가 많아 오기를 기원하며 문수사를 내려왔다.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