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대 앞에서 연길 가로지르는 운동 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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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을 이야기해도 되죠?”


본지는 2017 하반기 들어 87년의 또 다른 축들인 민주당과 학생운동권의 발자취를 증언할 수 있는 이들을 만났다. 그 두 번째 순서로 7일 중구의회에서 신성봉 의원과 대담했다. 그도 최대한 정확하게 회고하려 애썼지만 시간의 흐름은 어쩌지 못하는 듯했다.


신성봉 중구의회 의원(이하 ‘신’)=그 당시 학생회 구조를 먼저 말하자면 유영철 씨가 회장이었는데 학생회장이나 공대 쪽은 상당히 소극적이었고, 사회대에는 김태곤, 박미화, 인문대 김인식, 권순정이 있었고, 공대는 워낙 활동을 안 해서 기억이 잘 없습니다.


신현주 씨가 총여학생회장, 서클연합회는 김창원, 최민식 씨는 대불연(대학생불교연합회)이었죠. 추일천 씨나 동섭이는 언더써클 쪽이었고 진석이는 부산에 있었어요. 야사(야전사령부를 줄여서 부른 말. 시위 현장 지휘) 관련도 제가 했고 인식이 등은 운동권이 아니지만 양심적으로 ‘이건 아니다’고 해서 선뜻 나서줬죠.


본래는 방위를 가려다 영장 받고 3일 만에 군대를 갔다는 신 의원은 강제징집으로 인해 본래 79학번이지만 울산대 85학번으로 입학하게 된다. 그의 고향은 부산이다.


신=군대 징집 때문에 울산에 처음 온 거예요. 본적이 양산 동래 기장이면 병력들이 울산 공설운동장에 집합해요. 거기서 기차타고 춘천 102보충대로 가는 거죠. 저는 20사단 수색대였습니다. 제대하고 나서 예비고사도 학력고사도 쳐본 세대네요. 하하.


예비고사 마지막 언저리 세대인 그는 3학년 때 87년을 맞이하게 된다.


이종호 편집국장(이하 ‘이’)=87년 이전에 울산대 학생운동의 역사랄까 계보가 어떻게 되나요?


신=85년도 기억은 잘 못하겠고 86년도까지 학과 학회장을 했어요. 다만 85년도에 총학생회 부활 추진위가 있었죠. 85년도에는 전 남구의회 의장 윤원도 씨가 학도호국단장을 했는데 총추위 위원장을 김진석 씨가 잠시 맡았죠. 이듬해 86년도 이진호가 총학 회장을 하고 87은 유영철, 88 정대연, 89 천병태 순으로 총학생회장을 맡게 됩니다. 유월 항쟁 당시에는 김진석, 천병태, 정대연은 없었고 제가 맡았죠.


이=‘7호관 싸움’부터 시작됐죠?


신=박종석 씨가 현장에서 학생들 선동하고 유월 항쟁에 힘을 많이 쏟았죠. 야간대학에서는 이정재 회장이 많이 도와줬는데 정확히는 기억을 못하겠어요. 종석이 형이 제일 많이 도와줬죠.


지금 도서관 자리가 빈 공터였는데 저는 정문을 맡고 있었고 7호관에서 진석이가 급하게 연락이 와요. 김인식이 그쪽 맡고 있었는데 나무 하나 거리를 두고 전경이 완전히 뱅 돌고 있어서 돌 던지고 난리 났는데 정확히 기억하는 건 제가 일단 중단시키고 인문회장을 제가 데려왔어요. 기억으로는 밀양경찰서 정보과장이 인솔했어요. 워낙 부산하고 같이 대규모 투쟁이 일어나니 파괴가 커서 정문 진출 못하게 할 때였습니다. 울산대는 특히 나갈 데가 없어 힘들었어요. 다 논이었고 로터리 하나 있고 태화다리도 구 삼호교 하나 뿐이었는데 양쪽에 전부 논밭이어서 경찰이 막아놓으면 갈 데가 없었으니까요.


87년 한창 여름 싸움하고 있을 때 운동권 쪽에 정대연이가 학습을 많이 시켰고 노동섭이 삼민투 깃발 들고 나오고 했어요. 엄주상이가 86 인문대 학생회장이고 유월 항쟁 전에 사학과 동섭이와 다 같은 그룹 84학번입니다.


그의 말로는 87년 당시 울산대 총학생회장은 유월 항쟁에 아예 도와주질 않았다고 한다.


신=항상 학생들 데리고 시내도 나가고 독재타도 호헌철폐 외쳤죠. 그 당시 도와준 이가 체육부장 김선동인데 지금 남창 살아요. 6.27인지 당시 주리원 앞에서 대대적 집회를 몇날 몇시에 어디서 모이자고 하고 역할 분담해요. 정확히 기억해요. 우정동 시외터미널 옆 비오리다방이라고 지금은 없는데, 지금은 학원 다니는 이대호가 역할을 다 하고 유영철 회장한테는 주리원 건물에 차 돌려서 주차하는 빌딩 쪽에 골목하나가 있는데 그쪽을 맡아달라고 했죠. 그렇게 집회를 하려고 했는데 거길 약속을 안 지킨 거예요.


경찰이 최루탄 쏘고 난리도 아니었다. 지금은 차가 안 다니는 울산교 쪽으로 많이 이들이 피신했다.


신=주리원 맞은 편 다방 앞에서 최루탄에 눈을 맞은 고등학생이 있었는데 신원을 파악 못 했어요. 수소문해보니 경찰서로 갔대요. 지난 대선 끝나고 태화강 쪽에 자전거 타고 가다가 한 무리를 만났는데 남구의회 의장했던 이도 있고... 무리 중에 한 명이 와서 “오! 형님 잘 계십니까?” 이러는 거예요. 그 친구가 척과농협에서 일하는데 저를 어찌 알았냐면 4학년 인문대의원회 때 부의장 맡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하다 그 친구가 ‘사실은 내가 형님이 항쟁 주도하고 할 때 고3이었는데 최루탄을 맞았다.’고 고백한 거죠. 어떤 상태였는지도 모르고 파악이 안 되니 경찰서장 찾아오고 했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파편을 맞았나 보더라고요. 그런 사연도 있고요.


사법적으로 넘겨주기도 하고 소위 말하는 포로(?) 교환도 하고 학교 앞에서 화염병도 준비하고 투석전 벌어지고 야사 역할을 해서 떠오르는 추억이 많네요. 학생회장이 안 해주니 학생들도 연락하고, 또 제가 나이도 제일 많았죠.


삼호교 밑에서 작전 짜고 밤에 조를 짜서 신현주 하고 남구 넘어가면 강남교회에서 받은 유인물 집집마다 배포했죠. 대부분 울사협서 했지만 우리가 만든 것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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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울산대 학생들을 이끌고 거리시위에 나서는 신성봉 의원(맨 앞). 사진=신성봉 의원 제공.


이=6.29까지는 그렇게 계속 한 거죠?


신=계속 가투하고 그랬죠. 실제 학교 밖 나오기가 쉽지 않아요. 로터리 넘어서기 어렵고 봉쇄하면 갈 데 없으니 학교 앞에서 쭉 했죠. 시내 쪽은 개별로 가고 우리는 안 잡혔으나 일반 학생이 연행 당하면 강동 정자 이런 버스도 없는 데 떨궈놓고 걸어오게 했죠.


이=서울에서는 난지도...(하하)


신=막 양남 쪽에 갖다버리고 그러드만. 걸어와야죠. 길이 멀었잖아요. 그런 경우 많았죠. 그땐 참 그랬죠...


아무튼 우리들은 많이 못 나갔죠. 울산대 자체가 도심하고는 좀 떨어졌고 차단시키면 끝이니까. 시내에는 시민들이나 울사협에서...


이=7,8,9 노동자 대투쟁 때는 어땠나요?


신=노학연대, 현장에서 같이 시위하고 그랬죠. 자동차에 같이 하다 붙잡힌 지진성 하고 잡혀서 그런 적 있고요. 옛 울산경찰서 지금은 북정공원 자리에 유월 항쟁 이후에 노동자대투쟁 때 사람들이 많이 연행됐었고요. 이재오 김문수 등 민중당에서 하도 오래돼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같이 싸우기도 했죠. 뭐 그들은 이후에 다 변심했지만...


남목고개 넘어 지원 가기도 하고 만세대 가서도 그렇고 128일 때 아니라 그때부터 계속 지원투쟁을 했습니다. 6.29 끝나고 양심적 학생들이 대부분 참여 많이 했어요.


이=민족학교 때는 결합했나요?


신=새날여는청년회에 결합했었죠. 천병태는 울산연합 쪽이죠. 정대연 저 김창현이 먼저 준비하고 창현이는 투신을 학원으로, 제도권으로 해요. 둘만 청년운동 연합전선 운동하고요.


이=유학을 한 건 언제예요?


신=연변대학 대학원에 2005년 입학해서 겨울방학 여름방학 학기를 2년을 했죠. 3500달러 내고 개별적으로 관련된 학과 교수님하고 1대 1로 학기 중에 박사과정을 주2회 갈 수도 있지만 가기 힘든 상황이라 보름을 상주하고 교수와 저랑 토론하고 과제 받고 토론하고 해서 학점 따고 했죠.


이=그럼 새청 활동을 꽤 오래했네요?


신=그러니까 어떤 요구가 있냐면 여성운동 투신 후배들이 어린이집 만들어달라고 해서 어찌하면 좋을꼬 했죠. 돌이켜보니 울산대학교 보육교사 1기 졸업하고 원장 자격이 39인 이하 시설이라 효문에 어린이집을 지어 햇살어린이집 2층에서 하다가 후배들 요구가 이거 작다 자격을 다시 따라고 해서 제가 또 후배 말을 잘 들어요.


부산대 보육원장 연수과정, 보육시설장 연수과정이 보육시설 인원수 상관없이 원장 자격이 있어요. 울산에서 보육연합회장 7년 맡고 그 많은 여성 속에서... 그때 햇살어린이집 원감이 정대연 동지 부인 박희영이 맡아주고 이영희(현 국민의당) 부인 하현숙 씨가 차량운전, 조남애 씨는 교사, 김광식 딸 김고은이하고 연이, 광식이 하고 구속됐을 때 우리 어린이집에서 다 키우고 그랬죠...


햇살어린이집 하다가 우연찮게 사단법인 울산청소년선도지도회 사무총장을 맡아달라고 해서 그때만 해도 완장차고 하는 게 안 맞았는데 필요하다 싶어 22년째 하고 있어요. 목적은 애들 건전육성 사업 프로그램 진행, 청소년 유해환경 감시지도. 여성가족부 산하로 문체부에서 이관된 이 봉사하면서 인연된 게 2000년도에 김대중 정부 청와대에서 세계 각처에 조선족, 당시 중국은 교포로 안 부르던 시기니 그때 아마 청와대 초청으로 온 분 중에 연변 차세대 관심사업 위원회 정봉곤 주임이 울산 청소년 건전 육성 사업하는 곳을 소개해 달라 해서 우리 단체를 소개합니다. 장춘시 교육감하고 자매결연을 타진하죠.


당시에는 한국에 초청장이 없으면 관광사에서 몇천만원씩 돈 맡겨놔야 불법체류 면할 수 있었죠. 그분들 많이 초청해 울산 구경시켜주고 초청장만 있으면 심양에서든 어디든 아무 제약 없이 취업하러 온 애들 부모도 만나게 해주고 그렇게 저변을 넓히며 백두산캠프도 가고 연길 하고 신정2동, 용정시 하고는 울주군의회하고 자매결연을 제가 주선하죠.


그러다 신 의원은 역사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신=제가 사무총장인데 박사논문이 없어 입학해보라는 제의를 받아 시작했죠. 안타깝게도 자료 부족으로 박사논문으로는 못썼지만 박상진 의사에 대한 역사적 검증이나 정황증거를 찾고 싶었어요. 교수님 하고 많이 갔는데 아예 자료가 없어서 못 찾은 거예요. 대사관이 이런 업무를 소홀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많이 했어요.


연구주제를 이주사로 바꿨죠. 하얼빈 2차 이주. 병자호란 때부터 이주로 볼 것인지 일제점령기부터 볼 것인지 중국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있어요. 1926년부터 1985년쯤 되면 중국정부에서 족적을 바꿀 사람은 바꿔라 해서 귀화입적 토지문제 등 탄압 피하기 위해 입적 귀화를 하고 했는데 심양 쪽에 많이 갔지 않나요. 심양 쪽 봉개현 쪽에 까만 치마저고리 입는 풍속, 집안의 가장 높은 어른은 독상하고... 85년도에 사실 우리가 조선족이요 하고 족적 바꾼 사람이 2천 명 정돕니다. 병자호란 때 강제로 20만 정도 끌려간 이들 중 10만 정도만 돌아오고 10만은 숨어 지냈는데 그때부터 봐야 하지 않냐는 시각도 있고 탄압 피하거나 독립운동 위해 온 사람부터 봐야하지 않느냐는 시각도 있어요.


이=민주노동당 이야기도 좀 해주시죠.


신=아주 사적인 이야기입니다. 95년 첫 지방선거 때 재보궐 출마하죠. 나는 할 생각도 없었고 천병태 의원 출마하고 내가 수행하고 정대연이가 기획하고. 인지도가 박성민 청장은 95프로 천병태는 1프로도 안되는데 한 달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때는 울산시의회 의원 선거, 97년에 광역시의원 겸 구의원이 됐지요. 당선이 됐죠.


저는 개인적으로 여러 문제가 있었어요. 아픈 과거지만 구의원 못하고 광역시의원 양정 염포 효문에 출마하려고 했죠. 이상범 위원장이 하겠다고 그래서 조정하려고 저 이상범 김광식 노조위원장, 두꺼비 이영현은 민주노총 앞전에 현총련 회장 이렇게 네 명이 앉아 조율하려고 모였죠. 김 위원장이 전직 노조위원장으로 이상범을 고려해야... 신 의원이 노조 없을 때 도와주고 두꺼비 이영현은 내는 개입 안 하겠다 했죠. 그래서 내랑 네 시간 넘게 ‘형님 농소 쪽 가시면 형님도 당선되고 내는 어린이집도 있고 노조 아니라 운동도 못합니다. 한번 지역구 바꿔보자’고 설득했는데도 안 되데... 민주노총 소속 노조위원장 정확히 기억은 못하는데 31개 단위사업장 학성동 가구거리에 사무실 있었는데 제가 노조대표자투표에서 98년도에 이상범 씨를 이겼어요.


이=그 얘기는 누가 알려줬죠?


신=조일래 씨가 이야기해줬는데 내가 한 표 차이로 이겼는데 이상범 씨가 이 선거에 승복을 못한다. 이유는 자기가 노조위원장 출신이고 신성봉 이는 노조 조합원도 아닌데... 그래서 난리가 나요. 현대호텔 노조위원장은 당신이 선배 위원장인데 그럴 수가 있냐... 송철호 시장, 김창현 구청장 출마시킬 때죠. 그래서 그럼 내가 양보하겠다 양보선언을 했던 데가 지금 옥동 가족문화센터(옛 청소년 근로복지회관)에 민주노총 대의원 400명 속에 우리 진보진영에서 동구청장 북구청장 당선해야 되는 거 아니냐? 분란 일으킬 생각 없다. 그렇게 제가 물러났는데 2년 딱 하고 사퇴하고 국회의원 하겠다 해서 최용규 하고 경선해 울산연합에서 가만히 있습니까? 용규가 이겼지. 그 뒤로 하나도 안 도와줬어요.


이=그때 현대자동차 예비선거에서는 이겼고 당원투표에서 진 거죠.


신=합의하고 들어갔잖아요? 그러면은 애당초 합의를 말던가...


북구청장 조승수 동구청장 김창현, 북구에서는 시의원이 이상범하고 강석구가 됐죠. 윗세대니까 본인은 농소3동 구의원 준비하고 있었는데 노동계 아무 쪽에서 없으니까 저보고 농소3동 가라는데 어린이집 있는데 아무리 그래도 갔으면 됐을 수도 있죠. 근데 이상범 동지 갔으면 둘 다 됐죠. 아무도 없으니까 강석구가 들어가서 구의원 되고 그래가 새누리당 가가 구청장도 되고 그래 됐죠. 북구 시의원 티오가 두 개였는데 둘 다 했으면 둘 다 됐죠. 괘씸하죠. 다른 말들이 있었겠지만 기록이 있어요.


아무튼 내가 가장 어렵다는 민노당 지지 3프로라는 태화 우정에, 우정 태화가 가장 보수였죠. 병영만 해도 지지가 많았는데 우정은 특히 민노 지지 3프로로... 어린이집연합회 회장, 청소년 사업은 계속 하고 조직사업도 보육사업도 계속하고 있었죠.


신 의원은 2010년 구의원에 당선되고 2014년에는 당적을 바꿔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출마해 당선된다.


신=내 같은 사람도 없을낀데 오번(무소속)달고 사번 달고 삼번(민주노동당 등)달고 이번(민주당)달고 일번 달고 선거해본 사람... 요번 대선 때 일번 달았죠. 통진당으로는 3번. 바뀌고 나서 이정희 대통령 선거하고 그때 4번이었나 했었고...


이=진보운동이 정치중심으로 가는 경향이 있는데 보육 청년 청소년 등 생활운동에 주목했군요.


신=저만큼 인맥 많은 사람도 없을 거고 노동계 역시도... 뭐 직접 관여는 안했지만...


이=유월 항쟁, 노동자 대투쟁 30주년입니다. 시민운동 쪽이 생활운동에 약한데, 노동운동도 너무 노동에만 갇혀져 있고... 그런 점에 대해 평가한다면?


신=국민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일반시민들이 봤을 때는 자기들만의 사상운동으로 생각하는데, 판단도 노동운동 외연 확장하고 시민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운동연합이든 시민연대든 다른 사람과 다른 행동... 결국 국민 속에서 함께하지 않으면 국민들은 당신은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그 벽을 돌파하지 않으면 힘들겠죠.


이=촛불 이후에 개인적 계획이나 의정활동 계획은 어떻습니까?


신=늘 얘기하지만 말로만 국민이 주인 되는 나라 아니라 구의회이든 시의회이든 선출직 공직자들은 작든 크든 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이해당사자 국민과 함께 토론하고 결정하고 일정한 역할을 해야 된다고 봅니다.


특별취재팀
기획, 대담=이종호 국장
사진, 동영상=김규란 기자
정리=이채훈 기자



울산에서 온 조선인, 찾을 수 있을까
중국에서의 7년, 박상진 발자취 찾으려했지만...


“한국은 박상진 의사를 그렇게 홀대할 수 있느냐? 판사의 명예도 있었고 재산도 상당했음에도 그걸 다 포기하고 독립운동을 했는데...”


신성봉 의원이 유학 중에 중국의 교수들로부터 종종 들은 얘기다.


그는 뒤늦은 나이에 뜻하는 바가 있어 연변으로 건너가 다시 역사를 공부했다. 박상진 의사를 연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독립운동사에 비해 인물 사료가 적었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 자료가 없어 아쉽다는 게 그의 얘기다.


“길림시 같은 경우에는 그가 왜 상회를 차렸는지 그곳에 사람이 많이 살았는지 아니면 경제수준이 높았다던 지를 조사해야 하는데 장춘이라든가 어디든 그 터를 찾을 수가 없어요. 광복회 총사령을 하셨지만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


박 의사는 지척에 모친상에 오다가 일경에 체포가 됐다고 한다.


#만주 이주사로 연구 우회


박 의사에 대한 연구에서 뜻하지 않은 난관에 봉착한 그는 방향을 틀어 조선인 만주 이주사의 이해를 주제로 7년을 공부했다.


“울산 사람들의 만주 이주사에 대해서도 연구를 해볼 수는 있을 겁니다. 김해 청송 영덕 이쪽에서 온 사람 많고 온주 회령 쪽에도 마찬가지였고요.”


본지 취재진의 물음에 신 의원은 다만 의미 있는 증언을 해줄 만한 분들이 다 돌아가셔서 힘들다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연변 자치주에서도 울산에서 가신 분들이 연고 찾기가 쉽지 않을 거 같다는 게 그의 예상.


“현지에서 차세대 관심 사업회라고 우리말 우리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퇴직자 분들이 3, 4세대 분들을 여러 번 주선해 만났는데 울산 분은 못 찾았어요.”


연해주로 시야를 넓힐 것을 역제안하기도 했다. 장춘 길림 연길 용정 등을 둘러보면 인터뷰할 수 있는 생존자를 수소문해볼 수는 있지만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게 흠이란다.


조선인 2세대 지도교수에게 사사받은 신 의원은 중국에 우리말을 할 줄 아는 2세대 조선인은 많은데 3, 4세가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고 이야기를 끝맺었다.


특별취재팀



신성봉 “LH 잘못, 차바가 처음 아냐”
가장 큰 잘못 중구...위험지구 지정 않아

주민피해금액 입증, 소송 최대 쟁점 전망


‘천재(天災)냐 인재냐.’


해가 바뀌어 다시 장마철이 돌아왔지만 지난해 가을 차바 수해는 아직도 엘에이치(한국토지주택공사)와 주민들 간에 갈등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신성봉 중구의회 의원은 장마 속에서 엘에이치에 맞선 주민들과 함께 싸우고 있다. 비오는 금요일, 중구의회에서 이종호 국장이 신 의원과 차바 주민 대책위 이야기를 나눴다.


이=차바 대책위 활동에 대해 얘기해 주시죠.


신=제가 판단하기엔 지금 만약에 우정동 유곡동 차바 대책위와 투명한 대화가 갖춰지지 않았으면 벌써 차바 수해는 자연재해로 덮여졌을 것입니다. 대책위가 있어 지금까지 투쟁이 이어진 것이죠. 반드시 이기고 싶은 이유는 우정동 태화동이 산기슭도 아닙니다. 강가도 아니고 계곡도 아니고 광역시 중에서 중심지에 10분 만에 물이 1.5미터까지 차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위협하는 건 자연재해가 아니죠. 인재입니다.


두 번 다시는 이런 인재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결될 때까지 주민과 싸울 겁니다. 열한 가지 내용으로 질의서를 보냈죠. 엘에이치에서 2014년 8월 18일 시간당 80밀리 정도 비가 와서 유곡동 유곡로 주변 14가구가 완전 침수된 적 있어요. 그 당시에도 구의회 제도 활용해 결의문 채택했죠. 원만한 협의를 해 피해보상해라 귀책사유가 있다. 의원들 사인 받고 재판을 받지 않으면 합의를 하지 않겠다고요.


근데 2주 후 본회의에 상정됐는데 부결이 됐어요. 어떻게 구의원들 당신 손으로 싸인해놓고 당신 손으로 부결을 시키냐? 속기록에 다 기록돼 있는데 이 양반아... 그렇게 손배소 붙어서 1차 2차 3차 심리 때 주민들이 증인을 서달라고 해서 저는 엘에이치에 잘 보일 것도 없고 해서 갔드만 변호사 둘이 와가 저 혼자하고 30분 동안 격론이 벌어집니다. 젊은 여성 판사였는데 30분 동안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저한테 이런 질문을 해요.


“왜 엘에치에 귀책사유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억장이 무너지데요. 이렇게 말했죠. 유곡동 200-16 경관조경에 쓰인 마사토가 유곡로 집수정 23개, 횡단로, 우수받이 42개 등등 유곡로 콘크리트 구조물로 들어가는 데를 다 막아놓았다. 마사토에 다 막히니... 근데 변호사가 하는 말이 증인은 이 마사토가 자기네 회사에서 시공한 거냐고, 증명할 수 있냐고 묻대요.


제가 산에 1주일에 한 번씩 가는데 마사 흙인지 산에 흙인지 당연히 알죠. 근데 생각해보세요. 엘에치는 그걸 왜 증인에게 묻나요. 자기가 시료 채취해 전문기관에 맡겨서 귀사가 한 게 아니라는 증거를 제출하면 되지 왜 나한테 묻냐 그랬죠. 엘에이치 인력도 많고 장비도 많겠다. 그랬더니 판사가 자기가 이제야 왜 주민들이 손배소 신청했는지 알겠다, 화해조정신청할 수 있겠냐 하더라고요. 4차 때 그렇게 진행됐어요. 금액 제시하고 변호사도 추천한 사람 없고 내가 하라면 안 하겠다 주민들이 하시라 해서 5500만원으로 조정해요. 13가구 중 제일 피해 큰 가구가 2천만 원 받았고요.


이=차바 때는 어떻게 하나요?


신=지금은 소송할 겁니다. 대규모 소송이 되겠는데 대책위가 완고하게 하지 않았으면 힘들었겠죠. 그럼 용역조사하겠다고 나오는데 피해 원인에 대한 용역을 하면 당연히 용역기관 의뢰대로 해 결과가 나오지 않겠어요? 재판 때 엘에이치는 책임이 없고 지자체가 책임지는 걸로 말할 거고. 저희는 9월말 10월경에 안동대 관동대 교수진들이 합류한 하천학회의 주민(대책위와 중구청 공동) 용역 결과를 안고 끝까지 갑니다.


사실 엘에이치가 2005년 방재청 지침대로 했으면 될 일이라고 봅니다. 아휴... 참 깝깝합니다. 주민대책위는 회의를 계속하는데 가능하면 소송을 빨리 했으면 좋겠답니다. 정상 절차로도 8개월 걸리는데 제일 큰 문제는 500여 세대가 재판에서 피해금액을 입증하는 게 중요합니다. 자기가 백만 원 손해 봤다고 말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요. 일본대사관 앞 수요집회하듯이 매일 집회하자고도 제안해봅니다. 누가 이겨도 이기지 않겠습니까...


엘에이치 외에 구 책임도 크고요 시 책임도 큽니다. 제일 큰 책임은 우리 구청입니다. 왜 그렇냐면 자연재해위험지구 지정 권한이 구청장에게 있습니다. 같은 지역에 2008년 이후에 물난리가 났고 물론 차바처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때 위험지구 지정하고 재해를 어떻게 극복, 복구할 것인지 용역을 하고 그 결과 가지고 배수펌프장을 짓든 지하방수터널(신 의원 제안)을 짓든 결정을 하고 국비지원 받아 방비를 갖췄으면 차바 수해는 일어나지 않았죠. 이건 구청장의 직무유기입니다.


의회 사무실 창에 부딪히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신 의원은 이렇게 인터뷰를 끝맺었다.


“이번 여름 대책도 없는 거죠. 배수펌프장에 지하방수터널이 한두 달에 되는 것도 아니고... 구에서는 축제 하고 사람 모아가 하는 것만 하면 되는 줄 알고... 깝깝합니다.”


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