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족


산을 오르는데 지표면 가까운 나무 가상이 사이에 흙이 고이고 풀이 자란 게 보입니다. 나무는 수령 50년 쯤 되어 보이는 굴참나무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비슷한 굵기의 나무가 연리된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한 그루에서 갈라진 것 같기도 하여 한 그루인지 두 그루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하나이며 둘인 샴쌍둥이처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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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참나무>


하지만 10분쯤 더 걷다가 다시 사정이 비슷한 나무를 만났습니다. 이번엔 상수리나무입니다. 이번에도 지표면 부근 뿌리에서 하나가 되어  샴쌍둥이처럼 보였습니다. 한 그루인지 두 그루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무를 보며 한 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 두 알이 뿌리를 내리고 함께 커가며 저렇게 가족이 되고 한 몸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둘이며 하나인 나무, 형제이며 가족이고 한 몸인 나무도 가능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가지와 달리 나무들의 뿌리는 더 깊고 넓게 상호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몇 주 전 내원사 계곡에서 본 나무들의 뿌리는 장관이었습니다. 각기 다른 세 종류의 나무들 뿌리가 얽히고설키며 서로를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제겐 그들의 모습이 양분을 다투며 싸우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계곡의 거친 풍토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호 협력하는 것 같이 보였습니다.


10-2서어나무와굴피나무뿌리
10-2서어나무와참나무뿌리

<서어나무와 굴피나무 뿌리, 서어나무와 참나무 뿌리>


나무의 뿌리는 버섯 등의 균류와 상리공생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버섯의 균사들이 숲의 땅 속에 가득히 뻗으면서 나무가 닿을 수 없는 곳까지 숲 전체를 연결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무가 균류에게 유기질 영양물질을 공급하면 균류는 수분과 무기질을 공급해주는 것이지요. 그런가 하면 나무들끼리도 상호 물질교환과 소통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나무에 위험이 닥치면 주변 나무들이 그 나무가 보낸 신호를 감지하고 대응할 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벼랑 위에 우뚝 선 소나무도 결코 혼자 선 것은 아니지요. 마치 우리의 신경세포가 전기화학적으로 상호작용하듯, 숲 전체의 생명들도 개체적으로 또 전체적으로 전기화학적 상호작용을 하는 공생체로 봐야 할 겁니다.
이 외에도 나무들은 다양한 생물들과 다양한 방법으로서 상리공생 합니다. 그래서 숲은 다양한 것들이 어우러져 있지만 온통 하나같습니다. 숲 전체가 하나의 공생체입니다.


사람도 그렇게 연결되고 소속된 가족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혈통적 가족 이기주의가 너무 막강하지요. 잘못된 혈통주의 때문에 경제대국인 지금도 외국으로 입양아를 수출하고 있습니다. 빈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맡겨진 아기보다 소위 정상가족에서 태어나지 못해 사생아로 버려지는 아이들이 더 많을 겁니다. 왜 미혼모와 편부 내지 편모 가족을 이상하게 볼까요?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인정하지 못하는 풍토도 그렇습니다. 왜 그렇게 남의 일에 폭력적으로 간섭하고 참견하길 좋아할까요? 그 이유는 역시 혈통적 가족 이기주의에서 파생한 배타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1인 가족 시대에도 여전히 혈통적 가족 이기주의의 전통을 고수하며 살자니, 사이비종교처럼 배타주의가 자리 잡은 것 같습니다. 짐승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말이 있지만, 제 눈에 사람이 숲의 나무와 풀만도 못한 것 같습니다.


정들면 가족


가족에 대한 영화하면 제겐 항상 두 편이 먼저 떠오릅니다. 하나는 마를린 호리스 감독의 <안토니아스 라인>(1995)이고 다른 하나는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2006)입니다. 두 편의 영화 모두 변화한 시대에 전통적 가족관의 낙후함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새로운 가족의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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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아스 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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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의 탄생>


<안토니아스 라인>은 3대의 모계 가족의 모습을 유쾌한 에피소드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계사회라면 원시사회의 가족형태인 줄 알았던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깨며 현대에도 유쾌한 모계가족이 가능하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웃의 남자들은 애인으로 삼촌으로 친구로 동업자로 지내면 됩니다. 편모 가정과 사생아에 대해 한없이 따뜻하고 축복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점이 우리의 차별과 편견을 반성케 합니다.


한편 <가족의 탄생>은 소위 꼰대가 지배하는 한국의 가부장사회의 편견을 유쾌하게 비판합니다. 두 명의 여성이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화합해 꼰대를 몰아내고 하나의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한 집에 엄마만 둘인 딸의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이 유쾌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왜 안 된단 말입니까?
우리들의 정상가족은 어느새 무모한 고집이 되어버렸습니다. 소위 정상가족(?)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정들면 가족이지요.


가족은 한 몸입니다. 나와 남이 없습니다. 남도 나의 일부로 인정해 따지지 않습니다. 있는 것을 같이 나누고 없는 것은 힘을 합해 같이 마련합니다. 계산하지 않고 서로 믿고 사랑합니다. 그런 가족을 갖는다는 것은 분명 사람으로 살아가는 즐거움이며 행복일 겁니다.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맞는 고독한 1인 가구시대에 정상가족의 폭력으로 개인들을 고립시키고 억압하기보다 다양한 가족을 긍정하고 새롭게 꾸려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물론 위에 소개한 영화도 다양한 가족의 한 예일 뿐입니다.


기독교의 탄생과정만 봐도 그렇습니다. 예수는 혈통적 가족주의를 깨고 낯모를 이웃을 가족으로 아우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예수의 이런 시각은 혈통적 가부장제를 고집하는 유대민족에게는 대단한 위협이 되었을 겁니다. 신의 아들이라며 신성모독을 한 것과 더불어 혈통적 가족주의를 깬 것 또한 이단으로 보였을 겁니다.


농경사회의 우리 전통에서는 동네 모든 사람이 나의 부모고 친척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나이든 사람을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고 언니 동생이라고 부릅니다. 좀 먼 사람의 경우도 삼촌, 이모, 조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누구나 다 나의 가족이지요. 우리말은 이렇게 이웃도 가족에 포함시키는 원초적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의 지향이 가족이라는 것을.
사회를 비롯해 종교 등 모든 공동체의 이상과 원형은 아마 가족일 것입니다.


다문화가족


참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소나무와 더불어 제일 흔한 종류의 나무입니다. 여러분은 참나무가 몇 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흔히들 참나무를 여섯 가지로 분류합니다. 갈참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입니다. 계곡에는 키 큰 갈참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가 많고, 비탈에는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떡갈나무가 많고, 능선이나 정상부는 신갈나무가 많습니다. 그래서 천성산 정상과 능선부는 온통 5~6미터의 신갈나무숲이 띠를 두르고 있습니다. 간혹 떡갈나무 숲도 보이긴 합니다. 이후 7부 능선 밑으로 내려오면 키 큰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들이 보이고 5부 능선 밑 계곡으로 졸참나무와 갈참나무들이 보입니다. 대체로 그렇다는 말이지 법칙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생장조건에 따라 이들 나무들이 퍼져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3부 정도의 높이에 오면 이 나무들이 마구 섞여 자라기도 합니다. 신갈나무도 보이고, 굴참나무나 상수리나무도 보이고, 갈참나무나 졸참나무도 보이지요. 그런데 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그 중간형의 나무들이 많다는 겁니다. 수피를 봐도 그렇고 나뭇잎을 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참나무를 6종이 아니라 12종으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왜 그럴까요?


10-5굴참나무와졸참나무 10-5어린상수리나무
10-5어린신갈나무 < 어린 굴참나무와 졸참나무, 어린 상수리나무,  어린 신갈나무>


왜냐하면 이들 참나무들이 서로 수정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잡종이 아닙니다. 잎, 열매, 껍질 등의 다양한 대립형질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이 서로 수정하며 지역과 풍토에 더 적합한 형질을 가진 나무들이 자리 잡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떨까요. 현생 인류의 직계조상이 아프리카 동해안을 떠난 것은 약 7만 년 전이라고 합니다. 그 자손이 전 세계에 퍼져 살면서 백인, 황인, 흑인 등의 다양한 인종으로 분화되었습니다. 머리카락이 검고, 붉고, 노랗고, 피부가 검고, 하얗고, 누렇고, 붉고, 코가 높고, 낮고, 펑퍼짐하고, 털이 많고, 적고, 없는 다양한 특징을 가진 인종이 풍토에 맞게 적응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인류가 다양한 모양으로 지구에 적응해 살아가는 것이나 참나무가 다양한 모양으로 산에 적응해 살아가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지금 세계화시대를 맞이해 인종이 섞이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래서 순수혈통을 중시하는 민족과 국가들은 이것을 큰 위협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 유럽이나 미국의 백인문명이 처한 위기의식과 우경화도 이와 관련이 있을 겁니다. 우리 사회만 봐도 그렇습니다. 3D 업종과 농어촌 총각의 결혼을 위해 동남아 등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들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처음엔 이들에 대한 차별적 관행이 너무나 심해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후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해도 아직도 차별과 편견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문화 가정이 많아지고 다문화의 풍경이 우리 사회 안에서 점점 자리를 넓혀가고 있는 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의 포용이 우리사회를 위해서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순수한 혈통주의가 자연에게나 인간에게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류가 지구 위에서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참나무들이 산의 골짜기에서 정상까지 이렇게 성공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원리에 의해서입니다. 즉 다양성이야말로 생존과 적응의 가능성을 높입니다.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포용하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조용히 자멸하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좀 더 뛰어나게 변화한 현실에 적응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등장하게 될 테니까요. 
숲은 말합니다. 다양하게 어우러지는 사회가 더 아름답고 더 풍요롭다고. 우리 모두가 한 가족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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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산 뱀무 군락>


심규한 화엄늪 환경감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