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산 운해


사시사철 울산시민과 함께하는 문수산은 태화강과 함께 울산의 상징이다. 문수사, 문수월드컵경기장, 문수로, 문수고등학교 등은 모두 문수산에서 비롯되었다. 높이 600m인 문수산은 그 속에 품고 있는 많은 등산로와 휴식 공간으로 인해 언제나 울산 사람들에게 넉넉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역사·문화의 보물 창고와 같은 문수산에는 유서깊은 절들이 곳곳에 분포해있는가 하면 율리 고분군과 문수산성도 있다.


이 산 남쪽으로는 남암산이 자리잡고 있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경순왕의 막내 왕자가  이곳 남암산으로 숨어들어 여생을 마쳤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문수산과 남암산은 신라 멸망의 슬픔을 함께 간직한 채 쌍둥이처럼 나란히 서있다.


<삼국유사>에는 문수산과 관련된 기록이 여러 곳 나타나는데, 이것은 울산 불교가 신라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그만큼 높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시대 울산 문수산은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 신앙의 본거지였다. 따라서 문수산의 불교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곧 신라 불교를 이해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문수산은 신라·고려시대에는 주로 영축산이라 하다가 조선시대부터 문수산으로 불려왔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고, 가장 많이 설법하여 불교계에서는 매우 신성시 하는 곳이 인도의 영축산(靈鷲山)이다. 인도 왕사성 부근에 있는 영축산이 불교 전래를 따라 우리나라에 옮겨 불려지게 된 것이다. 인도 영축산은 부처님이 설법하시던 곳으로 신선들이 살고 있었던 곳으로 독수리가 많아 축두(鷲頭), 축봉(鷲峰), 축대(鷲臺)라고도 하였다. 혹은 산 모양이 독수리 머리와 비슷하다는 데서 온 이름이라고도 한다.


‘영축산’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 여러 곳에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불교의 종갓집인 통도사 뒷산이다. 그러나 지금도 청량면 영해마을에서 문수산으로 오르는 등산로의 첫 번째 산봉우리를 영축산이라 부른다. 이는 문수산을 옛날 영축산이라 불렀던 흔적이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통도사 뒷산인 영축산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산이 울산에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이래저래 울산 불교 및 문수산이 품고 있는 불교문화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준다고 하겠다.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는 문수산이라 기록되어 있고 혹은 청량산이라고도 했다는데 오늘날 청량면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당에 유학 가서 머물렀던 오대산이 여름에도 덥지 않고 시원하다고 해서 청량산(淸凉山)이라고도 하였다. 자장은 그 때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의 감응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자장은 오대산에서 받아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1백알 중 일부를 울산의 태화사에 안치하였다.


이와 같이 자장이 울산과 맺은 인연으로 인해 영축산이 청량산으로도 불렸고, 문수보살이 이 산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여 ‘문수’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불교 화엄경에 보면 여러 보살들이 부처에 이르기 전 마지막 단계인 법운지(法雲地)에서 수도할 때 문수보살이 여러 가지 형태로 변신하여 나타난다고 한다. 이것을 응현(應現)이라고 하는데, 문수산이 바로 법운지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불교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문수산에는 망해사, 영축사, 문수사, 청송사, 취선사, 혁목암을 비롯해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절들이 곳곳에 있었다. 이중 망해사, 영축사, 혁목암 그리고 취선사는 <삼국유사>에 등장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러 절 가운데 근래에 지어진 망해사, 문수사, 청송사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터만 남아있다. 영축사는 터라도 남아있지만 혁목사는 위치를 알 수 없고, 취선사는 인근 대암댐의 건설로 물에 잠겨버렸다.
비록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삼국유사>에 자취를 남기고 있는 절들의 흔적을 더듬으며 문수산을 오르다 보면 등산의 피곤함도 잊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