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와 수은 최제우 대신사가 수도했다고 알려진 천성산 적멸굴을 찾아 산행길에 나섰다. 내원사 매표소에서 내원사 방향으로 들어서 첫 굽이 길 주차 자리에 차를 대고 오던 길로 잠깐 내려가면 거기가 바로 중앙능선 들머리다. 좁다랗게 난 나무 계단을 따라 경사를 오르면 주능선과 만난다. 능선에 오르면 왼편으로 공룡능선이 꿈틀대고 내처 조금 더 가면 상리천계곡 위 금봉암과 성불암, 정족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능선 오른편으로는 까마득히 천성산1봉과 화엄벌이 얼굴을 내밀고,멀리 영축산과 신불산도 호기롭게 펼쳐진다.


중앙능선에 올라 처음 만나는 119구조목 2-2부터 능선길 따라 차례로 구조목들을 지나치면 2-12 구조목에 이른다. 적멸굴 가는 길이라는 아무 표시도 없지만 여기서 오른편으로 내려가야 적멸굴이다. 희미하게 난 산행 길을 따라 급한 경사를 80여 미터쯤 내려가면 이 길이 맞나 싶을 즈음 생뚱맞은 대숲이 나타난다. 해발 오백 미터가 넘는 이 산중에 조릿대도 아니고 대나무 숲이라니. 참나무 숲에 누가 일부러 대나무를 심어놓았나 생각하며 대숲 사이 오솔길을 지나면 ‘옛 원효대사 수도처 입구’라는 오석 표시석이 보이고 그 뒤로 사람 키를 훌쩍 넘는 바위동굴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이곳이 바로 적멸굴이다. 굴 안에는 적멸수라고도 불리는 석간수가 고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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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수행했던 원효는 661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가던 중 어느 무덤 안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 원효와 의상은 거친 비바람을 만나 어느 땅막에서 자게 됐는데 이튿날 아침 그곳이 옛 무덤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비가 그치지 않아 하룻밤을 더 뜬눈으로 지새우게 되는데 그때 원효는 마음 밖에 법과 진리가 없음을 깨닫고 당나라에 가지 않고 신라로 되돌아왔다. “어젯밤 잠자리는 땅막이라 편안했는데, 오늘밤은 귀신의 집에 의탁하니 매우 뒤숭숭하구나. 알겠도다!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므로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삼계는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 밖에 현상이 없는데 어디서 따로 구하겠는가?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 신라로 돌아온 원효는 마음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치열한 수행과 자신의 깨달음을 벼리는 글쓰기에 전념한다. 적멸굴은 이 시기 원효의 수행 터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요석공주와 사이에 아들 설총을 낳은 뒤로 승복을 벗은 원효는 소성거사라는 이름으로 저잣거리에 나가 무애행을 행한다. 원효의 깨달음은 한마음(일심)과 어울림(화쟁), 걸림 없음(무애)으로 표현된다. 66세에 글쓰기를 그만두고 궁을 떠나 굴로 들어간 원효는 686년 나이 70에 어느 굴에서 조용히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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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년 전인 1857년 여름 경주 최복술(수은 최제우)은 이곳 적멸굴에서 49일 동안 기도를 했다. 최복술은 이태 뒤 고향 경주 용담정으로 돌아가 우매한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뜻으로 이름을 제우(濟愚)라 고치고 수도에 전념해 1860년 마침내 도를 얻는다. 그의 나이 서른일곱이었다. ‘한울님을 내 안에 모신다’는 최제우의 시천주(侍天主) 사상은 ‘사람을 하늘처럼 섬긴다’는 해월 최시형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사상으로, 나아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의암 손병희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으로 이어진다.


적멸굴에서 하산 길로 내려오면 내원사 제2 주차장 이백여 미터 아래쪽 계곡과 만난다. 계곡에 잠시 발을 담그고 중앙능선 들머리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금강암을 끼고 있는 길가 바위에 1910년 내원사에서 49일 기도를 마치고 적멸굴을 방문했던 의암 손병희 일행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바위 오른쪽부터 ‘박명선, 윤구영, 손병희, 임명수, 최준모, 김상규, 조기간, 포덕 51년 1월일’이라고 쓰여 있다. 손병희 일행은 통도사 바위에도 같은 이름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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