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2


우리 조상들은 삶의 터전에 있는 높은 산을 숭배하는 산신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신앙이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교적인 것으로 점차 변해가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곳이 경주 남산이다. 옛날 경주 사람들은 남산과 그곳에 있는 바위들을 숭배했다. 그후 신라에 불교가 전래되자 이 산은 불교의 성지가 되어 바위에 불상 조각이 새겨지고 절과 탑이 건립되었다.


울산에서는 문수산이 아주 먼 옛날부터 산악숭배의 대상이었다. 오랫동안 울산 사람들의 산악숭배 대상이었던 문수산도 불교가 전래된 다음에는 문수신앙의 본고장이 되었다. 이는 신라인들의 오랜 산악숭배사상이 7세기경 문수신앙과 결합하여 이 산을 문수보살이 사는 곳(문수주처 文殊住處)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문수신앙을 신라에 도입한 이는 통도사를 창건한 자장율사다. 그는 일찍이 중국의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상에 기도하여 감응을 얻었다고 한다.


영축산 즉, 문수산과 관련된 다음 설화를 보도록 하자.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강의하고 신통력을 가진 낭지스님이 있었는데, 그는 수시로 구름을 타고 중국 청량산에 가서 강의를 듣고 오곤 하였다. 어느 날 청량산 절에서 강의를 듣는 여러 스님들에게 각기 자신이 사는 곳의 이름난 꽃과 진귀한 식물을 가져오게 하였다. 낭지 스님은 이튿날 산속에서 기이한 나무 한 가지를 꺾어다 바쳤다.
이에 그곳 승려들이 ‘이 나무는 범어로는 달제가(?提伽)이고, 여기서는 혁(赫)이라 부르는데, 일찍이 인도와 해동의 두 영취산에만 있다’고 하였다. 또 이 두 산은 모두 제10법운지(第十法雲地)로서 보살이 사는 곳이니 이 사람은 반드시 성스러운 사람일 것이다.’ 하며 낭지대사를 영취산에 사는 성자로 다시 보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낭지의 명성이 커졌고, 그가 수행하던 암자를 혁목암이라고 하였다. 스님은 이 암자 자리는 가섭불 때의 절터라 하였고, 땅을 파서 등잔 두 개를 얻었다고 말하였다.
                                                                <삼국유사> 제5권 피은 제8 낭지승운 보현수
 

역사기행1


그가 있는 산이 영축산인 데다 꺾어간 나무가 인도와 신라의 두 영축산에만 있다는 점, 그리고 혁목암 자리가 석가모니 이전의 부처인 가섭불 당시의 절터라는 점 등에서 분명 신라의 불국토사상을 찾아볼 수 있다. 인도와 신라를 대등하게 연결하면서 신라가 본래 불교와 인연이 깊은 곳이라 강조하여 불교국가로서의 신라에 대한 자긍심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상징으로 중생의 무지를 깨우쳐 주는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울산을 찾아 내려오게 된다. 문수산에 살고 있는 문수보살을 만나 나라를 구할 방법을 물어 보기 위해서였다. 왕이 태화사를 참배한 다음 지금의 삼호 다리가 있는 태화강을 건너자 한 동자스님이 나타나 문수보살 있는 곳을 안내하겠다고 하여 그를 따라갔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동자승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마침내 자취를 감추고 마는 것이 아닌가. 마침내 왕은 신라의 국운이 다했음을 깨닫고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내고장의 전설>, 울산시, 1982


이런 전설에 따라 문수보살이 살았던 산을 ‘문수산’, 왕이 동자 스님을 세 번 불렀던 곳을 ‘삼호(三呼)’, 동자승이 사라진 곳을 ‘무거(無去)’, 경순왕이 “허허!” 하며 탄식하고 넘은 고개를 ‘허고개’라 부르게 되었다.
이 같은 이야기를 통해 울산이 신라와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었음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문수산이 신라 불교 가운데 문수신앙의 중심에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