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영축사지전경

<영축사지 전경 ⓒ울산박물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문수산은 영축산이라 불렸으며, 이 산에 있었던 대표적인 절도 영축사였다.

문수산으로 오르는 수많은 등산로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길이 율리 영축마을을 통과하는 코스다. 7번 국도에서 청량농협을 지나 문수산 등산로 입구에 있는 영축마을은 영축사에서 비롯되었다.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린 영축사 창건에 대하여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다.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 3(683)에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장산국(萇山國)의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금성(경주)으로 돌아오다가 굴정역(屈井驛) 동지야(桐旨野)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어떤 사람이 매를 풀어 꿩 사냥을 하고 있는데, 매가 꿩을 쫓다가 나무 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사냥꾼이 가서 보니 쫓긴 꿩이 굴정현 현청(縣廳) 우물 안에 있었는데, 우물물이 온통 핏빛이었다. 우물 속 꿩은 두 날개를 벌려 새끼 두 마리를 보호하고 있었는데, 이 모습을 보고 매도 차마 꿩을 낚아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습을 본 충원공이 감동하여 절을 세울 만한 곳이라 여겼다. 금성으로 돌아온 공이 왕에게 이 사실을 아뢴 다음 그 현의 관청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고 그 자리에 절을 짓고는 영축사(靈鷲寺)라 하였다.” [삼국유사 제3권 탑상 제4(三國遺事卷第三塔像第四)]


이상의 내용으로 보아 이 절이 창건된 시기는 삼국 통일 직후인 통일신라시대 초기였음을 알 수 있겠다.

절이 창건되고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이 절에서 수행하던 연회(緣會) 스님의 명성이 온 나라에 널리 알려졌다. 소문을 들은 38대 원성왕은 이 스님을 국사(國師)로 모시고자 하였다. 그러나 벼슬에 뜻이 없었던 스님은 절을 떠나 방랑길에 올랐다. 그가 서쪽 고개 바위 사이를 넘다가 밭을 가는 한 노인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스님은 벼슬이 싫어 방랑길에 나섰다고 말하자 노인은 벼슬길에 나갈 것을 권했다.


다시 길을 가던 스님은 시냇가에서 한 노파를 만났는데, 그 노파도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연회는 조금 전 노인에게 했던 것과 같은 말을 해 주었다. 그러자 노파는 조금 전에 만났던 노인이 바로 문수보살이라고 하였다. 이에 스님은 크게 놀라 처음 만났던 노인, 즉 문수보살을 다시 찾아가 그분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연회스님이 암자로 돌아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의 사자가 찾아왔다. 스님은 왕명을 받들어 대궐로 들어가니 왕은 그를 국사로 봉하였다.


연회스님을 국사로 나가도록 설득한 첫 번째 노인은 문수보살, 두 번째 노파는 변재천녀였던 것이다. 그리고 연회 법사가 노인으로 변신한 문수보살로부터 감응 받은 곳을 문수점(文殊岾), 노파로 변신한 변재천녀(辯才天女)를 만났던 곳을 아니점(阿尼岾)이라 하였다.” [삼국유사 제5권 피은 제8(三國遺事卷第五避隱第八)]


이렇게 국사까지 배출했던 영축사의 폐사 시기나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영축사는 그동안 폐사된 채 논밭에 둘러 싸여 그 존재조차 희미해진 채로 방치돼 있다가 2012년부터 5년 간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절은 산을 깎아 평탄하게 토목공사를 하여 부지를 닦은 다음 여러 건물들이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절의 구성은 금당--석등-중문의 기본 가람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금당을 중심으로 좌우로 쌍탑이 위치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가람 배치(이탑일금당)였음이 확인되었다출토 유물로는 비석편, 금동불상, 고려 전기 청동유물,  기와조각 등이 수습되었다


김문술 전 울산역사교사모임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