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포기했습니다.” 1학기 기말 시험을 마친 다음날 내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한 말이다. 보통은 아쉬운 마음을 표현하거나 자기 반성하는 말을 하는데 너무 센 말이라 몇 가지 질문을 해보았다.
“왜?”
“진짜 열심히 공부했는데 등급이 너무 안 나왔어요. 그래서 공부 포기하려구요.”
“그렇구나. 그런데 정확히 말해볼래, 등급을 포기한다는 뜻이니, 공부를 포기한다는 뜻이니? 등급을 포기하면 공부할 필요가 없을까?”


그러자 한 학생이 자신은 결과에 신경 쓰지 않으니 공부가 더 잘 된다는 말을 했다. 공부를 포기한 학생에게 등급을 포기하는 것인지, 공부를 포기하는 것인지 다시 물어보았다. 처음보다 표정이 밝아진 채로 등급에 신경 쓰지 않고 공부해봐야겠다고 말했다. 우리 학생들의 공부 목적은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그 자체가 아니라 남과 비교해서 나오는 수치인 등급이다.


한국사 성적은 좋지 않지만 한국사를 좋아하고 열심히 하는 것이 안 된다면 이상한 교육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문계고의 인문반 3학년 학생들 중에서 수학을 포기한 학생이 80~90%라고 한다. 이 많은 학생들이 원래 수학을 싫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수학을 흥미롭게 공부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비슷한 대화가 우리 집에도 있었다. 방학 선언식을 마치고 돌아온 작은 아이에게 내가 물었다.


“뭐 잊은 거 없니?”
“어, 성적표? 여기 있어요.”
“중학교에 비해 성적이 많이 떨어졌네. 노력하는 것 같더니 왜 이런 결과가 나왔니?”
“아빠, 아빠는 왜 내 성적에 불만족해요? 전 최선을 다했어요. 그래서 제 성적에 만족해요.”
난 쇼파에 반쯤 누어있던 자세를 바로 했다. 왜냐하면 애가 옳고 나는 틀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수학이 그 중에서 많이 떨어지는구나. 거의 매일 수학만 하더니. 공부 방법을 바꿔서 다른 과목 먼저하고 수학을 맨 뒤에 하는 게 어때? 그렇게 매일 수학만 하면 지겹고 효율도 오르지 않잖아?”
“아빠, 전 수학 성적이 좋지 않을 뿐이지 수학 공부하는 것 좋아해요.”


또 한대 맞은 것이다. 나는 성적으로 아이의 노력 정도를 판단하고 성적으로 수학에 대한 흥미도를 판단했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 기성세대는 학생의 노력과 수준을 성적으로 평가하는 데 매우 익숙하다. 그것도 노력해도 남들이 더 노력하면 성적이 낮게 나오고, 노력하지 않아도 남들이 놀면 높게 나오고, 노력과 관계없이 운이 좋고 나쁘냐에 따라 높게 나오기도 하고 낮게 나오기도 하는 상대평가에 의존한다.


비교 평가보다 학생들의 흥미와 경험을 중심으로 공부하게 할 수는 없을까? 학생들 개개인의 성취와 노력을 있는 그대로 평가해줄 방법은 없을까? 이 두 질문을 던지고 나니 미국의 교육학자 존 듀이의 말이 떠오른다. “교육은 더 교육받는다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을 지니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끊임없이 학생들을 비교평가하면서 줄을 세우는 이유는 경쟁을 시키면 노력을 더 많이 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쟁으로 인해 학생들은 미래 사회에 필요한 지식을 더 많이 갖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쟁은 흥미를 불러오고 노력을 더 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미래 사회가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은 알 수 없다. 게다가 학생 개개인의 상황과 생각이 어떻게 변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은 학생들 스스로에게 자신과 주변을 통제할 권한을 주는 것이다. 권한을 준다는 말은 그들이 문제 상황에서 주체적으로, 때로는 협력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2021학년도 대입 수능을 상대평가(4과목 절대평가)로 해야 하는가, 절대평가로 해야 하는가가 우리 사회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이 논의에 앞서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무엇 때문에 평가하는가? 그리고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호중 매곡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