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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령 초입에서 바라본 문복산의 여유로운 능선.>


올여름은 마른 장마가 유독 심했다. 폭염이 길었다. 일기예보와 달리 비는 오지 않고 소나기만 잠시 내렸다. 영남알프스 계곡물로 한 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시름에 잠겨 목마른 여름을 보냈다. 계곡물은 개울처럼 졸졸 흐를 뿐이다. 유독 신불산 바람신도 어디 갔는지 바람도 불지 않는 여름밤이 깊어가더니, 어느덧 입추도 말복도 지났다. 이제 가을비가 오고 있다.


여름 한 철 동네인 세물머리 마을은 고요하다


가슬갑사(嘉瑟岬寺) 터는 문복산 자락 계살피 계곡 근처에 숨어있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아름다운 거문고 소리가 들리는 계곡에 있는 절이다. 언양 버스터미널에서 경산 가는 9시 버스를 탔다. 운문령을 넘어 생금비리를 지나간다. 운문령 터널 공사가 한창이다. 천문사와 가슬갑사 표석이 있는 삼계리 마을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자가용 주차할 곳은 여의치 않다. 삼계리 마을은 운문령에서 흘러드는 생금비리천과 배너미재의 배너미 계곡, 계살피 계곡의 세 물길이 만나는 세물머리 마을이다. 세물머리 마을이라 여름철이면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올해는 가뭄으로 겨울같이 한산하다. 대부분 개점휴업 상태이다.


가슬갑사 터를 찾기 위해 계살피 계곡을 따라 올랐다. 계곡은 영남알프스 최북단에 자리한 문복산의 서쪽 자락에 깃들어 있다. 문복산(文福山 1014.7미터)은 옛날에 문복이라는 노인이 이 산에 들어와 한평생 도를 닦고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과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천 미터 영남 알프스 산 중에서 막내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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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계리마을 입구의 문복산 등산 안내도. 가슬갑사 터 위치가 틀리다.>


계살피 계곡 길은 홀로 걷는 호젓한 길이다. 등산길은 새로 정비되었다. 계곡과 나란히 있었던 골짝 길은 감춰졌다. 그래도 물소리는 정겹다. 가뭄 탓인지 소리는 노인의 오줌발처럼 자주 끊긴다. 아마 예전 같았다면 변강쇠 소리처럼 풍부한 성량을 자랑했을 것이다. 곳곳의 담과 소는 충분한 휴식처로 신선놀음에 제격이다. 하지만 하루살이가 얼굴 앞에 얼쩡거려 손사래 치며 걷는 길이다. ‘계살피’라는 말은 ‘가슬갑사 옆의 계곡’이라는 경상도 방언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홀로 가슬갑사를 정비하는 김유신 장군의 후손


폭염이라 나무와 숲이 그늘을 주지만, 더운 것을 어쩔 수 없다. 길옆 두 번째 폭포에 잠시 발 담그고 쉬었다 길을 걷는다. 마을 등산 안내도의 이정표에 있는 가슬갑사 터는 나오지 않았다. 분명 계곡 방향인데 보이지 않는다. 삼계리 1코스와 2코스가 만나는 지점은 문복산 2.58킬로미터 지점이다. 위쪽에서 돌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하고 올라가니 대밭 앞에 ‘가슬갑사유적지’라는 돌비가 서 있다. 돌을 옮겨 길을 만드는 50대 중반의 남자가 있었다. 김유신 장군의 후손으로 명리학을 공부하다가 장군이 꿈에 나타나 계시를 줘서 이곳에 왔단다. 김 씨는 충청도에 있는 사업을 접고 내려 온 지 1년이 넘었다고 한다. 작은 움막집을 집고 생활하며 가슬갑사 터를 정비하고 있다. 앞으로 3~4년 작업을 할 예정이라 한다. 길을 만들고 위쪽 절터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피라미드형 탑을 쌓아 정상부에는 맷돌을 올려놓았다. 절터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그릇 파편들을 모았다. 조선 초기 인화문 분청그릇 파편도 보인다. 반듯한 돌로 바닥을 깐 터도 있다. 50~60여 미터 떨어진 주변에 그런 공간이 아홉 개 정도 있다고 한다. 그는 이 지역을 당시 화랑 우두머리의 수련 터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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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이지만 폭포의 소는 산행객의 더위를 식혀준다.>


앞으로 수련 움막을 복원하고 명상 터를 제공할 예정이라 한다. 절터는 지금 탑을 세운 곳으로 찬 기운이 느껴진다고 한다. 하산할 때 아주머니 한 분이 손에 망치와 낫을 들고 오기에 물으니, 대구에 살며 동생에게 필요한 물품을 조달해준다고 한다. 참 대단한 남매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가슬갑사는 세속오계의 현장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가슬갑사는 지금 운문사 동쪽 9천 보 가량의 가서현 혹은 가슬현의 북쪽 골짜기에 있었다고 한다. 가슬갑사는 후삼국시대에 폐사되었으며 사찰에 있던 기둥들을 대작갑사(현 운문사)로 옮겼다. 가슬갑사의 폐사는 인위적이고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이후 어떤 기록도 없는 것으로 보아 지리적 정치적 종교적으로 더 가치를 지니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아무튼, 가슬갑사를 비롯한 주변의 오갑사는 기도 도량이자 화랑의 군사훈련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가슬갑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울주군 <상북면지>는 가슬현을 운문령으로 보고 있으나 20세기의 기록이라 신빙성이 적다. 오히려 배너미재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 계살피계곡 돌비 있는 대숲보다는 삼계리 마을이나 현재의 천문사나 가슬갑사 자리가 신빙성이 높다. 즉 생금비리천을 경계로 하여 배너미천쪽이나 배너미천 양쪽 중 하나일 가능성이 더 높다. 왜냐하면, 오갑사 대부분이 하천을 낀 해발 280미터 이내의 평탄한 대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곳이든 천 년 전의 흔적이 남아있을 가능성은 적다. 다만 추측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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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살피 계곡의 가슬갑사 터.>


영남알프스에서 화랑과 가장 인연이 깊은 곳은 원광법사가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를 준 청도의 가슬갑사일 것이다. 하지만 가장 흔적이 많은 곳은 울산의 천전리 각석이다. 각석에는 영랑(永郞), 수품(水品), 흠순(欽純), 호세(好世) 등 문헌에 나오는 역사적 화랑 이름과 저봉랑(渚峯郞), 산랑(山郞), 김자랑(金仔郞), 부사랑(夫帥郞), 충양랑(沖陽郞), 법민랑(法民郞), 성림랑(聖林郞), 법혜랑(法惠郞), 칠릉랑(柒陵郞), 수랑(隨良) 등 많은 화랑 혹은 낭도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로 보아 영남알프스 일대가 명산대천을 찾아 호연지기를 기르던 화랑들의 수련장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화랑은 꽃미남, 구설수는 당연하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미남자를 뽑아 그들을 단장하고 꾸며서 이름을 화랑이라 하니, 그 무리가 날로 많아졌다. 혹은 도의로 서로 연마하기도 하고,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기기도 하고, 산수를 찾아 즐겁게 노닐기도 하여, 먼 곳이라 하더라도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세월이 오래되는 동안에 사특함과 정직함이 자연히 나타나게 되자 그 명예와 덕망이 많은 자를 택하여 등용하였으니, 이것이 신라에서 사람을 뽑던 법이다.”라고 하였다. 화랑과 그를 따르는 낭도의 무리는 다양한 출신과 신분, 계급을 망라한 청소년 조직으로 볼 수 있다. 다양한 신분의 결속력은 국가의 단결력을 고무시켜 화랑 조직이 신라의 삼국 통일에 중심적 역할을 하도록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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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위 모습이 튀어 나와 붙어있는 것처럼 보이며, 그 모습이 산에 붙어 드리워져 있는 드린(두름, 코끼리) 바위.>


화랑은 한자 그대로 번역하면 ‘꽃남’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아름다운 용모’와 ‘분을 바르고 곱게 꾸민다’라는 말이 등장한다. 과거의 남색, 동성애는 우정의 또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 이들 사이의 우정은 때론 변질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성호 이익도 화랑의 남색, 동성애 풍습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통일신라 이후 태평성대에 화랑(낭도)의 우정은 동성애적 질투로 변질될 수 있었다. 결국, 문란함이 발생하여 폐지된 것으로 상상된다. 물론 군사조직으로 반란이나 귀족의 사병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15세 전후의 청소년 화랑은 산천을 주유하며 수련한 것은 분명하다. 지금 청소년들은 방학임에도 학원에 다닌다. 놀며 배우는 방학은 아닌가 보다. 경쟁만 있고 죽음을 함께 할 우정을 쌓을 기회는 줄어들고 있다. 익히 아는 <논어> 한 구절이 떠오른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배우고 때에 맞게 익히면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뜻을 같이하는 동무가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때는 있는 것 같은데, 동무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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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바위 하산길에서 바라본 천문사 및 삼계리 마을. 이 지역이 가슬갑사 터일 가능성이 높다. 긴 골이 배너미재이다.>


무기는 상서롭지 못하다


김 장군 후손의 말을 듣다가 기도처로 가니 거대한 암벽이 서 있다. 어떤 화랑이 이 암벽 위에 올라 산천을 굽어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솟았다. 아무런 장비도 없이 맨손과 트래킹 신발로 오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직벽이다. 하지만 바위는 길을 가지고 있었다. 바위 위에 오르니 멀리 삼계리 쌍두봉, 배너미재와 연이은 산들이 중첩되어 보인다. 바람도 시원하게 부니 자연스레 배낭을 베개 삼아 눕게 된다. 내려갈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바위에 올라온 화랑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북미 간에 말 전쟁이 심하다. 산하는 평화롭다. 평화는 이익을 버릴 때 진정 얻을 수 있다. 사람이 한울님(인내천)이시다. 전쟁은 한울님에게 상처를 입히고 한울님의 생명을 끊는 행위다. 이런 전쟁은 어떠한 명분이라도 정당화하기 힘들다. 어른들의 싸움에 어린 한울님이 다치는 일은 막아야 한다. 노자는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것이니. 군자가 사용할 물건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정치인이 사람을 한울님같이 여기고 군자 되기를 바라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우리는 전쟁이 민족의 얼굴에 새긴 증오를 참담하게 기억하고 있다. 전쟁을 절대 반대한다. 전쟁은 살인과 파괴를 즐기는 악마의 유희, 무기도매업자들의 상술 결과이다. 악마의 주술에 벗어나야 민족의 고통은 사라진다. 지구촌 유일한 냉전 지역이 비무장 평화지대가 되는 그 날까지 전쟁 살인광 악마를 퇴치해야 한다.


산은 여전히 평화롭다


운문령에서 문복산으로 가는 길은 오솔길이다. 오르막길은 두 곳 정도다. 길 중간마다 멋진 소나무와 의자가 있어 산행객을 편하게 한다. 문복산 정상 직전 소나무에 올라 바라본 드린(코끼리) 바위는 보기에도 좋았다. 마치 간월산 자락의 천질바위 같았다. 문복산 정상에서는 동쪽으로 고헌산과 백운산, 남쪽으로는 가지산과 운문산, 서쪽 발 아래는 수리덤 계곡과 심원계곡이, 북쪽으로는 서담골봉과 조래봉이 보인다. 문복산 전망 좋은 마당바위는 수십 명이 앉을 정도로 넓다. 마당바위 쪽 하산길 중간 송진 채취 자국이 선명한 소나무가 몇 보인다. 내리막길이지만 산불로 인한 고사목 군락에서 길이 끊겨 마지막이 힘들다. 알바하는 일도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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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에 바닥을 드러낸 계살피 계곡>


문복산 정상에서 계살피 계곡을 따라 내려온다. 옛길 따라 걷다가 숨겨진 듯 있는 폭포를 만났다. 폭포의 물줄기는 힘없지만, 소의 물은 풍부하다. 사람이 없어 여유롭게 알탕을 했다. 마을에 내려오니 여전히 인적이 드물다. 오갑사를 복원한 천문사와 가슬갑사를 방문했다. 박정희 육영수 영정을 모신 탓인지 천문사는 너무 거대하다. 원래 천문사 터는 이곳이 아니다. 오히려 가슬갑사터를 차지하고 있다. 그에 비해 현재의 가슬갑사는 지나치게 옹색하다. 마을 근처 계곡물에 노는 아이들의 소리 평화롭다. 삼계리 마을에서 언양 가는 버스는 2시 30분과 5시 30분에 있다.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