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미꾸리꽝이 군락


길고 뜨거운 여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유난히 긴 가뭄이었습니다. 산골짝 계곡도 말라 물이 흐르지 않았습니다. 휴가철 계곡을 찾는 사람들도 확연히 줄었습니다. 서너 달 지속된 가뭄인지라 비가 와도 표면만 적시기 일쑤였습니다. 산지습지인 화엄늪도 상부는 완전히 말랐습니다. 이런 시련을 자연은 어떻게 견딜까요?


16-1 화엄늪 왕미꾸리꽝이 군락과 억새

< 화엄늪 왕미꾸리꽝이 군락>


얼마 전 화엄늪의 상태를 점거하려 늪지대를 들어간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질퍽하게 젖은 곳에서 자라는 왕미꾸리꽝이 군락이 예전과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이삭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이곳 왕미꾸리꽝이는 2미터 이상 자라는 습지 초본입니다. 제 키보다 훨씬 크지요. 하지만 올해는 키가 제 가슴 높이밖에 자라지 않았습니다. 절반밖에 자라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왕미꾸리꽝이 군락 가운데 묻혀 있던 참억새가 위로 훌쩍 솟아 자라고 있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키가 제 허리 정도밖에 자라지 않는 참억새가 왕미꾸리꽝이 군락에 묻혀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물 빠짐이 좋은 토양에 적응하는 참억새에게는 가뭄이 치명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가물었던 습지부에서 호기를 잡았던 것입니다.


키가 참억새보다 작아진 왕미꾸리꽝이 군락을 보니 새삼 참고 견디며 가뭄을 견뎠던 왕미꾸리꽝이들의 인내가 느껴졌습니다. 서로 기대어 수분을 나누며 가난하지만 고르게 자란 모습에 또 다른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우리들은 그렇게 살 수 없을까요? 풍요로울 때는 고르게 풍요롭고 가난할 때는 고르게 가난할 수 없을까요? 우리는 전통적으로 백성을 민초(民草)라 불렀습니다. 민초라는 말에는 평등과 주권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민초 자체가 공동체를 대변합니다. 그것은 풀이 가진 속성에서 비롯됩니다. 풀들은 평등하게 자라며 뿌리를 서로에게 뻗어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고 양분을 교환합니다. 더불어 줄기와 잎들도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힘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하나는 연약할 풀일지라도 집단의 힘으로 강풍을 견디고 다른 종의 침입을 거뜬히 막아냅니다. 그런 풀과 백성은 유사하다고 하겠지요. 사실 그렇습니다. 사람을 나타내는 한자어 인간(人間)도 사회적(공동체적) 관계를 전제로 한 말입니다. 이렇게 인간에게는 관계의 방식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주권과 평등이야말로 국가의 건강성을 재는 척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 문재인 정부는 집값 안정을 중심으로 하는 부동산 정책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몇 채의 집을 소유하고 주택을 투기의 수단으로 활용해 우리 사회는 부익부 빈익빈 빈부격차가 가파르게 높아가고 있었습니다. 평등이 사라진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불가능합니다. 열심히 일해 피땀이 스민 돈을 월세 전세로 바치는 삶을 어찌 노예적 삶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노예적 삶을 사는 사람을 어찌 민주주의의 시민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풀들을 보십시오. 풀들이 점유한 면적은 각자가 대단히 좁습니다. 하지만 그 좁은 면적에서 풀들은 얼마나 강하고 멋지게 어울려 살아갑니까. 여러분은 휘트먼의 ‘풀잎’이라는 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건강한 풀잎들에서 시작합니다. 김수영의 ‘풀’이라는 시도 그렇습니다.


공동체적 존재인 인간이야말로 풀들의 전략에서 사회의 운영원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들 각자가 이미 풀이기 때문입니다.


물오리나무와 잎벌레


16-2 봄철 물오리나무 나뭇잎

<봄철 물오리나무 나뭇잎>


가뭄이라는 시련을 견디는 왕미꾸리꽝이 군락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이번엔 물오리나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저는 물오리나무를 좋아합니다. 봄이 되어 막 피어난 연둣빛 물오리나무의 이파리는 참 귀엽습니다. 둥글지만 불규칙적인 잎 가장자리의 물결무늬가 멋지게 느껴집니다. 언젠가 물오리나무 줄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맛봤더니 달큼하니 먹을 만했습니다.


물오리나무는 사방오리나무와 함께 과거 산지 사방용으로 심곤 했습니다. 천성산 서쪽 임도변에도 그렇게 심겨진 물오리나무 숲이 있습니다. 그렇게 자라 훤칠한 물오리나무 숲을 걸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16-3 오리나무잎벌레 성충

<오리나무잎벌레 성충>


16-3-1 오리나무잎벌레애벌레가 먹은 흔적

<오리나무잎벌레 애벌레에게 먹힌 흔적>


하지만 작년과 올해 물오리나무 잎이 전멸하다시피 벌레에 먹히는 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희한할 정도로 물오리나무만 공격을 당하고, 주변의 참나무나 뽕나무는 말짱합니다. 오리나무잎벌레 소행입니다. 오리나무잎벌레는 오리나무를 주된 먹이식물로 삼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바로 이 오리나무잎벌레 애벌레가 두 해 연속 대발생한 것입니다. 잎이 돋을 무렵 성충이 잎 뒷면에 알을 낳으면 5~7월 애벌레들이 나무를 오르며 잎살만 갉아 먹습니다. 그러면 나뭇잎은 그물처럼 마른 갈색 잎맥만 남아 떨어집니다. 7월초 물오리나무숲은 이미 겨울 숲같이 을씨년스럽습니다. 앙상한 가지와 누렇게 잎맥만 남은 낙엽들이 수북합니다.


그게 끝이 아닙니다. 그렇게 한바탕 애벌레들의 만찬이 지나고 난 뒤 물오리나무들은 다시 힘을 내어 새 잎을 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물오리나무의 새잎이 자랄 무렵 이번엔 성충이 된 오리나무잎벌레들이 새잎을 갉아먹습니다. 성충은 어린잎의 잎맥까지 모두 갉아 먹습니다. 그렇게 살찐 성충들이 낙엽에 숨어 겨울을 난 뒤 이듬해 봄에 알을 낳는 것입니다. 물오리나무들은 어떻게 될까요? 8월 중순 비가 몇 차례 온 뒤 물오리나무들은 다시 힘을 내어 일제히 자라고 있습니다. 마치 새봄처럼.


16-4 7월 물오리나무숲

< 7월 물오리나무 숲>


16-4-1 8월 물오리나무숲

< 8월 물오리나무 숲>


2년 연속 이런 일을 당하며 물오리나무가 살 수 있다는 게 너무나 신기합니다. 저는 아직 모릅니다. 오리나무잎벌레를 잡아먹는 천적이 언제 나타날지. 지금으로선 오리나무잎벌레가 승리하고 있지만, 물오리나무들의 고투 또한 눈부십니다. 물론 자연에는 수없이 많은 다차원적인 인과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아직 일방적인 오리나무잎벌레의 승리를 단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물오리나무 숲의 수난이 몇 년 지속하면 결국 물오리나무들은 주변의 나무들의 세력에 밀려 사라질 수도 있을 겁니다. 우선은 기다리며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물오리나무의 경우는 왕미꾸리꽝이의 군락과 달리 군락이 오히려 생존에 불리한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인위적으로 식재한 결과 물오리나무가 좁은 지역에 몰려 있음으로써 오리나무잎벌레의 대발생에 유리한 환경이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오리나무잎벌레의 천적이 나타나 생태평형을 이룰 수 있을까요? 아니면 쉼 없는 잎 내기로 오리나무잎벌레의 위협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물오리나무 숲을 보며 저는 군집의 장점과 더불어 단점도 발견하게 됩니다.


살충제 계란과 조류독감(AI)


16-5 공장식 양계장

<공장식 양계장 모습>


최근 살충제 계란의 충격으로 계란 먹는 것이 망설여집니다.
현대사회에는 농업도 산업이 되었지요.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하듯 규격에 맞는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농업은 물론 축산업도 공장식 축산이 도입되어 정착된 지 오래입니다. 때문에 양계농장도 몇 십만 마리의 닭을 좁은 우리에 넣어 키우는 것이 일반화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각종 질병(전염병) 발생 확률이 높아지고, 다시 이를 예방하고자 각종 살충제를 사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작년에만도 조류독감(AI)으로 3800만 마리의 닭이 살처분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살충제가 스며든 달걀 때문에 전 국민이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속담이 떠오릅니다. 수익을 위한 효율을 삶과 사회의 척도로 삼으면서 우리의 삶과 사회는 불안과 위험을 일상에서 겪고 있습니다. 공감은 어디로 가고, 양심과 도덕도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요?


동물은 식물과 달리 활동적입니다. 제게 필요한 것을 주체적으로 찾아 해결하는 것이 본능입니다. 그럼으로써 건강을 유지합니다. 그래서 전통 사회에서는 가축들도 최소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키웠습니다. 제가 어릴 때만해도 닭과 오리들이 마당과 집주변을 돌아다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저녁이면 흩어진 닭을 몰아 닭장에 넣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그런 닭들에게 지금 같은 전염병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어릴 때만해도 아토피, 비염,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 따위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들 질병은 지나치게 밀집되고 좁은 곳에서 사육되며 면역력이 떨어진 닭들에게 조류독감이 발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밀집되고 좁은 곳에서 석유화학적 환경에 노출되어 자라난 세대에 발생한 일종의 유행병입니다. 비록 옮는 것은 아니더라도 일반화된 질병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무기력과 허무도 일종의 이런 도시병일 겁니다.


이쯤 되면 사람을 포함한 동물에게 군집은 식물과 달리 보다 넓은 자율성을 요구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자율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군집의 기준과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 사람과 가축이 풀과 같은 대접을 받아서 쓰겠습니까? 사람도 닭도 한 곳에 뿌리박고 자라는 풀이 아닙니다. 더 많은 자유의 권한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주권이라고 말해봅시다.


사람에게 주권은 사회 안에서 사회가 보장하는 평등의 토대 위에서 자신의 자유의지를 발휘해 살아갈 권리를 의미합니다. 넓게는 주권은 자연권에 기반합니다. 가축은 어떨까요? 사람의 기준과는 달라도 동물로서 그들 또한 그들의 자유의지를 발휘해 살아갈 권리 즉 자연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식물은 어떨까요? 또 산과 강, 바위 같은 대상은 어떨까요? 논의 대상을 지나치게 확장하긴 했지만 자연의 존재도 모두 자연권을 부여받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자유가 필요한 것처럼 닭에게도 자유가 필요합니다. 물론 그 둘의 자유가 가진 양태는 다를 것입니다. 그래서 최소한의 자유 보장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효율만 생각한 인간의 사회와 가축의 사육은 생명 말살적인 착취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저는 살충제 계란과 조류독감에 대한 근본적 예방책으로 기존의 양계시스템을 폐기하고, 전통적 양계 방식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닭에게도 최소한의 자연적 환경과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줄 수 있는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에서 저는 민주주의의 전제로서 평등이 필요하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평등 위에서 비로소 자유가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겠습니다. 평등은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고 타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전제이자 균형점입니다. 시소가 좌우로 기우뚱거리며 반복할 수 있는 이유는 서로 양보하기 때문입니다. 일방적으로 내리눌러 주저앉으면 시소를 탈 수 없습니다. 대신 발을 스프링처럼 가볍게 굴러 상대방이 내려올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래야 상승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시소는 쿵덕쿵 쿵덕쿵 서로 도우며 노는 놀이입니다. 우리가 따라야할 사회의 원리도 이렇지 않을까요?


공감하고 도덕과 양심이 살아 있어야 양보하고 소통하게 됩니다. 부자가 되고 대기업이 되고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가난뱅이로 만들고 파산하게 하고 약소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 이기심으로서는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풀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서로 기대며 도울 때 어떤 외압도 이겨낼 수 있다고 풀은 말합니다. 나의 자유를 위해 너의 자유를 보장하라고.


심규한 화엄늪 환경감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