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석


80년대 신앙공동체이면서 지역의 사회공동체였던 형제교회


이종호 편집국장(이하 ‘이’)=80년대 형제교회 가게 된 얘기부터 해주세요.


박준석 전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이하 ‘박’)=고향은 울산은 범서 대신입니다. 척과 위에. 시내로 들어간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고요. 북정동 울산초등학교 뒤쪽으로. 학교생활은 재미가 없어서 만화방에 가서 시간 때우고. 중학교는 학성중학교. 고등학교는 학성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가 재미가 없어서, 사춘기가 늦게 오고 그런 것도 있고, 학교가 동네 입시학원처럼 변질된 데에 회의감도 들고, 학교생활에서 다양하게 생각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욕구가 충족이 안 돼 학교를 관뒀습니다. 읽고 싶은 책 읽으면서 공부하겠다. 대학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고. 79년 7월에 관둡니다. 한 학기만 하고. 놀았죠 뭐. 검정고시 준비도 하는 둥 마는 둥 책만 읽고... 일단 철학서적, 종교서적 많이 읽고, 불교, 소크라테스 등등...


그러면서도 검정고시를 준비한다 했다가 제대로 안 하고 놀다가 스무 살인가 스물한 살 때 대학 다니는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형제교회로 갑니다. 83년쯤. 형제교회가 처음 만들어진 건 82년도고.


최근 6월 29일 30년 만에 형제교회 멤버들이 20명 정도 모였습니다. 밴드도 만들었는데, 멤버들이 진영우, 윤운룡, 중전기 다니던 윤길열 집사, 백무산, 정인화 시인, 신명찬, 조승수, 이현숙, 강명숙, 정병문, 강미화, 강봉진, 송준기, 김정화, 오복필, 김외화, 유무조, 추용호, 이은정, 이현구, 최정구, 최학도, 성신아, 김연민 교수도 있었고, 동양나일론 다니던 이혜경, 진윤종, 추일천, 도금미... 명단 뽑아보니 40명 정도 됩니다.


담임 전도사는 김영수 전도사였고 나중에 목사안수 받고 준목이 됐죠. 그런데 일이 있어서 나가고, 두 번째 오신 분이 이영재 목사님, 지금은 전주에 계세요. 김영수 목사님은 돌아가셨고. 1주일에 한두 번 예배 보고 일반교회와 크게 다르진 않았어요.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예배 설교하는 건 같은데 설교 내용이 우리사회의 현실과 연결해 많이 했죠. 그리고 목사님만 설교하는 게 아니라 평신도 교회를 지향했고 다른 선배 교인들 중에서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세미나는 교인들 중심으로 학습하고 했죠. 기억나는 게 최종식 교수가 쓴 <서양경제사> 공부하고 어렵다는 거 밖에 기억 안 나요. 한문이 많이 있었어. 어렵게 읽었습니다.


김영수 전도사는 부산으로 84~5년 쯤 넘어갑니다. 이영재 목사는 한 2년 정도 있다가 마지막에 잠깐 김재철 목사가 오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울산의 기장(기독교장로회) 교회라고는 형제교회가 처음이었고 기독교장로회가 개신교중에서 진보적이라 울산의 뜻있는 분이 기장 교회를 하나 만들자고 해서 윤운룡 선배님이 다니시기도 했고, 부산 중부교회 최성묵 목사께 부탁해 목사 한 분 파견해달라고 했죠. 최성묵 목사는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에서 상당한 인물입니다. 중부교회를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이 많이 일어났죠. 형제교회는 부산노회를 통해 교회 설립인가까지 마쳤죠.


83년인가 형제교회 청년 수련회를 개천절 날 한다고 해서 따라 갔다가 1박2일 토론도 하고 촌극도 하고 밤새 해방춤도 추고 농민가도 부르고 놀았죠. 수련회 갔다 오고 나서 계속 교회를 다니게 됐고, 추수감사절 때나 행사를 하면 시 낭송이나 민중시를 읊고 그런 일을 했던 게 기억납니다.


백무산 시인을 비롯해서 시를 쓰는 분들이 많고, 문학하는 분들 많았고, 책 읽고 하는 거 좋아해서 저도 생전 해본 적 없던 민중시 낭송회에서 시 읽기도 하고요. 87년까지 교회에 제법 오래 있었죠. 이영재 목사 시무할 때 세례도 받고 했죠.


조승수 전 의원이 성남동에 신새벽 서점을 낸 게 86년쯤이고, 그 전에 신명찬 선배가 공업탑 울산여고 앞에서 4월서점이라고 헌 책방을 하셨죠. 울산에 사회과학 서점은 신새벽 서점이 처음이었습니다. 탈춤이나 씨를 뿌린 것도 교회 다니는 친구들, 대학 다니는 친구들, 주로 울산대 다니는 친구들이 탈춤을 하기도 했었고, 누군지는 몰라도 교회 다니는 친구 중에 탈춤 같이 하는 이들도 있었죠. 추수감사절이나 부활절 행사 때 문화행사를 같이 하고, 지역에 있는 분들 많이 초청해 문학의 밤 행사 같은 걸 하기도 하면서 청년 중심으로 지역 학생이나 울산대학생, 울산 출신으로 다른 데 대학 다니며 휴학하거나 지역에 다니러 온 친구들 만나서 같이 인사도 하고 초청했죠. 형제교회는 신앙공동체이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지역의 사회공동체 역할을 했습니다. 교회 중심으로 시민운동, 민중운동 많은 분들이 함께한 공간이 됐습니다.


교회 안에서 학습하고 토론하고 행사하고 한 것 이외에 전국 기청대회에도 갔습니다. 82년도에 청주에서 기독교장로회 청년대회, 기청대회를 합니다. 8월 15일 모여서 2박3일 동안. 첫째 날은 시국강연 위주로 하고 마당극 공연도 하고 토론도 하고 둘째 날은 가투(거리시위)를 해요. 기청대회를 제가 간 건 84년도 서울 수유리 한신대입니다. 목사님 강연 듣고 운동장에서 스크럼 짜고 가투 나가는데 정문에서 경찰이랑 몸싸움하고 최루탄, 지랄탄 뒤집어쓰고, 온몸에 뒤집어쓰니 콧물, 눈물 나고 한동안 숨도 못 쉰 기억이 납니다.


85년도에 광주 한빛교회에서 기청대회를 예장통합하고 같이 기청-장청 합동대회를 했어요.  대회는 따로 하고 가투는 같이 했는데 한빛교회가 광주 중심가여서 경찰하고 몸싸움하고 최루탄 맞고 그런 프로그램을 아예 짰더라고요. 강연도 하고.


공장 앞 유인물 뿌리다 구류, 단식


이=형제교회 멤버들도 중요한 축이 돼서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가 만들어진 게 86년입니다. 그때 분위기는 어땠나요?


박=광주 기청-장청 대회 할 때 저는 방위를 받을 때라 방위병 신분으로 시위하다 잡힐 뻔했는데 겨우 빠져나왔습니다. 85년 제대하자마자 대한화섬으로 들어가요. 태광이랑 같은 회산데 이름만 다른. 85년 말에 태광 들어갈 때 노조를 하겠다고 노동조합운동을 해보겠다고 들어갔는데 제가 일하던 데가 사람이 별로 없는 중합과라고 연료 투입하는 첫 공정인데 사람 둘이서만 일하는, 둘도 떨어져서 일하고. 태광에는 노조가 이미 있어서 입사할 때 노조에 도장 찍으러 가고, 근로자의 날, 노조 창립 기념일 챙기고, 대의원은 반장이 출마를 했는데 단독 입후보 찬반이라 선거운동도 안 하고, 노조 활동이 있는지 없는지도 잘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노조 창립 기념일 때나 근로자의 날에는 수건이나 카스테라 주면서 노동자의 날이라는 게 있구나 느끼고, 1년 내내 노조 활동 자체가 없었어요. 경험도 없고 노조 활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나름대로 방향, 인식이 없어서 진척이 없었는데 87년초에 진영우 선배와 이런저런 고민을 이야기하다가 공부해보라 그래서 태광을 퇴사하고, 울산 세 명, 대구 두 명, 한 다섯 명이 대구에서 학습모임을 해요. 현장활동가 중심으로 해서 한 3개월 이렇게. 3월, 4월, 5월 한 3개월 정도 대구에서 살면서 집을 얻어서. 대구에 있는 3공단 작은 자동차 부품업체 1개월 다니기도 하고.


그런데 얼마 안 있다가 4.13 호헌되고 학생시위가 쭉 있었는데 기억나는 게 학습팀이 등사기로 유인물 만들어서 현수막에 감아 대구 동성로에 있는 건물 4,5층 옥상에 밧줄에 매달아 담뱃대에 불을 붙여놓으면 줄이 끊어지면서 유인물이 확 퍼지는 그런 프로그램도 했습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구호로 집회 시위가 많았어요. 대구 시위대에 참여하다가 울산으로 내려와 5,6월 투쟁에 같이 했죠.


울산에서는 울산성당(현 복산성당) 중심으로 박종철 열사 추모집회도 하고 했는데, 저는 중간에 들어갔죠. 울사협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을 때 저는 중심에 있진 않았고 선배들 틈에서 연락받고 시위에 참여하는 정도였고, 우정지하도 옆에 버스정류장이 있는데 우정시장 쪽에 사람이 집결해 시장 골목안에 있다가 신호를 받으면 버스정류장으로 나와 강변도로로 따라가 울산교, 주리원백화점으로 진입하고, 성남동 가두시위하고 그랬죠.


유월 항쟁 때 형제교회 청년들은 울사협 통해서 유인물 뿌리고, 울산대 학생들하고도 연락해서 가투를 하고, 그때 유인물도 밤에 새벽 넘어서 하고 그랬어요. 밤에 주머니 주머니에 유인물 다 집어넣어서 일반 주택가에 문에 뿌렸습니다. 저는 태화로터리부터 공업탑까지 신정동 주택가를 맡았어요. 몇 시간쯤 걸리냐면 한두 시간 정도. 많은 양은 아니어서 몇 차례 정도 했어요. 두 명씩 조를 짰는데 실제로 배포는 같이 다니기 좀 그래서 편하니까 혼자 다니고. 연락 오면 시위하러 다니고.


학습은 끝났고 취업을 하려고 하는데 현대중공업 모집한다고 해서 그때가 7월인가 그랬어요. 그라인드공, 사상공이라고 하죠. 입사원서 받아서 1차 원서 10여 명 중에 두 명이 합격했습니다. 합격했는데 사상공은 모집이 끝났고 쇼트공 해볼 생각 없냐고 해서, 모르는 거지만 해보겠다고 해서 처음 쇼트하는 거 앞에 하는 거 보고 따라했는데, 붙잡고 하는데 힘들더라고요. 저는 붙잡는 것도 겨우 서 있었습니다. 에어로 녹 벗기는 작업인데 쇼트볼이라고 해서 쇠구슬을 뿜어내면 녹이 떨어지는 샌딩 머신과 같은 원리예요. 실내에서는 손으로 잡는 걸 씁니다. 두 명이 합격인데 저는 무경험자여서 시급 610원 받고 경험자는 시급 670원. 해성병원(현 울산대병원) 가서 신검도 받았는데 진영우 선배가 “니 그 체력으로 무슨 쇼트를 하겠냐. 못한다. 포기하고 다른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게 낫겠다”는 선배 말 듣고 저도 그렇게 생각해 포기했습니다.


진윤종이라고 나중에 현대중공업에서 퇴사하고 현대정공으로 온 친구인데 지금은 울산에 없지만 그 친구도 형제교회에 다닌 열성적인 친구였어요. 삼전관이라는 남목 숙소에 같이 자기도 하고, 그게 아마 8월 중순이었던 거 같은데 같이 자고 아침에 자전거 타고 출근하는 엄청난 사람들 무리지어 가는 거 보면서 충격적이고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친구랑 같이 중공업 시위하는 데도 들어갔습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종합운동장에서 집회하고 영빈관에 올라가서 구호도 외치고 했던 게 기억납니다.


7월말쯤에 울사협 노동상담소에서 노옥희 선생님을 처음 봤죠. 울산협에서 만든 16절 노동소식지를 모화에 있는 태화방직에 나눠주러 갔다가 경찰들에게 연행됩니다. 울산시내에서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태화방직 사람들은 신고를 했는지 경주 경찰서 모화 파출소로 잡혀갑니다. 유인물 나눠주는 게 무슨 잘못이냐 항의하고, 신분을 밝히라 하는데 안 밝힌다, 주민등록증도 없다하고 버티고 싸웠죠. 울사협에서 이상희, 박종희 선배가 와서 항의도 많이 하고 6.29 이후에 우리사회가 민주화됐는데 경주 경찰은 촌스럽게 왜 이러냐, 인수인계하라고 하고 훈방했죠.


용연에 있는 선경합섬에도 유인물 뿌리러 정병문, 금종섭 선배하고 같이 갔는데 그쪽 경비들이 신고했는지 울산남부서 형사들이 봉고 타고 와서 잡아간다고 해서 도로에 연좌했습니다. 끌려서 잡혀가고, 안 가겠다고 차에서 버티고, 신분을 못 밝힌다, 주민증을 아예 안 들고 갔어요. 신분증도 안 주고, 이름도 안 밝히고. 두 선배는 정보과 형사들이 이미 알고 있더라고요. 제가 계속 버티니까 뭔가 있는갑다 싶어서 억지로 지문을 찍으려고 핀셋으로 손톱을 집어서 제끼니까 손에서 피가 나잖아요. 지문을 찍어서 서울에서 확인해보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야. 왜 잡아 오냐, 민주화선언까지 했는데 유인물 뿌리는 게 뭔 잘못이라고 잡아가냐. 우리는 죄가 없다, 단식투쟁하자 단식하고. 유치장 5일 있다가 법원 즉결심판 받고 대용감방 가서 구류 5일 살고 나왔습니다. 남부서 대용감방 1층 5호방, 제일 중간 방인데 제일 별나게 설쳤으니까 특별관리한다고 거기 집어넣더라고요. 5일 동안 계속 단식하고. 5일 구류 살고 나오고, 몸이 안 좋으니까 복식하고 집에서 요양하고, 다시 8월에 시위 현장으로 갑니다.


조합원 교육, 분임토의 정말 열심히 했죠


이=현대정공엔 언제 입사했나요?


박=88년 1월 4일 현대정공 직업훈련원에 모집한다고 그래서 입사원서를 냈습니다. 처음에는 이론공부, 4월 1일부터 6월 1일까지 실습. 7월 1일 발령 나 일하게 됐죠. 87년 겨울에는 대통령 선거 때라 교회 선배들이 한쪽은 디제이 비판적 지지, 한쪽은 백기완 선본으로 갈려서 저는 공정선거 감시단 하겠다고 했죠. 예전에는 선거 포스터를 개인적으로 붙였는데 노태우는 골목부터 대로까지 수십 장씩 도배를 해놔요. 특히 신정지하도 쪽에 지하도 옆에다 해놔. 제가 매직을 들고 가 얼굴에 매직으로 살인마, 밤새 신정동을 휘젓고 다녔죠. 공정선거 감시단 조직하고 활동했죠.


현대정공 입사해서 매암동에 있던 알루미늄 컨테이너 공장에서 일했는데 인원 축소하고 염포동 2공장 스틸 콘테이너로 전출 발령낸다고 해서 ‘전출 조합원 대책위’ 활동부터 시작했습니다. 넘어와서는 88년 말인가 89년 초에 88년 대의원하던 친구들하고 조직을 만들어 ‘실천하는 노동자회’라는 소모임을 만들었습니다.


87년 투쟁을 현대정공이 제일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매암동 본관 건물이랑 염포동 본관 건물을 컴퓨터고 뭐고 유리창이고 다 부숴버리고, 염포동 중공업 가는 도로를 콘테이너로 막아버리니까 경찰들이 사내에 진입해서 127명을 연행해 구속되기도 하고, 이후에 현대정공에서 이들을 마북 연구소로 보내고 광주, 창원 등등으로 전국으로 흩어버렸죠. 박완호라고 해고자도 있었고, 그 해고자와 부당전출자에 대한 원상회복 투쟁을 조직적으로 하자고 해서 시작했죠.


89년도 대의원 선거에 조직적 대응을 합니다. 사철회라고 트레일러 샤시 쪽 부서에 활동에 관심 많은 사람들 조직인데 아직도 계중을 해요. 울산지역 임투지원본부에서 주최하는 89년 하계 노동자 수련회를 포항에 있는 경북대 임해수련원에서 노동자학교를 2박3일 했었어요. 백은종 선배랑 사철회 선배들을 거기서 만나 89년 대의원선거를 같이 하자고 해요. 그래서 대의원에 대거 당선됩니다. 대의원 66명인데 대의원 자체 모임을 제가 만들어 대의원 전체 자치회를 조직합니다. 강형수가 처음에 회장하다가 어렵다고 해서 중도사퇴하고 그다음에 제가 하게 되죠. 대의원 자치회를 조직해 집행부를 조직적으로 비판도 하고 견제도 하는 역할을 했죠. 그러면서 같이 했던 실노회, 사철회 동지들이 모여 90년 초에 ‘민주노동자회’를 만들었죠. 민주노동자회가 현장투 신덕수 동지 중심 그룹과 합쳐 집행부 선거하고 3대 집행부 선거에서 손봉현 위원장이 당선되죠.


선거 이전에 3월달에 제가 서울 미사리 조정경기장에서 대의원 수련회를 현대 집행부와 같이 갔다 와서 대의원자치회 회장을 맡아 며칠 있다가 해고 통보를 받아요. 대의원이 되면서 89년 한 해 동안 일곱 명이 산재로 사망해요. 수천 명 중에 일곱 명이니 심각한 수준이었죠. 노동강도, 시간당 생산대수를 높이니까 노동강도 완화투쟁을 해보자 하면서 수동 콘베이어를 잡았다고 해서 작업저하, 생산성 저하됐다, 그렇게 해서 3월달에 해고당해요. 그러면서 선거 치르고 집행부 세우고 저는 교육홍보차장을 맡았죠. 노조 기획국장을 도와서 노조 기획 역할을 했습니다.


현대정공노동조합은 단체협약에 조합원 교육시간을 요구했습니다. 교육시간이 확보 안 됐을 때도 저녁 7시 퇴근하면 식권을 구매해 조합원들에게 나눠주고 8시까지 모여 밤 10시까지 교육을 했습니다. 열 시간 일하고 밥 먹고 두 시간 잡아놓고 학습했는데 70~80프로 참여했죠. 열성을 갖고 참여 설득하고 조합원 교육을 하고, 91년 단협 때 8시간 교육시간을 따내고, 94년 16시간으로 늘어나고, 교육시간 따내기 전부터 교육을 열심히 했고, 따내고 나서는 철저하게 했습니다.


분임토의도 했는데 노사협의회나 임단협 요구 중에 중요한 정책 요구, 직권조인이 문제가 돼서 총회투표를 붙인 건가 말 건가 여부에 대해 분임토의를 했습니다. 일상적으로 중요한 정책은 조합원 토론을 붙여서 1인 1발언을 적어 서명해 제출하고 그거를 분석해서 정책에 반영했습니다. 분임조는 10명 단위였으니 300개는 넘었을 겁니다. 93년도에는 현총련 공동임투 때 총파업을 하다가 수위를 부분파업으로 낮출 건가 말 건가를 놓고 분임토의를 벌였습니다. 파업이 장기화되면서 투쟁동력이 소멸된다, 낮아진다, 지역활동가들 사이에 의견이 있어서 현대정공 안에도 그거를 조합원 공개토론에 붙였습니다. 그 토론을 한 후에 조합원 투표에 들어가 수위조절을 했습니다. 파업 참여 조합원 1500명 대오가 공장 안에 항상 있었는데 치열하게 다 같이 공개토론하고, 그전에 반대 있으니까 대의원 토론하고, 결과도 투표로 바로 간 것이 아니고 토론 내용을 바탕으로 분임토의를 다시 했죠. 컨테이너 야적장에 마이크를 놓고 찬성 세 명, 반대 세 명 미리 받아서 대표발언자 받아 자기들끼리 짜서 한 명씩 한 명씩 토론하고, 윤성근 현대차노조 위원장이랑 윤재건 현대중공업노조 위원장, 윤인섭 변호사 같은 외부 분에게도 마이크를 넘겨 현 상황 설명해주고, 현총련 공통임투가 중공업이 앞서다 보니까 자동차가 파업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자, 같이 공동파업하자, 윤재건 위원장이 와서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저희가 파업을 하겠다, 그럼에도 반대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토론을 붙여서 마이크 잡고 1500명이 100분 토론을 하고, 구석에, 온 마당에 열 명씩 나눠가 분임토의를 한 거죠. 전원 찬성, 몇 대 몇 찬반, 결론 안 남 등으로 붙여서 보고서를 만들었는데 그때는 발표를 안 했습니다. 수위조절이 다수 찬성이라 다음 주부터 부분파업을 하겠습니다 했죠. 교육, 홍보, 분임토의는 정말 열심히 했죠.


소위원 조직, 지금도 5공장이 그게 활발한데 할 수 있는 여건이나 장치, 시간보장이 다른 공장보다 낫고, 전통으로 그렇게 해왔고, 노조 집행부가 소위원 활동시간, 교육시간, 단협으로 확보도 하고 2박3일간 근무시간 중에 회사에서 시간할애 받아 수련회도 가고, 소위원, 대의원 간부교육 제대로 했죠. 자동차는 지금 그게 잘 안 되지만 대의원 수련회 2박3일로 하고 교육훈련하고 다양한 방식을 썼죠. 현장조직은 소위원에 대한 일상적인 교육도 하고 여러 토론 간담회 등을 많이 했어요. 대의원과 달리 소위원은 2,3대 규약 없을 때도 임의로 조직했고 규약에 못박았습니다. 4대 때는 민주파 활동가들이 상집에 스물댓 명이 들어가 대의원 출마할 사람이 없어서 역량 떨어진 사람이 많이 들어왔어요. 쟁발 결의하려고 하는데 회사 차에 태워가 경주고 멀리 보내버리고 회사에서 대의원 67명 중 의결정족수가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해 소위원들이 들고 일어나 대의원 다 사퇴하라 그래서 사퇴합니다. 현장 소위원 하던 사람들이 대의원 다시 출마하면서 그때 이후로 현대정공에서는 민주파가, 적극적으로 활동하려는 사람들이 대의원의 과반수, 운영위원, 감사위원들도 건강한 사람들로 구성 가능해졌습니다. 이런 구조가 현장조직, 중간간부층까지 건강한 사람이 다수인 흐름을 만들어낸 겁니다. 5공장은 지금 활동력은 떨어졌어도 그런 분위기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죠.


조직간 대립과 집행부 다툼 넘어서야


이=정공이 99년 자동차로 합쳐져 5공장이 되고 그전에는 자동차 부품, 컨테이너만 생산했나요?


박=자동차는 94,5년 이때부터 구십 몇 년인가 기억이 안 나네. 갤로퍼를 먼저 생산을 하고, 상용변속기를 92,3년부터 하면서 콘테이너가 줄어들고 했는데 나중에 마지막에 콘테이너가 없어지면서 산타모 라인이 하나 더 서고 난 뒤에 99년도 합병이 됐습니다.


이=2000년에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장에 당선됐습니다.


박=2000년도에 민주노총지역본부장 되고 그전에 99년 사무처장 먼저 했습니다. 현대정공 노조 부위원장 하면서 분할합병 반대투쟁하다가 해고된 게 99년이고, 98년 말부터 99년 말까지 지역본부 사무처장이었습니다. 90년에 해고됐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대통령 출마하는 바람에 92년에 복직했고, 그러다 99년 해고돼서 2000년 지역본부장에 출마해 당선됐습니다. 현대기아차노조 공대위 기획단장도 맡았죠.


민주노총 지역본부 사무실이 학성동에 있다가 사무실이 없어서 근로자종합복지회관 지을 때 전임 민주노총 본부장이랑 합의해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노총이 자기도 들어가겠다고 하면서 문제가 됐습니다. 시에서 민주노총을 달가워하지 않아 다른 데 지어줄 테니 다른 데 가라고 합니다. 우리는 노동자종합복지관이 노동자와 함께하는 건데 같이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해서 싸웠습니다. 근로자종합복지회관 개소식 때 천막농성하기로 했는데 사무실 문제 해결 않고 개소식 강행하겠다고 해서 계란 한 판을 그냥 심완구 시장한테 던지는 바람에 구속이 됐죠. 한 5개월 구속됐죠.


2001년엔 화섬3사 파업이 있었는데, 민주노총 지역조직 확대하고 지역사회에 정치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민주노총을 강화하겠다는 생각이었고, 실제로 단위사업장 조직활동을 살려 지역 노동자 조직과 교육을 강화하겠다 고민했는데 투쟁사업장 쫓아다니기 바빴습니다. 지역본부의 일이라는 건 실제 장기투쟁사업장 문제를 풀고 그들의 투쟁을 지지 엄호하는 데 역량이 집중돼서 긴 호흡으로 전체 조직운동의 역량을 강화할 것인가, 정책적 역량을 강화할 것인가 하는 고민은 잘 안 되는 편이죠.


이=지난 촛불집회 때는 옥동 동네 촛불도 하고 했는데, 현재 노조운동에 대한 평가와 무엇을 극복해야 하는지 얘기해주세요.


박=동네 촛불은 하긴 했는데 잘 안됐죠. 금속노조, 민주노총 모두 30년간 운동을 해왔는데 운동역량이 축적 또는 확대가 되지 않아요. 수적으로 늘어났지만 뜯어놓고 보면 각 노조들이 제자리걸음하는 거 같은... 늘 임기가 바뀌고, 바뀌면 성향이 달라지고, 경험과 역량이 축적이 안 돼 서로가 서로의 발목을 잡는 노조운동이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해요. 내가 집행하면 노조운동과 환경을 바꾸겠겠다고 하지만 2년간 짧은 기간에 현상유지에 급급합니다. 현장은 바뀌어왔는데...


조직간 대립과 집행부 다툼, 이걸 넘어서야 합니다. 적어도 민주노총의 강령과 과제만이라도 제대로 충실히 이행하고 해결해나가겠다 이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하지 않습니까? 나머지는 정파에 따라 활동하더라도 민주노총 강령과 과제를 합의하고 공감하는 바에 따라 정책, 조직적 역량을 결집해 실행해나가는 데 힘을 모아야 합니다. 집행도 공동집행을 하는 게 어떠냐. 집행부도 그렇고. 현대차 5만 조직인데 단독 정파가 집행한다고 해서 힘 있게 현장을 장악하고 자본과 싸워나가기는 힘듭니다. 우리가 공동집행을 통해 똘똘 뭉쳐야 자본과 싸우기 쉽다, 자본이 오히려 역으로 노동을 분할 지배하는 데 이용당하는 구조를 극복해야 하지 않느냐. 그러면 한 걸음 진보가 가능하다. 앞으로는 그것을 뛰어넘는 전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운동의 정책적 역량이 축적이 안 돼 노동연구소 하나 없고, 산별노조도 그렇고, 산별노조 총연맹 단위 노동활동가들이 많은 것을 주려고 해도 현실적으로 줄 수 있는 게 그거 밖에 없지만 정책이라도 제대로 개발해 노동운동이 한걸음 전진하는 데 도움이 안 되겠나.


중앙교섭 산별투쟁이나 교섭이 쉽지 않은데 사실 역량과 재정을 집중하고, 산별노조의 요구안와 개별기업의 요구안이 다르지 않다면 산별 단위에서 정책요구서를 현장감 있게 현장 조합원의 요구와 이해에 상응하는 것을 산별 공동요구로 만들면 산별 중앙교섭 안 해도 내용적 통일성을 확보해 개별교섭에서 산별 공동요구가 이뤄지도록 할 수 있습니다.


조직화의 문제도 유통이나 중소영세사업장, 비정규직 노조로 조직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들을 어떻게 노조로, 민주노총으로 조직할 것이냐. 민주노총이 대기업 노동자 중심을 뛰어넘기 위해 재정과 인력을 의식적으로 배치해야 합니다. 당장 그들이 노조에 가입 못 하더라도 그들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해 그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공감대 이뤄나가면서 미조직노동자 요구까지 대변하는 민주노총이 되도록 정책적 노력이 요구됩니다.


노동운동이 앞으로 30년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독일 금속노조, 사민당이 150년 일관성 있게 전략적으로 꾸준히 행동해왔듯이 우리도 30년, 100년을 내다보고 준비해서 운동을 지속적으로 성장시켜나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논의와 토론을 통해서 조직적 역량을 키우는 데 보탬과 힘을 실어주고 싶습니다. 그런 활동을 하고 싶다는 활동가를 길러내는 교육에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특별취재팀>
기획, 대담=이종호 편집국장
사진, 동영상=김규란 기자
정리=이채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