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발행인 백무산 시인이 창간 5주년을 맞아 특별기고문을 보내왔다. 백무산 시인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또 다른 정체성인 시민성을 강화해 정치적 영향력을 넓히고, 시민사회 활동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또 노동정치를 공장정치로 제한하는 것은 계급성을 왜곡한다며 시민사회운동을 노동정치 실현의 단계로 삼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백 시인은 그 첫걸음으로 노동자들이 시민단체에 가입하고 지역의 노동․시민언론을 키워내는 데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편집자주>


             
우리 사회는 노동자들이 가진 잠재적인 개혁 지향성과 변혁적 열정을 낭비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87년 이후에도 정치적 위상이 본질적으로 개선되지 못했다.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의 협애한 지형은 변하지 않았고, 노동정치의 제도적 장벽 또한 해소되지 않았다. 사회민주화의 형식적인 성과물을 담아내는 시민사회와도 분리되어 있어 노동정치의 잠재력은 모두 노동 내부에 갇혀 소진되고 해체되고 있다. 사회적 존재로서 노동자 자신의 또 다른 정체성인 시민성을 제고하는 일은 계급성을 약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지난 30년 동안 우리 사회는 두 가지 커다란 체제적 변화를 겪었다. 정치적으로는 87년 민주화 투쟁으로 쟁취한 사회민주화이고, 다른 하나는 97년 체제라고도 불리기도 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의 변화다. 87년 투쟁의 성과로 형식적인 민주화는 달성했으나 실제적인 민주화가 지체되는 과정에 신자유주의 체제의 등장과 함께 양극화와 불평등이 심화되고 더 이상 민주화는 진전되지 못했거나 후퇴했다. 


그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의 지속적인 투쟁에도 의미 있는 정치적 진출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 투쟁이 반공주의 등 좁은 이데올로기 지형에 갇혀 있어 진보적 민주화를 견인하지 못하면서 지역주의와 성장주의의 장벽을 해소하지 못했다. 정치권에서는 노동문제가 정치화 되는 것을 저지해 왔고, 정치적 이슈에서 배제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서 노동자의 정치적 진출을 가로막아 왔다. 또한 민주정부의 변질과 진보정치, 노동정치 운동의 실패로 인해 노동자들은 사회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를 잃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조합주의를 강화할 수밖에 없는 악순환을 겪어 왔다.


87년 6월 항쟁은 일반 시민들과 학생, 지식인들이 주도한 운동이었다. 서구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는 조직화된 노동투쟁이 그 중심에 있었으나 우리나라의 경우 시민운동이 노동운동을 견인하고 지원했다. 또한 87년 이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도 노동운동이 중심이었던 적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사회정치적 이슈를 주도하지도 못했고, 정치로부터 소외되고 시민사회로부터도 분리되었다. 경직된 이데올로기 지형을 돌파하지 못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잃고 점차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왔다.


하지만 87년 이후 노동자들의 삶이 적지 않은 변화를 겪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부터 벗어났고, 정치적 자유와 의식적으로 성장했다. 권위주의적 위계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왔다. 그 무엇보다 수많은 투쟁과정에서 민주주의적 실천에 단련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잠재적이고 집단적인 변혁 에너지가 다양한 사회적 실천으로 활성화되지 못하고 개별화된 소비자로 포섭되거나 협애한 노동조합 내부 활동으로 소모되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터득한 지혜와 가치를 실현하고 성장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낭비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시민사회 형성은 87년을 거치고 90년대에 시민 단체들이 활성화되면서부터다. 세계적으로도 근대 이후 형성된 시민사회의 개념은 매우 다양하게 정의되지만, 일반적으로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자율적인 개인의 사회활동 영역으로 규정한다. 시민사회는 산업자본주의가 확대되면서 절대주의 국가체제가 붕괴하고, 시민혁명을 통해 국가의 공적 권위에 대항하는 자율적 결사와 그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 시민사회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서구의 제국주의 파시즘 체제와 동구 사회주의권의 공산당 일당 체제에서 벗어나 자율적인 사회를 건설하려는 지식인과 시민들의 움직임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국가적 목표를 위해 공동체 전체를 동원하여 폭력적으로 지배하는 전체주의에 대한 반발이었고, 국가라는 수단을 통하지 않으면서 자율적이고 공적인 영역을 확대하여 사회진보를 이룩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시민사회는 현대에 와서 국가를 견제하고 국가체제를 민주화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시민사회의 진보는 또 현대사회의 다양한 가치와 이해관계를 반영한다. 억압적인 국가체제에 억눌려 있던 사회는 다원적 사회로 발전하고, 노동과 자본 사이 계급적 모순 또한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게 된다. 시민운동은 이제 어느 것이 중심이라고 말하지 못할 만큼 다양화되었다. 현대사회가 여전히 생산수단을 둘러싼 노동과 자본 간의 모순이 주요한 모순인 건 맞지만, 모순의 발현 양태는 다양할 뿐만 아니라 부차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중심 과제로 환원되지 않을 만큼 다중적으로 발전했다. 시민운동은 점차 다양하게 분화되어, 환경, 평화, 복지, 여성, 청년, 교육, 젠더, 소수자, 장애인, 인권 등 어느 것 하나 우리 삶의 질과 직결되지 않은 것이 없다. 주요 모순이 해결된다고 따라서 해결되는 부차적인 문제도 없다. 오히려 어느 한 운동에서 중심성을 내세우는 것은 다른 가치들을 훼손할 수도 있다. 노동에 이익이 되는 것이 환경을 훼손하고 평화를 해칠 수도 있다. 노동자들이 시민사회에 대한 관심과 시민성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이유만이 아니다.


노동자들은 어느 집단보다도 국가체제에 종속되고 억압체제에 포섭돼 왔다. 우리의 선의적인 의지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국가체제를 복기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내재화된 의지는 노동활동에서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표출된다. 노동자들의 도덕성은 기본적으로 자본가적이다. 그것은 이미 자본에 오랜 종속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의식에 각인돼 있다. 국가권력은 모든 폭력을 독점한 지배체제다. 그 때문에 정치운동과  변혁운동은 국가권력 장악을 목표로 한다. 그만큼 강력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것이 국가다. 국가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을 수 있다. 지금 당장 노동자에게 국가권력의 모든 전권을 준다고 해도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국가를 만들 것이라고 단정하는 사회철학자 앙드레 고르의 주장은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의식에는 전 생애를 통해 국가체제가 각인돼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율적인 시민사회 운동을 통해 자신의 삶과 의식을 재설계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현대노동은 매우 기능적이고 극단적인 분업체제여서 노동 과정을 통한 인간적 실현은 불가능하다. 현대 노동자들은 고립된 생산을 통해 인생의 시간을 돈으로 바꾸는 일로 소모하고 그 보상으로 얼마간의 소비시장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질 뿐이다. 그 과정에 발생할 수 있는 도덕적 윤리적 문제는 대부분 묵살된다. 노동투쟁은 노동의 물리적인 영토를 넓히는 결과를 가져오지만, 확보한 그 빈 영토 안에 무엇을 담아내는가가 문제다. 노동과 삶의 창조적 가치를 내용으로 하는 독자적인 문화가 있는가? 그 빈 영토에 지배문화와 소비문화가 점령하고 부지불식간에 그 영토는 다시 내부 식민지가 되고 자본이 환수해 가고 있지 않은가?


노동자가 절대다수인 도시에서도 여전히 지역주의 보수주의 정치가 득세하는 것을 단순히 노동자의 의식 수준의 문제로 판단할 수 없다. 의식은 개인의 주관적 의지가 아니라 사회적 유대를 통해 형성된다. 그 의식의 활동성을 담아낼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주관적인 감정이 이성적 판단을 지배하게 된다. 현대사회의 노동은 공장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 시장의 전일적 지배는 모든 것을 노동으로 바꿔놓았다. 노동 아닌 것이 없고 따라서 자본 아닌 것이 없다. 감성과 전통과 가족, 사랑, 무의식까지도 이윤의 수단이 되고 상품화된다. 삶 전체가 노동과 동시에 자본이 되는 현실이다. 따라서 시민운동이 노동운동과 분리되지 않는다.


노동자들에게도 이제 보다 넓은 의미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어야 한다. 많은 노동자들은 더 이상 보호받아야 할 우리 사회의 약자나 소수자가 아니다. 여전히 권력과 자본의 ‘갑질’이 존재하지만 피해자라고 해서 정의로운 것도 아니다. 그 책임은 생활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행위가 사회의 다른 누군가에게 또는 그 무엇을 해치는 일이 되지 않을 지 돌아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그만큼 다양해 졌다. 과거 생존을 위한 투쟁과정에서는 대부분 무시될 수 있었던 것들이 여전히 무시되고 있다. 대기업 노동자들은 이제 지배집단의 하위계층에 편입돼 있다는 지적도 새겨들어야 한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단순한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노동자라는 존재와 공장이 오히려 보수적 의식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학습된 노동자든 아니든 그 영향은 마찬가지다. 생산 체계와 공장의 규율, 동일 집단 속의 타자에 욕망화된 생활방식이 삶을 규격화 한다. 그 경직성은 상품화되고 보수성을 불러온다. 가난한 자들이 보수정당에 투표하는 것은 지적 수준이 낮고 의식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공장체제의 경직성 때문이다.  


노동계급이 사회 변화의 주도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집단적이고 물리적 가능성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우리는 충분히 경험을 했다. 노동계급이 그 사회에 문화적 도덕적 우월성을 확보하지 못하고는 대안세력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가질 수 없고, 여타 계층으로부터 동의와 지지를 얻어낼 수 없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여전히 공장 내부의 연대에만 매몰돼 있고 사회와는 고립적이다. 노동운동은 87년 이후 점점 활동영역이 더 좁아졌다. 공부모임도 사라지고 문화운동도 거의 소멸했다. 대안적 문화 활동도 찾아보기 어렵다. 독서모임, 글쓰기 모임도 사라지고 언론운동도 진전이 없다. 노동운동의 내용은 회사측과의 교섭활동이 거의 전부를 채우고 있다. 사회적 문제에 대해 노동조합의 피상적이고 형식적인 연대만으로 책임을 다했다는 생각이다. 그 과정에서 조합원들은 자기 이익에만 관심이 쏠려갈 뿐이다.


우리는 그동안 민중운동이 즉각 정치운동으로 이동하는 것이 과거에는 가능했을 지라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그만큼  국가의 구성에서 사회영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노동운동이 어떤 매개도 없이 권력에의 의지만 가진다고 정당이 되지는 않는다. 노동이 시민사회와 연속적이어야 가능한 전략이다. 노동의 이상이 사회적 설득력을 가지면서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실현되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경직성을 극복해 갈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시민사회운동을 진보적으로 바꿔나가는 데 노동자들의 참여와 노력이 중요하며, 그것이 노동정치를 강화하는 길이 될 수 있다.


흔히 노동자가 시민 혹은 국민으로 취급되어 계급성이 약화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렇다고 계급성을 강화하기 위해 공장으로 제한하는 것은 계급성을 왜곡한다. 노동정치는 공장정치가 아닌 것이다. 노동과 삶의 자율성을 높여내는 시민사회운동을 노동정치 실현의 단계로 삼을 수도 있다. 계급의식은 사회 전체의 변혁적 전망에서 나오는 것이지 자기 보호와 고립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선 노동자들이 사회단체에 가입하고 공익적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사회단체에 노동자들의 참여가 매우 저조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직장마다 다양한 서클과 종교단체, 동호회가 많이 있지만 시민단체와 연결된 모임은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역시 그렇다. 시민사회에서 언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표적인 노동자 도시에 자본을 대변하고 노동을 노골적으로 적대시 하는 보수언론은 차고 넘치고 있지만, 노동․시민언론 하나 자리 잡기 어려운 현실은 우리 사회운동의 어두운 현주소를 말해준다. 노동의 시민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때다. 


백무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