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던 사랑을 하느라 봄날이 갔구나. 지독한 사랑이 떠날 적에 세계가 산산조각나는, 해체되는 날들이었다. 뼈와 관절과 무너진 살들은 다시 일어서 재조립이 되었다. 한 시절 사랑의 신선놀음에 빠지다 보니 십 년이란 세월이 스쳐가버린 듯 시간에 정확하게 관통당한 육신의 늙음만 마주하게 되었다.


늦여름 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이제 두 번 다시 사랑 같지 않은 사랑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묵음 같은 시간에 이른다.
오는 가을을 맞이하러 가기보다 가는 여름 뒷자락을 부여잡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늦여름이다. 가로등에 매달린 화분에 심겨진 분홍 팬지꽃들이 하늘하늘거리듯 늦여름 자락도 그러하다.


옛사랑을 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오후이다. 새로운 사랑 앞에 서지 않기를 기도하는 오후다. 모든 것은 흐르고 흘러서 흘러가듯 내 안의 것이 강물로 변신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오후다. 그래, 지나가거라.


간직할 수 있는 감정이란 모두 환영과 오류와 관념에 지나지 않을 뿐일 것이니 현실은 위대하고 찬란하고 정겹게 당신의 편에 서 있을 것이니 이제 더 이상 허황된 뜬구름 잡는 잉여적인 감정들은 묻고 묻어 삭혀버려야 할 일이다. 헛발은 그만 딛자.


비바람 치던 바닷가를 거닐고 또 거닐고 할 일은 이제 없을 때이다. 추억도 지울 날들이다. 이제.
하염없는 일들은 하염없이 당신을 유혹하러 덮치러 올 것이지만 당신을 늦여름의 투명한 햇살의 공기 속으로 놓아버릴 일이다. 투명한 공기처럼 숨을 쉴 일이다.


육신은 세월을 지우지 못해 지치고 생기를 점점 잃어갈 일만 남았을 테지만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달아날 생각을 말자. 죽음의 그늘을 고요하게 안락하게 꾸민 뒤 어떻게 당신의 죽음을 멋지게 맞이할 것인지 궁리하자.
번잡하고 수선스런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순간순간 포착하는 고요의 그림자, 고요의 투영을 뚫어지게 늦여름 투명한 자락 너머로 바라볼 예정이다.


바람이 분다, 비가 온다, 공중으로 세계가 부양한다. 아침을 짓고, 오후를 되살리고, 저녁을 지으며 소박한 하루가 저물다 떠나는 산자락 언저리를 오래 머물다 떠나고 싶다.


옛사랑아, 오랜 시간이 흘러가서 사랑의 황무지를 바라보는 날이다. 살아온 시간들은 늘 황무지였으나, 살아온 시간을 늘 폐허로 맞아들이려 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살아온 시간들은 늘 당신의 옛사랑들이었다.


바다로 가는 푸른 길이라 착각하던 허상들로 언제나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으나 구름 한 자락이 그 곁을 지나가고 있더라. 머물지 않을 대기들로 정처 없이 흐르고. 가거라, 옛 우물에 어리던 그 시절의 그림자들이여.


오래 늦여름을 부여잡고 오후를 달래고 있었다. 이제 가도 괜찮다. 괜찮다. 오는 저 비도 지나갈 것이고 당신에게로 오는 시간들도 스쳐지나갈 인연일 것이니 당신이 붙잡으려 할 것은 어차피 없을 것이었다. 여태 모든 것이 지나가버렸지 않은가.


강현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