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기둥 네 개와 두 개의 벤치가 전부인 역

<기둥 네 개와 두 개의 벤치가 전부인 역>


16양동마을을 지나치는 기차 위로 관가정이 보인다

<양동마을을 지나치는 기차 위로 관가정이 보인다>


내 고향 영천 시골 마을은 시·군 경계를 넘지만 경주의 서북지역과 인접한다. 이런 이유로 고향마을에는 안강, 강동, 양일 등의 경주 쪽 마을을 택호로 쓰는 집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양동댁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서당에서 공자왈·맹자왈 글 좀 읽으신 아버지는 그 아주머니가 지나가면 “저 아지매는 반촌마을 양동사람이다. 예사로 보면 안 된다.”라고 하시며 은영 중에 그 마을에 대한 존경과 동경을 표했다. 자기 마을도 아닌 경계 저 너머 타관의 내력을 꿰찬 듯한 아버지는 월성손씨와 여강이씨가 그 마을에 터를 잡고 대유학자 회재 이언적과 같은 큰 인물을 배출한 이야기를 줄줄 이어 나가셨다, 일제강점기 때도 월성군수가 부임하면 양동 문중에 제일 먼저 인사를 갈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셨지만, 나는 이를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케케묵은 이야기로 치부하고 귓등으로 듣기 일쑤였다.


16문양이 고급스런 바닥 블록

<문양이 고급스런 바닥 블록>


딱하게도 폭염 경보 내린 날 양자동역을 찾았다. 이 역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양동마을의 간이역이다. 양동마을 진입로 입구에 차를 세우고 철길 따라 잘 정비된 농로를 따라 양자동역으로 땀을 흘리며 걸었다. 녹음이 짙어진 여름날의 간이역은 자칫 지나치기 십상이다. 이 역 역시 흐드러진 버드나무와 무성한 잡목 숲에 숨겨져 숨은그림찾기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비록 지금은 수요 감소로 폐역 신세가 되었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포항·부산에서 출발한 동해남부선 기차가 형산강을 끼고돌다 이곳에 정차해 마을 사람들을 싣고 내려 주었다. 이 역은 1967년 9월에 영업을 시작하여 2007년에 여객 취급을 중단했다.


사진가들의 블로그를 보면 2년 전만 해도 승강장으로 오르는 노란색 목조계단이 있었지만 세월이란 지우개가 그 흔적마저도 지우고 있었다. 양자동역은 지붕을 받힌 네 개의 기둥과 두 개의 벤치가 전부였다.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구조물 속에 놓여있는 작은 벤치 두 개. 이를 보는 순간 마치 공연이 끝난 뒤의 무대 같은 간이역 특유의 아련함이 밀려왔다. 만약 저 벤치가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면 이 역에서 나는 또 얼마만큼의 쓸쓸함을 계량했을까? 한때는 사람의 손길에 길들여져 단정했겠지만 이제는 시간의 습속 속에 묻혀 풍경의 일부가 되어 버린 역. 가끔씩 우리네 인생이 간이역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종착역으로 가는 중에 잠시 내렸다 스쳐 지나는 간이역. 정해진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떠나는 기차처럼 우리는 이 세상이란 간이역을 아주 잠깐 스쳐 지날 뿐이다. 양자동역을 돌아 나오며 가로수길을 걷자니 ‘둘이 걸었네’라는 유행가 가사가 입에서 절로 흥얼거렸다. “둘이 걸었네. 어제 그 길을 불빛 따라 우산도 없이~~”


16양동초 녹음 교실. 고인이 된 기증자

<양동초 녹음 교실. 고인이 된 기증자>


16양동초등학교 100주년 기념비

<양동초등학교 100주년 기념비>


태양의 고도가 가장 뜨거울 즈음 양동마을에 들어섰다. 관가정 아래 싱그럽게 펼쳐진 초록 연밭이 폭염에 지친 사람을 싱그럽게 위로하며 맞았다. 아침을 거른 터라 허기부터 달래려 연잎밥으로 유명하다는 초원식당으로 들어갔다. 초가 마당에는 수련이며, 부레옥잠, 다육화분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어 깔끔할 것 같은 이 댁 주인의 밥상을 미리 점쳐보게 했다. 서까래가 시원하게 노출된 방에서 정갈한 밥상을 받았다. 옷고름처럼 단정하게 감싼 연잎밥을 펼치자 그 속에서 잣, 밤, 땅콩, 아몬드, 대추 등의 온갖 잡곡밥이 화려하게 드러났다. 연근, 호박, 오징어채 등의 정갈한 기본 반찬과 곁들인 연잎밥은 간이 딱 맞았다. 음식 맛은 결국 간을 잘 맞추는 데 있다. 제아무리 신선하고 비싼 재료를 사용했다 하더라도 간이 맞지 않은 음식은 낙제점이다. 얼굴 예쁜 여자는 소박맞아도 음식 잘하는 여자는 소박맞지 않는다던가. 


16여강이씨 집에 시집온 권씨 할머니

<여강이씨 집에 시집온 권씨 할머니>


16양자동역 앞 농로길

<양자동역 앞 농로길>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처음 찾은 양동마을은 폭염 속에서도 관람객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이곳은 한국의 씨족마을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마을이다. 현재 월성손씨 40여 가구, 여강이씨 70여 가구가 마을을 지키고 있다. 남편이 처가에 와서 정착하는 처가입향유형의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히며, 전통적인 풍수 원칙을 잘 지키고 있는 마을로도 유명하다. 무엇보다도 양동마을은 박제된 민속마을이 아니라 실제로 전통가옥에서 사람이 거주하며 제향, 가정의례, 민속 행사 같은 전통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데서 세계문화사적 가치가 높다 할 수 있다. 이 마을에 대한 백과사전식 설명은 차치하고 필자가 양동마을에서 추천하고픈 관람 포인트는 따로 있다. 바로 20여 채 남짓한 노비들의 초가다. 가랍집이라 불리는 이 집들은 전형적인 전통초가로 언덕 위의 기와집 바로 아래 지어져 상전이 부르면 곧바로 달려갈 수 있게 했다.


16우물체험집. 곤지서당 이덕환 선생 내외

<우물체험집. 곤지서당 이덕환 선생 내외>


몇 백 년 전으로 돌아간 과객처럼 유유자적 동네 한 바퀴를 둘러 본 뒤 우물체험집이라 적힌 초가로 들어갔다. 식혜 한 잔을 시켜놓고 우물물을 길어 세수를 해보니 더위에 화끈거리던 얼굴이 시원해졌다. 바람으로 치면 산들바람이랄까? 평상에 앉아 쉬며 입구 탁자에 앉아 담소 중인 주인아주머니와 할머니께 말을 걸었다. 두 분이 너무나 다정해 보여 고부지간인가를 물었더니 할머니는 이웃한 손실할매(94세)란다. 내친김에 할머니께 양자동역에 대해서 여쭈었다. “할머니, 옛날에 기차역을 지을 때 왜 마을 앞이 아닌 저 먼 곳에다 설치했습니까?” 노령인 할머니가 내 말귀를 못 알아차리자 주인아주머니가 중간에서 통역하듯 내 말을 다시 전했다.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듯 잠시 머뭇거리던 할머니가 대답했다. “탁 트인 마을을 뭣이 가리면 좋을 게 뭣인가?” 짧지만 획이 굵은 현답이다. 할머니와 어렵게 의사소통을 이어가던 중에 우리의 대화가 답답했는지 초가 안방 문이 열리더니 이 댁 주인장이 구원투수처럼 등장했다. 머리가 희끗하니 점잖아 보이는 아저씨가 내게 물어왔다. “실례지만, 어디서 오셨습니까?” 여차저차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자 아저씨는 친절하게도 이 마을의 기찻길에 얽힌 놀라운 내력을 자세히 설명해 주신다.


“우리 마을은 풍수상 ‘勿’자형 구조로 언덕과 계곡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요. 일제 때 안강과 포항을 잇는 철도공사를 하게 되는데 철길이 마을 한 복판을 지나가게 설계됐지요. 이번 광복절에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 안동의 임청각처럼 동네가 두 동강날 뻔한 겁니다. 그래서 평온하던 마을이 발칵 뒤집히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찻길이 마을을 관통하면 ‘勿’자에서 ‘一’자 획이 더해져 ‘血’자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피를 보게 된다는 뜻이지요.” 고개를 끄떡이는 내 추임새와 합세한 아저씨의 설명은 오랫동안 더 이어졌다.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양동 사람들은 마을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노인들부터 솔선수범 철도공사 현장으로 달려가 드러누웠으며 문중 대표들은 서울 총독부로 올라가 탄원서를 전달했다. 주민 전체가 혼연일체가 돼 저항한 끝에 결국 마을을 관통할 뻔한 철길은 돌려졌고 마을 사람들은 400년 동안 내려온 전통과 자존심을 지켜낼 수 있었다. 양동마을 바로 앞에 위치한 양동초등학교도 이 같은 이유로 교사를 남향이 아닌 동향으로 틀어 앉혔다.


아저씨는 양자동이란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이것도 일본놈들 소행이지요. 과거에 급제한 선비들이 많은 양반마을이라 하여 양좌동 또는 양동이라 불렀는데, 일제가 양반을 비하하며 놈자(者)자를 쓴 거지요. 일제는 비록 폐망한 나라지만 그들과 당당히 맞서는 이 마을을 ‘양반 놈의 마을’로 애써 깎아내리고 싶었던 거지요.”


16우물체험 중

<우물체험 중>


아저씨는 이외에도 개화 이후 경주 인근의 몰락한 양반들이 그나마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할 것 같은 이 마을로 들어와 의탁했다는 이야기, 마을 앞 형산강변에 부조시장이 크게 섰으며 관가정 아래까지 이어진 물길로 장사배들이 드나들었다는 마을의 근대사를 지체 없이 이어갔다.


고향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절로 느껴지는 너무나 귀한 이야기를 모두 들은 끝에서야 우물집 주인과 통성명을 나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이 댁 주인장 이덕환 선생은 양동마을 곤지서당(困知書堂)의 훈장님이시다. 은퇴 전부터 틈틈이 한학을 공부하여 지금과 같은 고향에서의 인생 제2막을 꿈꾸었단다.


존경의 마음을 다해 인사를 올리고 우물집을 나서며 생각했다. 400년 양동마을을 지키는 힘이 저 댁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편리함보다는 전통을 지키려 저 산기슭에 가져다 놓은 이 마을의 기차역처럼 불편하지만 초가에 내려와 고향의 전통을 계승하는 일을 당연히 여기는 저 모습이 바로 양동의 힘이 아닐까? 유학자의 시조 공자는 이익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견리사의(見利思義), 눈앞의 이익을 보면 먼저 의로운지를 생각하라.’


마을을 돌아 나오는 길에 나무 그늘에 홀로 앉아 “위험하게 왜 우물 뚜껑을 여느냐”며 악동들을 지도하는 권씨 할머니(82세)를 만났다. 여강이씨 집에 시집 와서 슬하에 2남 2녀를 둔 할머니는 금세 자식 자랑을 툭 던져왔다. “우리 큰아들은 서울대 나와서 미국에 있습니더. 큰 손자는 예일대 나왔고, 작은손자는 하버드 나왔심더. 선상님은 미국에 가봤능교? 나는 미국에 세 번이나 가봤심더.” 가히 양동마을다운 자식자랑이다. 근묵자흑 근주자적(近墨者黑 近朱者赤)이라 했던가?


황주경 시인. 울산민예총 문학위원장. 울산작가회의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