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시대 ‘불법’이었던 고등학생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


이종호 편집국장(이하 ‘이’)=70년대 얘기부터 해주시죠.


신명찬 바임에듀 대표(이하 ‘신’)=큰 누님이 진영우 선배 동기시고, 또 작은 누님은 고등학교 흥사단 활동을 했어요. 어릴 때 누님과 자취를 하면서부터 진영우 선배, 윤운룡 선배를 알게 된 거죠. 누님들 활동에 영향을 많이 받고 책도 많이 봤죠.
고1 때 흥사단 아카데미에 들어갔습니다. 내가 회장하고 흥사단 아카데미가 커졌는데 제 밑에 조승수, 황도윤, 박삼열, 기경도, 장영복 이런 후배들이 있었고, 그 밑에 추용호, 박준석, 박병희, 박유줄 등 많이 있었습니다. 학성고등학교 후배들 위주로 했었고 울산고 애들도 있었고 울산여고, 울산여상도 있었습니다.


이=흥사단 아카데미는 어떤 활동들을 했나요?


신=그때 울산문화원에서 토요일마다 집회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유신시대니까 집회를 못하게 돼 있어요. 긴급조치 9호 상황. 학교에서는 불법 단체죠 이게. 그랬는데 토요일마다 거기 가서 집회를 하는데 주로 5분 스피치라는 게 있어요. 도산 안창호 선생이 엘리트 양성해서 민족을 구하라는 뜻으로 만든 건데 리더십을 키우기 위해 5분 동안 자기주장을 하는 훈련을 하는 겁니다. 그 다음 책읽기 독서토론. 문학보다는 사회과학 쪽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당시 고 1,2학년 때 <해방전후사의 인식>, <민중과 지식인> 같은 대학생 책을 읽고 토론했습니다. 관심 있는 선배는 지속적은 아니더라도 집회에 참석해서 같이 토론했습니다. 그 당시 서울의 대학을 다니는 선배, 진영우 선배, 운룡 선배 경우 고신대 다니면서 집회에 참석했죠. 선배들을 통해서 대학생들의 사회 인식에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기억나는 건 동일방직 똥물 사건. 동일방직 노조 신문을 그 당시에 읽어본다든지 와이에이치 농성 등 울산에서 구하기 힘든, 대학생들도 구하기 힘든 걸 선배 통해 구해서 토론하고, 고등학교 때부터 많이 의식화했었죠.


고교 때는 학교 쪽에서 이런 단체 활동을 못하게 했습니다. 조회시간에 교장이 불러내 세워놓고 전교생들 앞에서 뭐라고 하고, 흥사단은 기러기 뱃지가 있는데 그 당시에 흥사단은 불법 단체에 가입된 게 되니까 배지를 떼라고 하기도 하고. 우리는 잘못한 게 없는데 왜 그러냐고 항의하기도 하고. 교련복 안 입기 운동까지는 아니었지만 교련 때 교련복을 가방 안에 넣고 등교한다든지 하면서 교사들과 마찰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이것도 하나의 저항 수단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가치를 고수하기 위한 저항. 토론도 하고 고등학생 때 그런 의식을 키워나가며 그때 정치경제 선생님과 유신헌법에 대해 토론도 많이 하고, 이게 국가일 수 있냐 3권분립도 안 되고 선생님께 항의하고, 선생님도 부마항쟁 때 학교 빼먹고 갔던 경험 이야기하면서 밖에다가는 절대 이야기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고, 학생들에게 은유적으로 정권의 부당성을 이야기했고 학생들은 진실을 이야기해달라고 요구하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원래 학교 선생님을 하려다가 아무 진실을 이야기해줄 수 없다는 회의감이 들고, 진실을 말하면 바로 해직될텐데... 그래서 인생의 진로를 바꾸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흥사단 아카데미 고등학생 모임이 당시는 불법이니까 회원 모집 자체가 어려웠습니다. 기억나는 건 학성고에 우열반 제도가 있었고 또 주초고사가 있어요. 매주 월요일마다 시험을 쳤는데 토요일 날 집회가고, 일요일은 대학생들 연합행사라든가 흥사단 행사, 고등학생 전국 아카데미 연합 체육대회 등도 참여하다보니 학생들이 공부에 지장이 있으니까 나오다 못나오다 했습니다.


이=고등학교 졸업하고서는요?


신=80년도 졸업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집에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바로 진학하지 못하고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 됐습니다. 아버님이 간경화로 돌아가셔서 그렇게 공장에 들어가 3개월 정도 일하다가 학교를 갔죠. 울산대학교 야간대를 다니면서, 그 당시만 해도 울산에 학생운동도 아직 잘 없었으니까 와이엠씨에이 독서회 한우리라든가 흥사단 출신들 통해서 울산대 학생운동의 태동을 준비하던 때였죠. 영우 형, 운룡이 형 흥사단에 영향을 받아 울산대 재학 중이니까 그런 모임을, 스터디 그룹을 했었죠.


최학도라고 학도가 상희 형 그쪽에 그룹 공부를 처음 했었고, 처음엔 학도를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쪽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같이 울대에서 스터디 그룹을 조직하고 후배들과 같이 공부하고. 그때 같이 한 후배들이 유무조, 오영애, 노동섭, 엄주상, 쭉 이기호 있었는데 또 누가 있었나. 그런 후배들과 같이 공부하고 이랬습니다.


그 멤버들이 87년도 학생 운동에 정대연, 김진석이 합류해서 민주화운동 학생 조직도 할 때 참여하고, 우리 경우에도 밑에 강미화, 이운제 등 스터디 그룹 팀도 두 개 정도 있었습니다.


형제교회 청년들이 주도한 이와이씨


저는 개인적으로 학교를 중도에 그만 두고 밖에 나와 생계 문제로 헌책방을 시작했습니다. 산의 빵잽이 선배들이 먹고 살 길이 없어 부산대 앞에서 팔기 시작한 헌책들이 사회과학서점 쪽으로 확장하면서 울산은 저보고 하라고 하셔서 공업탑 쪽에 4월책방이라고 했었어요. 헌책도 하지만 사회과학서적은 울산에 파는 데가 없어서 새 책으로 구비해 팔기 시작했습니다.


사업이 잘 되질 않았습니다. 압수 들어오고 셔터 내리고 책을 숨겨서 잠그고 어머니도 숨기고 후배들도 빌려갔다 갖다놓고 하면서 서점을 했었는데 저는 학원 사업을 하게 돼 책방을 접었습니다. 승수는 한참 뒤에 신새벽서점을 했어요.


이=형제교회가 만들어진 게 82년도죠?


신=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울사협) 만들어지기 전에 개신교 쪽에 엔씨씨(NCC 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목사님 모임을 하고, 청년은 이와이씨(EYC 기독청년협의회)를 창립했죠. 지역과 서울 중앙 네트워크 자체가 교회가 가장 두터웠어요. 다른 분야는 전무하고. 당시에 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중에 큰 교회가 이완재 목사님 하시던 양정교회와 신전교회였어요. 초대 울산 이와이씨 회장을 박성택 전도사가 했는데 신전교회 목사님 아들이었죠. 그 형님이 초대 회장을 하면서 저는 형제교회, 기독교장로회(기장)로 총무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구세군, 성공회가 있었어요. 구세군은 김진석 사관님, 성공회는 전재식 신부가 있었습니다. 울산 감리교회도 있었어요. 전국 이와이씨는 6개 교단인데, 기장, 예장통합, 구세군, 성공회, 감리교, 원래는 한국복음교회가 있는데 울산에 교회가 없으니까 울산은 다섯 개 교단으로 창립을 하죠. 에큐메니컬 교회일치 운동을 청년 중심으로 해서 시작했죠. 전국 조직을 갖고 있으니 다른 정치사회적 활동들도 이쪽 네트워크를 통해 지역에서 알 수 있는 창구였죠. 기장에서는 형제교회 청년들이 참여했고 주도적으로 이와이씨 활동을 했습니다. 실무적 역할은 제가 총무를 맡아 했고, 형제교회 친구들이 행동대를 맡았죠. 양정교회, 대현교회도 주도적으로 청년회 활동을 했죠. 돌아가신 대현교회 윤응오 목사님은 인권위도 참여하셨고, 대현교회 청년들도 참여했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 <택시운전사> 영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 그 당시 광주항쟁에 대한 정보가 없을 때니 독일에서 만든 광주항쟁 비디오 테잎을 교회 청년회 활동하면서 같이 보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83, 84년도에는 이와이씨 전국적으로 광주항쟁을 알리는 이런 지역별 추모대회도 하고 예배 형태로 하면서 이 진실을 적극적으로 알리자는 운동을 했죠. 울산도 추모예배를 하고 유인물 작업을 했습니다. 청년들을 통해 유인물을 나눠주고 유인물을 뿌리다가 잡혀가요. 지역별로 집집마다 나눠주고 그랬는데 저하고 두 명이 더 해서 세 명이 잡혀갑니다. 제가 그때 구류 29일. 29일 넘으면 구속인데 최장 구류라고 우스개로 이야기하고 7일, 직장인은 3일 먹었던 기억이 있네요. 다른 단체들이 당시에는 없으니 이와이씨가 중앙 네트워크가 있어 그런 선전 작업을 하고 알리고 교회를 통해 이런 것들도 많이 했었습니다. 가투도 하고, 그 다음에는 형제교회 같은 경우 기독청년대회, 기청대회라고 해마다 기청, 장청 대회가 있는데 이와이씨 차원이 아닌 교단 차원에서 형제교회 청년들도 세 번 정도를 참여했는데 그걸 통해 의식화되는 장으로 활용하기도 하고요.


직장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성경식 씨라고 노래패 활동도 했고 지금 사회적기업 라온누리 셰프로 있는 분도 성공회였죠. 성공회 청년이어서 처음에 만난 기억이 있구요. 박종희 선배 부인인 신은주는 울산대 총여학생회장 하다가 이와이씨에서 같이 했습니다.


울산에 문화운동이 없을 때라 지금 국회의원 하는 김종훈이 울대 탈춤반 활동을 했어서 학생들을 이와이씨에 끌어와서 탈춤패를 만들어 교회 공연도 하고, 종훈이가 주도적으로 했던 기억이 나네요.


이와이씨 이름으로 대학생도 끌어와서 했죠. 형제교회 등도 학생들이 학생운동 기웃기웃하는 모임 행사도 하고, 이와이씨와 형제교회가 그런 쪽에 사람이 모이고 거쳐 가는 관계 맺는 장소였죠.


이와이씨 사무실은 엔씨씨 인권위 사무실과 같이 썼습니다. 간사는 전중근 씨라고 부산에 부림사건에 관련된 형님인데 울산에 처음 와 간사를 했습니다. 처음 엔씨씨를 만들 때 저는 이와이씨 만들고 형님이랑 같이 했는데 중근이 형 다음에 박종희 형을 선배들이 데려왔습니다. 엔씨씨는 개신교 단체니까 울산성당 손덕만 신부님을 모시면서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를 만들었습니다. 불교는 없었고... 엔씨씨 사무실은 성남동 지금 국민은행 옆이었는데 지금은 청소년문화센터 있는 바로 옆인데 형제교회도 그 맞은편에 있었던 적이 있고요.


청년 대표 중앙위원으로 참여한 국민운동본부


이=울사협이 만들어지고 이듬해 6월 항쟁이 일어납니다.


신=87년도가 되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울산에도 만들어집니다. 전국에서 두세 번째로 빨리 만들었죠. 국본에 집행위원을 두고, 제가 청년대표로 이와이씨 회장일 때라 대표로 중앙위원을 했었고, 목사님들도 계시고. 제가 개인적으로 학원을 운영할 때인데 그때 참석하는 단체는 많이 없을 때인데 청년단체로 이와이씨가 하고 울사협 멤버 대부분이 합류했습니다. 집행위원장은 전재식 신부, 종희 형이 실무, 저도 실무 보며 중앙위원 청년대표로 합류했습니다.


집회하면 제가 학원을 하고 있으니 동장, 파출소장, 그 다음에 학원담당 교육청에 사회체육과라고 있는데 지금은 평생교육과, 그 과장님이 중학교 은사님이었습니다. 학원 건물주가 일산동장이었고, 그 뒤에 안기부가 있고... 집회 있으면 다방에서 선생님하고 못 가게 연금을 시키고 다른 분들도 중앙위원들은 어떻게든 담당이 있어서 그렇게 했고. 저는 학원 애들을 가르쳐야 하니 행사 안 나간다고 하다가 도망가면 따라와서 제발 앞에 나가서 마이크만 잡지 마라고 그러고 그런 일도 있었죠.


그러고 이와이씨 멤버들은 밤 되면 유인물 작업하고, 차량이 그때 많지 않아 상희 선배 포니였나 그 차하고 내 봉고차하고 그걸 가지고 유인물을 날라주고, 저 멀리 방어진 쪽에는 차가 있어야 작업을 하니 우리가 차로 뿌리고 그런 것들을 했었죠.


유월 항쟁 때까지 이와이씨로 참여했습니다. 전국 네트워크를 가진 단체가 학생운동에도 없고 하니까 집회나 행사가 있으면 유인물 가져 내려오고, 기청대회라든지 자료집 등 전국적인 자료를 확보할 수 있죠. 중앙위원 모임 다녀와서도 공유하고... 그걸로 잡혀서 감방 가기도 했습니다.


예비사회적기업, 지역아동센터에 무료 영어 교육


노동자 대투쟁 때는 울사협 쪽에서 지원을 많이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후에 울사협에서 민족학교 만들 때 교무처장인가 했었습니다. 장태원 선생님이 교장이었고 그 다음에 실무자들이 있었죠.


민족학교까지 쭉 하다가 울사협이 민족학교였으니 발전적 해체를 하고 민주시민회로 갑니다.  시민회에서는 제가 집행위원장을 한 번, 처음에는 진영우 형님이 했었고 저는 청년광장 대표 맡고 이렇게 하다가 나중에 집행위원장 하고, 의장은 진영우 선배.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민주시민회는 그게 언제더라 2000년대 초반이었나? 그때 해산을 합니다. 맨 마지막 실무자는 심기보 형이었고. 송주석이 사무국장하고 지금 인권연대 하는 박영철이 차장하고 기보 형이 하면서 해산을 했어요.


민주시민회 활동을 정리하고 나서는 사업 때문에 서울에 5년 정도 있었습니다. 교육사업인데 영어학원 프랜차이즈하느라. 그 이후로는 활동을 거의 못하고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어 떠나 있었고...


이=경주로 간 건?


신=2008년인데 집을 아예 옮겼습니다. 작년에 울산 다운동에 지금 이 공간인 예비사회적기업 바임에듀 사무실을 냈습니다. 내년에 사회적기업 신청을 하려고 하는데 지금 하고 있는 건 영어교육 관련 사업입니다. 경력단절여성, 청년들 일자리 만드는 영어공부방 창업을 돕는 활동도 하고, 이주여성들 일자리 만들기 위해 영어교육을 시켜서 도서관이라든가 주민센터라든지 복지관에 영어수업을 하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역아동센터에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주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30년 전과 촛불 정국 이후 지금을 돌아보면?


신=30년 전 경험과 사회 분위기를 봤을 때 우리가 그 당시에 부조리, 부정의에 항거하고 싸우고 했을 때 뭔가 바로 이뤄질 것 같았는데 크게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발전은 가져왔지만 30년이 지나도 진실들이, 광주민주화운동 같은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게 굉장히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촛불혁명을 거치면서 국민들도 정치 사회적 관심을 통해 옛날에 민주화 때처럼 그런 열정이 된다 그러면 앞으로 지금보다 더 나은 정권들이 만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바람을 가져봅니다.


<특별취재팀>
대담=이종호 편집국장
정리=이채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