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엄벌에서 본 금정산 하늘



1화엄벌 억새

<가을 하늘, 억새>


# 가을이 시작되다


눈부신 가을입니다. 가을의 문자반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파란 하늘에 가을구름이 낮게 자갈같이 깔려 흘러갑니다. 그 아래 금실로 만든 황금 억새가 하늘의 파랑을 붙잡으려 자꾸만 손 갈퀴질을 합니다. 어디를 걸어도 저절로 흥얼거리게 하는 날씨입니다.


가을은 딱 2주 전 아침(8/19)에 찾아왔습니다. 저같이 알레르기성 비염이 있는 사람은 습도와 기온변화에 몸이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날 아침 눈을 뜨니 공기가 달라져 있었습니다. 콧속이 건조해지고 약간의 콧물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가을의 첫날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곤 지금까지 2주 동안 나날이 풍경이 바뀌고 있습니다. 알며느리밥풀꽃, 마타리, 참취, 기름나물, 이질풀, 둥근이질풀, 모싯대, 젓가락나물, 감자개발나물, 산비장이, 쑥부쟁이 등이 피었습니다. 물론 새와 억새도 피기 시작했습니다.


2꿩의다리

<꿩의다리>


2산비장이

 <산비장이>


2이질풀

< 이질풀>


2참취

< 참취>


오늘은 2주 사이 제가 겪은 두 가지 곤충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 도토리거위벌레와 즐거운 지식


가을이 시작되고 불과 1주일 사이 숲 곳곳에 참나무 가지들이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산갈나무든, 상수리나무든, 졸참나무든 가리지 않았습니다. 도토리거위벌레 소행입니다. 뜨거운 여름 동안 도토리는 하루가 다르게 굵어갔습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앙증맞고 귀여운 도토리들이 굵어가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제 막 절정을 향해가는 시점에 이런 참사를 당한 것입니다. 참나무들에게는 시련의 시기이지만 도토리거위벌레에게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었을 겁니다. 바야흐로 향연 주간이 펼쳐진 겁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니 벌써 떨어진 참나무가지의 이파리들은 말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쯤 알에서 깨어난 도토리거위벌레 애벌레들은 열심히 싱싱한 도토리 알을 갉아먹으며 살이 오르고 있을 겁니다. 가지가 말라가는 모습을 보니 제 추측이 맞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3도토리거위벌레가 떨어뜨린 상수리나무 가지


3도토리거위벌레가 떨어뜨린 졸참나무 가지

<도토리거위벌레가 떨어뜨린 참나무 가지들>


우수수 가지가 떨어지던 날 신갈나무숲을 걸으며 저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도토리거위벌레가 도토리 안에 알을 낳고 꼭 나뭇잎이 서너 장 달린 채 가지를 잘라낼까?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토리를 감싸고 있는 나뭇잎들을 보면 우선 두 가지를 유추하게 됩니다. 하나는 신성함의 유지입니다. 도토리가 떨어져도 나뭇잎에서 공급하는 수분에 의해 조금이라도 더 신선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알에서 깬 애벌레들에게 먹기도 좋지만 영향도 더 풍부할 겁니다. 두 번째는 떨어진 잎들에 덮여 도토리가 보호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다시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가지를 힘들게 잘라 떨어뜨려야 했을까요? 나무에 매달려 있으면 도토리가 더 신선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면 우선 자신이 알을 낳은 도토리와 낳지 않은 도토리가 구분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다른 놈들이 이미 알을 낳은 도토리에 겹쳐 알을 낳을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되면 애벌레의 생존율도 낮아지겠지요. 그래서 도토리거위벌레는 알을 낳은 도토리의 가지를 잘라 땅에 떨궈 놓았을 겁니다.


도토리거위벌레가 한 개의 알을 낳기 위해 들이는 노고는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꼬박 두세 시간이 걸립니다. 최소한 가지를 자르는데 2시간, 도토리에 구멍을 뚫고 알을 낳는데 30분이 걸립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몸통보다 두꺼운 나무를 이로 갉아 자르는 겁니다. 참으로 대단하지요? 그러한 노고를 마다하지 않는 모성에 대해서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토리거위벌레는 이렇게 알을 20~30개 낳는다고 합니다. 알을 하나씩 하나씩 가장 적합한 시점과 지점에 심어놓으니 생존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렇게 떨어진 도토리 속에서 알은 5~8일면 깨어 도토리 살을 먹고 20여일 후에는 도토리 껍질을 뚫고나와 땅 속으로 들어간 뒤 월동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르면 다음 주부터는 도토리 안에서 성장한 애벌레들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그 시기가 거의 지날 무렵 사람들은 산에 도토리를 주우러 다니기 시작합니다. 도토리들이 다 익고 깍지가 벌어져 쌩쌩 부는 바람에 저절로 땅에 떨어지기 시작할 때입니다. 사람이나 다람쥐 등이 잘 마른 도토리를 주워 먹을 때는 이미 도토리거위벌레 애벌레들이 속살을 꽤 먹고 나왔거나 나올 때입니다. 당연히 도토리와 함께 숲속 짐승들에게 먹힐 확률도 줄어들겠지요.  


무심코 지나치면 아무것도 아닌 현상이지만 관찰하고 추측해보면 자연은 번번이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곤충들의 본능과 직관이 결코 인간의 지식에 뒤지지 않습니다. 수만 년 수억 년 터득한 본능과 직관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1㎝도 안 되는 벌레에 그저 놀랄 따름입니다.


숲에서 이렇게 수많은 생명이 벌이는 자연의 대향연을 무심코 지나친다는 것은 잔인한 일입니다. 자연을 아는 것이야말로 즐거운 지식이 아닐까요? 자연의 무한한 섭리를 발견하는 순간이 많아질수록 여러분은 기쁨과 더불어 내적 변화를 체험하게 될 겁니다. 자연을 만나고 자연을 안다는 것은 삶에 무한한 축복을 받는 일입니다. 많이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시간이 되는 대로 작은 것 하나하나를 만나고 발견해가면 됩니다. 저들처럼 우리도 본능과 직관이 있습니다. 더구나 이성을 이해의 수단으로 활용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 진드기


산엘 다니다보니 옷이나 몸에 진드기가 달라붙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재작년 아랫마을 할머니가 야생진드기에 물려 돌아가신 후 저도 불안해졌습니다. 비록 야생진드기에 물려도 감염되어 발병할 확률이 낮다고는 하지만, 역시 기분 좋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여름에는 꼭 팔 토시를 하고 간혹 머리를 털고 옷 주변을 검사합니다.


며칠 전에는 산길을 내려오는데 눈 옆이 간질간질 했습니다. 머리카락이 달라붙은 줄 알고 손으로 털었습니다. 그런데 머리카락이 안 떨어지고 약간 밑으로 흘러내린 것 같았습니다. 땀 때문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었거니 하며 다시 손으로 눈 밑 볼을 털었습니다. 그랬더니 머리카락이 아니고 진드기가 손에 옮겨왔습니다. 얼핏 보기에 작은소참진드기 같아 놀라 얼른 땅에 털어버렸습니다.


놀랍습니다. 제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니 온통 나무숲입니다. 높이로 보건데 이놈은 풀이 아니라 머리 위 신갈나무 가지에 있다가 제가 지나가는 걸 감지하고 제게 떨어져 내린 것 같습니다. 올해만도 서너 번 진드기가 옷에 달아 붙었던 것을 보았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생각해보세요. 진드기들은 동물들이 잘 지나다니는 숲길 나뭇가지 위에 매달려 지나가는 동물을 기다립니다. 저도 나뭇잎에 앉아 있는 놈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동물이 지나갈 때 동물에서 나는 채취를 감지하고 매달렸던 나뭇가지를 떠나 재빨리 갈아타기를 시도합니다. 일단 산길을 걷는 사람의 옷이나 머리에 달라붙으면 흡착할 수 있는 살을 찾아 기어갑니다. 진드기가 사람 몸에 떨어지는 것은 마치 달려가는 열차를 절묘하게 올라타는 것과 같을 겁니다. 그 한 순간을 위해 숲 속 진드기는 일생일대의 기다림을 견디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내막을 생각하면 피 한 방울 쯤 기꺼이 주겠습니다. 물론 생명을 감수하는 일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4작은소참진드기

<작은소참진드기>


하지만 몇 밀리미터에 불과한 작은소참진드기를 관찰하면 확실히 비호감입니다. 살을 파고들며 강하게 흡착하는 방식은 더욱더 좋은 느낌이 아닙니다. 재작년에 제 몸에 달라붙었던 작은소참진드기를 떼어 사진을 찍은 적이 있습니다. 작년에는 팔에 진드기가 달라붙은 것을 상처에 난 딱지인 줄 알고 무심코 긁다가 진드기인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놈이 피를 얼마나 먹었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피딱지처럼 붙어 있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드기의 일생일대를 건 생존전략은 역시 숭고한 느낌을 줍니다.


# 지금 여기의 삶


그러고 보니 도토리거위벌레와 진드기 모두 생존을 위해 절묘한 순간을 기다리는 곤충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기야 생명치고 생존을 위해 누군들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한계를 지닌 생명체로서 최선을 다해 생을 꽃피울 순간을 기다릴 겁니다. 지난번에 말씀 드린 왕미꾸리꽝이나 물오리나무처럼 자연에는 건성건성 게으름 피우며 사는 종이 없습니다. 모두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씨앗들이 또한 그런 존재들이 아닙니까?


한없이 게으르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나무늘보도 보세요. 독성이 있어 다른 동물들은 먹지 않은 유칼립투스 이파리를 먹는데 적응이 되어, 거의 마취당한 듯 느릿느릿 그러나 나무에 확고하게 매달려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나름 감수하고 견디며 찾아낸 생존방식인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나름대로 절묘한 방식으로 생태계 안에서 자신만의 고유좌표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태 지위를 적소(niche)라고 합니다. 자연이라는 인드라망의 그물은 이런 적소의 매듭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이 이토록 다채롭고 아름다울 겁니다. 하나라도 허투루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람은 어떨까요? 인류도 정말 최선을 다해 살아왔습니다. 두발로 걷고 도구를 사용하고 언어를 통해 생각하고 소통하며 사회를 발전시키고 인간만의 독특한 문명을 꽃피웠습니다. 그런 면에서 인류는 분명 자연 진화의 또 다른 정점입니다. 하지만 우리만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며 무지일 겁니다. 인간을 위해 자연이 존재한다는 식의 인간중심주의는 우리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그러나 반드시 극복해야 할 편견입니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명의 위기도 지나친 인간중심주의로 인해 우리가 존재에 적합한 균형감을 상실한 때문일 겁니다.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지나친 물질문명은 분명 지나침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급격한 환경파괴, 종 멸종, 지구 오염 등은 물론 AI(인공지능)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의 미래 또한 인간을 압도하는 기계문명의 위협으로 다가올지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 인류가 여기서 살아가기 위해 찾아야 할 최선은 무엇일까요? 끊어질 듯 지나치게 당겨진 문명의 현(絃)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까요?


우리 자신은 어떨까요? 한국사회는 도처에 자살이 넘칩니다. 물론 사회구조적인 원인이 큽니다. 하지만 절망을 모르는 생물들을 보며 우리들의 절망이 좀 이르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실업과 집세 폭등, 삼포 사포를 지나 오포, 칠포세대의 암울한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희망의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과연 자포자기의 패배로 끝내야할까요? 특히 이명박 박근혜 시대 이후 헬조선이 되어버린 한국사회에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분명 거대한 사회의 권력과 시스템 앞에 우리는 무력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여전히 자연의 존재입니다. 왜 자연의 생물들처럼 스스로 살아갈 힘이 없겠습니까? 우리 안에도 분명 그런 힘이 있을 겁니다. 우리도 역시 도토리거위벌레나 진드기처럼 일생일대의 노력과 기다림으로 자신의 삶을 꽃피워보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만의 새로운 길을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새로운 사람들의 새로운 대안사회와 대안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은 어떨까요? 또다른 진화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기주의의 전쟁터가 되어버린 과잉과 지나침의 사회가 아니라 균형감각을 가진 중도의 문명을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은 물론 인류의 생존을 위해 새로운 방식이 필요할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직관과 본능으로 살아가는 자연의 위대한 존재들처럼. 숲에서 저는 그러한 존재들을 목격하고 배웁니다.


이제 곧 산에는 다시 도토리와 알밤이 쏟아지기 시작할 겁니다.



심규한 화엄늪 환경감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