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곰솔

<집 앞을 차지한 250년 된 곰솔과 같이 살아온 할머니, 이제 그 어깨가 곰솔가지처럼 축 처졌다. ⓒ이동고>



지인이 어렸을 때 자주 찾았던 어촌마을이 있다 해서 같이 나섰다.
방학 때는 아예 그 집 쪽방을 한 달 이상 차지하고 마당만 나서면 붙은 바다에서 온 종일 논 모양이었다. 그 어촌 말린 미역이 좋아 선친이 자주 이 곳을 찾았고 그 인연으로 여름방학 때 이곳 또래 친구와 어울리며 많은 시간을 보냈던 모양이다.


그 집 앞을 들어서면서 깜짝 놀란 것은 아주 오래됨직한 곰솔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지는 휘휘 늘어지고 가지마다 부목을 대어 완전 처지는 것을 막았다. 가장 굵은 가지는 붉은 벽돌로 기둥처럼 받쳐 놓았다. 그 덕분에 그 긴 가지들이 만드는 그늘은 마당 입구를 다 덮고도 이웃 담을 넘을 정도로 아주 크고 넓었다.
“그 때 어르신이 지금도 계실라나?”


지인이 곰솔 이파리 하나 보이지 않는 깔끔하고 조용한 마당을 가로질러 현관문을 두드렸다.
한동안 응답이 없었으나 안에 인기척이 있는 모양이다.
잠시 후에 곰솔보다도 더 늙어버린 듯한 노인네가 “누구요?” 한다.
지인은 반가운 듯 그 당시 이야기를 꺼내며, 그 집 아들이라는 것을 상기해 내려고 하지만 이제 백발이 허연 노인은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아직 살아계신다는 데 너무 반가운 나머지 그 당시 일을 이것저것 말했지만 고개는 끄덕일 뿐 기억은 나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인네만 변한 것이 아니라 그 어린이에서 이제는 배도 약간 나온 중년의 남자를 알 턱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곰솔 앞에 제단이 있는지라 “할머니 지금도 이 나무 앞에서 동제를 모시나요?” 물었더니 ‘할배나무’는 대보름날 제를 모신다고 했다.


이 큰 곰솔을 지금까지 그 원형대로 훼손되지 않고 지켜온 것은 이 할머니 정성일 것이다.  
앞마당에 있는 곰솔은 언제나 오가며 할머니 성정처럼 정갈하게 청소했을 것이다. 바닷바람을 자주 맞아 키는 자라지 못하고 가지는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 아래로 길게 처져 있었다. 할머니 몸도 곰솔처럼 이제 허리가 굽어지고 팔다리는 힘이 있는 듯 없는 듯 달려 있었다.

 
그 가볍고 빈 몸으로 곰솔 아래에 있는 녹 깨나 슨 평상에 앉았다.
“원래 이걸 두 개를 만들었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누가 들고 간 거야 글쎄.”


하나로 세 명이 앉기에도 넉넉한데 이런 평상을 두 개 걸치고 앉았던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물질 나간 사람이 건져온 큰 물고기로 회를, 아니면 잡은 문어를 삶아 두 개를 붙인 평상을 연결해서 근처 이웃들이 모여 즐겁게 화들짝했을까?


잃어버린 평상을 아직도 기억하고 바로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평상에 그득했던 사람들, 사람 사는 것처럼 왁자지껄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은 아닐까?


할머니가 어릴 때부터도 아주 컸다는 이 곰솔은 같이 자라고, 같이 늙어버리고 외롭게 남았다. 할머니도 주말에야 겨우 자제분이 찾는 호젓하고 쓸쓸한 자리로 남아 있었다.


마을도 마찬가지다. 그 무덥던 여름철이 지나고 이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니 마을 전체가 썰렁하다. 하지만 이 나무 아래 앉으면 쓸쓸함보다는 뭔가 언제나 이 자리를 지킨 든든한 생명체에 대한 믿음이 느껴진다. 언제나 할머니 곁에 있었던 할배나무 말이다.


고된 생활에 이 나무 곁에서 눈물을 흘렸을지, 아니면 그 눈물마저도 신성스런 할배나무 앞에선 불경스런 일이라 참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할배나무는 아무튼 거대한 몸집으로 이 집안이 돌아가는 과정을 다 내려다봤을 것이다.
나이 듦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많아졌다. 이제 그럴 때도 된 것이다. 최근 그 늙음과 나이 듦에 대해 새로운 가치를 주는 문구를 발견했다.


“여자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그런 존경심을 느꼈다.
오래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도록 남겨지는 일이니까
그런 일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가야 하는 일이니까”
<쇼코의 미소> 중에서 ‘미카엘라’ / 최은영


모든 나이든 존재는 위대한 것이다. 그걸 이겨내고 지금까지 당당히 살아있으니.
할머니는 그래도 할배나무가 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비록 나이가 들어 지인이 간직한 그 즐거웠던 추억을 기억하고 있진 않아도.  


이동고 자연생태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