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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정헌 전경, 540년 고택은 한 집안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


영남알프스가 동식물의 공간이라면, 집은 사람의 거주지이다. 산이 온갖 동식물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집은 사람이 살면서 꾸미는 공간이다. 사람이 사는 집은 남고, 살지 않는 집은 무너진다. 건물 자체의 오래됨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집에 살았던가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건물보다 사람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고택에는 사람의 역사가 있다


울산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 영남알프스 천화현 밝얼산 끝자락 ‘새소리 울리는’ 명촌 마을에 있다. 540년이 넘는 고택 만정헌(晩定軒), ‘뒤늦게 이제야 정착할 곳을 찾아 지은 집’이다. 왜 늦게 정착하게 되었을까. 무슨 사연이 있음이 분명하다. 만정헌은 경주김씨 태사파 계림군후 첨지중추부사공파 김자간(金自幹)이 지은 집이다. 만년각이라 하는데, 울산문화재자료 제2호이다. 현재 19세 종손 김락기 씨(80세)가 이 집을 지키고 있다.


김자간의 조상은 경주김씨 시조(알지)의 42세손이자 경순왕의 15세손인 균(?)이다. 그는 밀직부사(왕명출납 등 담당 부책임자)로 태조 이성계를 추대한 조선 개국공신 계림군(鷄林君)이다. 균의 3남 계성은 자헌대부 이조판서(행정부장관)를 지냈고, 계성의 차남 종효는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국방자문위원)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경주부 남중림(현재의 울주군 두서면 구량리) 중리마을로 내려와 은신했다. 김종효부터 첨지중추부사공파는 시작된다. 구량에서 한성판윤(서울시장) 자리를 버리고 내려온 죽은(竹隱) 이지대(李之帶)와 마음을 나누었다. 이 씨가 당시 심은 은행나무가 지금도 있다. 종효의 외아들 자간은 성종 때 정삼품 통훈대부 언양현감 겸 경주진관 병마절제도위에 부임하면서 명촌 마을에 새 터를 잡고 집을 지었다. 언양읍지인 <헌산지>의 ‘현선생안’에는 ‘언양’ 현감 김자관의 기록은 없다. 족보는 한 집안의 뿌리를 알 수 있는 한 집안의 역사책이니, 기록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제 은거, 은둔이 아닌 정착의 시대가 된 것이다. 그때가 조선 성종 4년인 1473년이다. 지금으로부터 544년 전, 이 집의 역사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집은 살림살이에 따라 바뀐다


처음 김자간이 지은 만정헌은 사랑채인 정각(亭閣)으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신라초기 언양의 중심지인 거지화현(현재 울산운전면허시험장 주변 지화마을)과 가깝다. 1만 채의 집이 살 정도의 만당들로 부유한 지역이다. 명촌 마을 앞은 친환경 무농약 오리농법 논이 넓게 펼쳐져 있다. 예능프로그램 ‘1박 2일’ 촬영지이다. 마루에서 서서 보면 논이 한눈에 보인다. 사계절 농사 현장을 북향인 이 집에서 바라보았을 것이다. 집 뒤는 영남알프스 자락이 배경을 하고 있다.


만정헌은 그 후 영조 때 후손 김지(金志, 1666~1748)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한다. 그의 부친 차안(次顔)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받기 전에 요절하여 모친 광주 노 씨(1641~1716)에 의해 길러졌다. 노 씨는 죽을 때까지 죽은 남편을 생각하여 소복을 입고 죽을 먹으며 고기를 먹지 않고 거적자리에서 잠을 잤다. 궁핍한 가운데 외아들을 종신토록 예를 잃지 않고 훌륭하게 양육하였다. 영조 13년(1737)에 정려각을 세웠다. 원래는 명촌리에 있다가 천전리로 옮겨졌다가 다시 1988년 3월 만정헌 앞으로 옮겼다. 김지는 일찍이 무술연마에 힘쓰면서 학문에 정진, 경사를 열심히 연구하여 백가제서(百家諸書)에 능통하였다. 아버지를 여의고 열녀인 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여 그 효행이 널리 알려졌다. 1712년(숙종 38) 당숙 영하(英夏)와 함께 정몽주, 이언적, 정구를 봉안한 반고서원(盤皐書院, 훗날 반구서원) 창건에 참여하고 창건록을 지었다. 영조 23년 노인 우대로 정삼품 당상관인 통정대부 용양위 부호군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 안채는 완전 전소되고, 만정헌은 일부 전소되어 집이 무너졌다고 한다. 김지가 만정헌을 중수하면서 호인 ‘명헌(鳴軒)’을 현판으로 새로 써 붙였다. 그때가 가장 부유한 시절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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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정헌을 중수한 김지의 모친 광주 노씨 정려각과 경주김씨 세적비가 만정헌 앞에 있다.>


주춧돌과 기둥은 여전하나 집 구조는 변한다


만정헌의 창건기는 전하지 않고 있다. 1992년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1918년 2월에 중건하였다. 현재 건물의 기본 골격은 그때의 것이다. 다소 경사진 터에 기단을 6단 쌓아 올린 정면 3칸, 오른쪽 2칸, 왼쪽 3칸의 팔작지붕에 단층 홑처마 집이다. 막돌 초석에 그레질하여 세운 둥근 기둥은 싸리나무로, 기둥머리에는 장식이 없다. 조선시대에 둥근 기둥은 궁궐과 사찰에만 사용되었고 양반집은 사각기둥이 대부분이다. 이 집의 권력을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상징이다. 중건할 당시 한 칸이던 온돌방을 두 칸으로 증설하고 익공도 올렸다. 온돌방 이외는 마루청이다. 초석 중에는 원시인의 성혈(性穴)이 보인다. 어쩌면 자손이 귀한 김씨 집안의 기원을 담고 있는 것 같다. 나무는 세월을 각인하지만 돌은 변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94년 11월 기본적인 구조변경 없이 서까래 모두와 지붕 기와를 바꾸고, 기둥 3개를 교체했다. 그 무늬가 확연히 다르다. 또 2016년에 13개의 기둥을 제외하고 지붕과 마루 등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였다. 나무는 비에 젖으면 썩기 마련이다. 이런 집을 수백 년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시 익공이 6개 있었다. 익공이란, 창방에 직교하여 보를 받치는, 소의 혀(쇠서) 모양을 내고 화초 무늬를 새긴 공포의 부재이다. 모양내기보다 지붕을 높게 하기 위함이다. 벼슬한 사람의 징표라고 종손은 말한다. 새로 5개를 만들어 넣었다. 온돌방 앞 천장을 보면 마루방이었을 것이다. 집의 사당이 무너진 뒤 서쪽 벽면 위에 감실을 만들어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마루방 앞에는 새로 난간을 두어 출입하지 못하도록 했다. 자연히 신성한 공간이 되었다.


싸리나무로 기둥을 만들 수 있을까


만정헌의 싸리나무 기둥은 처음 그대로 변함없이 지붕을 떠받치고 있다. 기둥은 세월의 세례를 받아 바랜 모습이다. 그런데 빗자루를 만드는 싸리나무가 정말 기둥이 될 정도로 굵어질까. 붓다가 열반한 이후 사리 운반용 함을 싸리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쉽게 구할 수 있고 가벼워 멀리 운반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그 후 사찰에서 사리 보관함으로 느티나무나 소나무로 만들었다. 그런데 사리를 담은 나무라서 싸리나무라 불렀던 것 같다. 아무튼, 현실의 싸리나무는 ‘콩’과에 속하며 1~3센티미터 정도 자라는 낙엽성의 키 작은 활엽수이다. 실재 만정헌의 싸리나무는 식물학자에 따르면 느티나무라고 한다. 싸리나무로 만들었다는 사찰의 기둥이나 구시는 대부분 느티나무이다. 목재의 색깔이 아름다운 황갈색이고 나무 테가 선명하고 무늬도 매우 아름답다. 견고하고 변형도 잘 일어나지 않고 잘 썩지도 않고 가공도 잘 되는 우리나라 제일의 재목이다. 앞의 기둥 하나는 아랫부분을 일부 잘라 감나무를 덧대어 보수하였다. 고택 나무 기둥의 가장 큰 적은 흰개미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다면 흰개미의 공격보다 더 빨리 집은 무너질 것이다.


집은 사람이 살기에 존재한다


만정헌 건물 뒤에는 굴뚝이 있다. 담장 높이보다, 지붕보다 낮다. 굴뚝의 연기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낮음은 동네 사람들에게 겸손함을 보이고 자기를 과시하지 않으려는 바람의 표현이다. 양반 기와집은 장작을 사용해서 굴뚝이 낮다. 초가집은 나무 삭정이나 검불을 주로 때기 때문에 불똥이 굴뚝을 통해 날아 불이 날 수 있기에 지붕보다 높고, 돌로 쌓은 경우는 집에서 떨어져 세운다. 모든 것은 이유가 있다.


만정헌 앞은 잔디마당이다. 잔디를 보면 집에 대한 애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만정송 소나무가 식재된 공간 주변에 철쭉이 들어서고 수목이 우거지고 있다. 건물 뒤는 담장이 있지만, 서쪽에는 안채로 들어갈 수 있게 뚫려있다. 북향인 안채는 꽤 마당이 넓다. 김락기 씨의 아버지가 직접 지은 집이라 한다. 집이 낡아 2004년 전면적으로 보수하여 현대식으로 만들어 자식들이 쉬며 놀다 갈 수 있도록 원룸식으로 공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마당을 보면 집터가 꽤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향한 아래채는 4칸 건물로 부인 이진순(李辰順) 씨가 주로 거처한다.


현재 19대손 김락기 씨가 지난 2004년 서울에서 내려온 후 첨지중추부사공파 명촌 종택을 지키고 있다. 처음 집이 앉았던 자리와 뒷산까지 포함하면 전체 면적이 4만5천여 평이었단다. 아마도 집 대문 앞의 방장형 연못도 이 집의 일부였을 것이다. 연못의 둥근 섬은 성리학적인 우주관인 천원지방(天圓之方)의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어릴 때 연못 가운데 1백여 년이 넘은 소나무가 자라고 연못에서 고기를 잡기도 했단다. 1979년 태풍으로 산사태가 나서 연못이 메워져 지금처럼 작아졌다고 한다. 복원을 계획 중인데 물줄기가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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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리나무 기둥과 주춧돌의 성혈, 그리고 보수한 마루청 나무는 집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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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정헌을 중수하고 김지는 현판 ‘명헌’을 달았다.>


천 년 동안 사람 사는 집을 꿈꾼다


김락기 씨는 이 집이 천 년 동안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제 겨우 절반 지났을 뿐이다. 540여 년의 세월을 버틴 힘은 바로 사람이 살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고택이 오래된 집이란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1500세대의 사람이 이 집을 거쳐 갔다. 지금도 문중 사람 5천여 명이 이 집을 바라보고 있기에 이 집은 여전히 굳건히 서 있는 것이다.


만정헌과 인연을 맺은 몇 사람을 적어보자. 임진왜란 당시 언양 지역 의병장으로 활동한 김반수(1570~1627)는 언양 작궤천 ‘선무원종공신마애석각’과 추모비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다. 범서읍 곡연으로 입향한 김경(1683~1747)은 그곳에 관서정을 세웠고, 자호재(自好齋) 김휘조(1740~1809)는 ‘언양 군자’로 불렸고, 부친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시게 한 효자 김백련(1789~1850)이 있다. 14세손인 천석꾼 김찬희는 가객들에게 베푼 덕이 있어 살았던 등억에 공덕비가 있다. 그는 양정학원과 언양중학교 건축에 기부했던 자선가였다. 1919년 4월 2일 언양시장만세시위 운동으로 형고를 당한 애국지사 김정원(1880~1952), 김경수(1892~1967), 김정욱(1884~1946)이 있다. 김락기 씨의 부친 만성(晩醒) 김지환(1917~1992)은 이갑종 등과 상북학원(현 경의고)을 설립하였고, 초대 상북면의회 의원, 14대 상북면장, 16대 언양면장, 울산군 교육위원을 역임했다. 그는 작궤천 선무원종공신 추모비문을 지었고, 간월사지의 삼성각 현판을 썼다.


고택은 한 집안의 역사책이다


박제화된 고택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집이 의미가 있다. 사람 없는 집. 빈집은 금방 빠르게 낡고 허름해지고 무너진다. 사람이 부재하면 사람의 온기, 체취가 사라진다. 집의 주체는 사람이다. 사람이 없는 집은 허허롭다. 비록 담장에 돌 하나둘 빠져도 무너지지 않는 것은 사람의 손길이 있기 때문이다. 나무 기둥은 점점 빛바래가지만, 주춧돌은 여전하다. 윤기가 나는 마루, 장독이 있는 집은 나무가 썩어 무너지지 않는 한 버틴다. 만헌정 온돌방에는 책이나 컴퓨터가 있다. 삶이 있다는 증거다.


고택은 그 자체가 살아있는 역사요, 철학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생활의 집이자 의식의 터전이다. 고유한 생활방식과 전통문화가 담겨있는 것이다. 하지만 집이 아닌 그곳에 살았던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 하지만 집이 없다면 기억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고택이 보존되어야 할 이유이다.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