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관문성

< 관문성 ⓒ문화재청>


08관문성_일부복원된성벽

<일부 복원된 관문성 ⓒ문화재청>


우리나라 수도인 서울로 출입하는 외국인들은 인천을 거쳐야만 한다. 인천은 서울의 관문이자 외항이다. 천년을 신라의 수도로서 기능한 경주에도 오늘날 인천과 같은 역할을 했던 지역이 울산이다. 신라 선덕여왕에게 황룡사 9층 목탑 건립을 건의하기 위해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자장법사는 울산으로 배를 타고 들어와 경주로 향했다. 눌지왕의 명을 받고 일본에 인질로 가있던 미사흔을 구출하기 위해 박제상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난 곳도 울산이다. 이처럼 울산은 신라시대 중국, 일본과의 외교와 교역에 있어서 경주의 관문 역할을 하였다.


이 같은 울산의 입지적 조건은 한편으로는 외부에서 신라를 침입하는 주요 침입 경로로 이용되었다. 울산에서 경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고, 수도를 출입하는 사람들을 통제했던 곳이 관문성이다. 만약 왕래하는 사람들이 관문성을 불법적으로 통과하거나, 성이 없는 곳으로 밀입성하면 색출하여 엄벌에 처해졌다.


이 같은 관문성이 축조된 것은 722년이니 지금부터 1300년 전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관문성의 축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모벌군에 성을 축조하여 왜적의 길목을 막았다. (三國史記 卷第八 新羅本紀 第八)

개원(開元) 10년 임술(壬戌, 722) 10월에 처음으로 모화군(毛火郡)에 관문(闕門)을 쌓았다. 지금의 모화촌(毛火村)으로 경주의 동남지역에 속하니, 곧 일본을 방어하는 요새였다. 둘레는 6천 7백 92보(步) 5척(尺)이고, 동원된 역부(役徒)는 3만 9천 2백 62명이며, 감독관은 원진(元眞) 각간(角干)이었다.(三國遺事 卷第二 孝成王 紀異 第二)

위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통일신라 시대인 성덕왕 21년(722)에 각간(角干) 원진(元眞)이 3만9262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관문성을 쌓았는데 길이가 6792보 5척(약 12km)이라고 하였다.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 모벌관문이었으나 조선시대에 관문성이라 했으며, 만리성이라고도 불리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들은 산성이나 읍성 형태로 산의 중심부나 지역의 중심지를 원형으로 빙 둘러싸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에 비해 관문성은 중국의 만리장성처럼 몇 개의 산을 연결하면서 길게 뻗어있다. 이 성은 울산과 경주 경계선을 따라 이어지고 있다. 치술령-범서읍 두산지-성저마을-천마산-순금사-동천강-효청보건고등학교(구 태화고등학교)-삼태봉으로 이어지는 12km에 걸친 긴 성이다.


7번국도 울산과 경주 경계지점에 있는 다보탑 옆으로 잘 다듬어진 성벽이 보인다. 이것이 관문성이기는 하지만 최근에 축조된 것이다. 1300년 전에 축성된 옛 성벽의 모습은 치술령 중턱, 천마산 그리고 삼태봉 오르는 등산로 등 곳곳에 조금씩 남아있다. 또한 중구 다운동, 척과리를 거쳐 모화로 가는 도로에서 울산과 경주의 행정 경계 지점에서도 무너져가는 성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것 역시 관문성의 흔적이다. 이곳은 마을 이름도 울산 쪽은 두산리 과문(관문) 마을이고, 경주 쪽은 외동읍 성저(성밑) 마을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경주와 울산을 구분하고 연결시켜 주던 통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울산과 경주의 행정구역을 구분하고 주요 교통로로 사용되는 모습에서 길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에 놀라움을 느낀다.


김문술 전 울산역사교사모임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