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영화 하나를 보았다. 마음 따뜻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거니... 관절염을 앓았던 캐나다 여성 민속화가의 실제 삶을 다룬 영화였다. 영화라서 일부의 허구와 과장이 있었겠지만, 보는 내내 가부장적이고 폭압적인 사회구조와 남녀관계는 그녀의 예술세계와 사랑 이야기를 뒤덮을 만큼 보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였다. 이런 영화를 보면 실제 그 시간, 그 곳이 궁금해지는 것은 나만이 아니겠지? 1900년대 초 캐나다에서 장애인 여성를 대하는 사회적 인식과 태도의 일부를 엿보며 우리네 조선시대의 여성의 삶이 오버랩되었다.


때는 1865년 울산의 어느 양반가, 어린 어미가 어린 아기를 낳았다. 어미의 나이 불과 16세, 그 아비 55세, 조혼의 풍습으로 12세 시집온 이 어미의 첫 번째 출산이다. 대대로 아들이 귀한 이 집안에서는 어린신부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아비는 이렇다 할 직업이 없는데 어릴 적에 앓은 열병으로 귀가 들리지 않는다. 어미는 경상북도 어느 산골의 가난한 양반가의 딸로 몇 마지기 땅을 친정에 안기고 이곳으로 시집을 오게 되었다.


태어난 아기는 기대를 저버리고 딸이었다. 앞으로 그녀가 감내해야할 몇 번의 출산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아기는 집안의 무관심속에서 근근이 유아기를 견뎌내고 드디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랑 사이를 아장걸음 잘 걷는다하여 “이랑”으로 불려졌다. 그러던 이랑이가 이제는 제법 바로 걸을 나이가 되었음에도 뒤뚱뒤뚱 걷는데... 그 모습이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다. 집안의 어른들은 무심한 듯 못 본 척 없는 듯하였고, 어린 어미만 애타 의원에 보이니, 의원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랑은 아파하지 않는 날이 손꼽을 정도였고, 방에 들어 앉아 그림을 그리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일찍이 국가에서는 ‘환과고독’(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 없는 노인)에 대한 예우와 같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지원 제도가 있었다. 가족이나 마을에서 돌보지 못하는 장애인을 위하여 “명통사”를 두어 거처하게도 하였고, 장애에 따라 그에 맞는 직역과 직책을 부여하였다. 일부 장애인 중에는 높은 관직에 오른 이도 있었으니, 복지국가까지는 아니어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전통사회 나름의 제도와 기회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부장 사회 안에서 사회적 주체로서 활동하지 못한 여성, 게다가 장애까지 있었다면 이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어린 이랑이는 숨죽이며 사는 법을 배웠다. 사랑받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애초 그것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으므로... 십오 세가 될 무렵 혼담이 오갔다. 양반가의 규수이기는 하나 어리다는 그 가치 하나뿐이었다. 그 어미와는 반대로 몇 마지기의 땅을 가지고 시집을 갔다. 혼례를 치르던 첫날부터 이 남편이란 자는 시름시름 앓더니 한 달이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 한 달 만에 과부가 된 이랑이... 어느 곳에서도 사랑받지 못 하더니, 시집 와서도 별반차이가 없거늘, 최근 들어 야밤에 매파가 집에 자주 드나드는 게 목격된다. 그러고는 어느 날 밤, 시부모가 이랑이를 불러 말하길...


아들은 어릴적부터 많이 아팠는데... 세상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아 총각귀신으로 떠나는 것이 애처로워 이 혼사를 치렀다는 것이고, 이랑이에게는 제2의 삶을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최소한의 인간된 도리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부의 재가는 엄연히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보쌈이란 형태를 빌어 행하고자하며, 이랑이의 그림을 오랫동안 흠모해왔던 무역상이 그 대상이란 것이다.


이랑은 고민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이랑은 이제껏 보지 못한 커다란 보자기에 싸여 담을 넘는다. 그 보자기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보드라운 비단마냥 포근한 것이었다. 어릴 적 강포가 아련히 떠올랐다.(이 이야기는 허구입니다.)
의료술이 부족했던 전근대사회에서 장애인은 분명 지금과 달리 인구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작은 열병 하나에도 어린 아가들은 쉽게 세상을 떠나고, 일상적인 위생상태 하나만으로도 평생의 건강을 앗아가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세상의 살아남은 아름다운 것이란 귀한 것이었다. 조선사회가 장애인을 위한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단 것도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현실적으로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대책이었을 것이다. 모든 제도는 유교적 이념에 의해 정비되었고 그로 인해 실제 생활에선 그 제도를 고치기보다는 현실적인 모색을 통해 그 왕조는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500년간 유지되었다. 


윤지현 전문 기록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