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을 오른다. 늘 다니던 산책길 초입에 나무와 나무 기둥을 연결한 기다란 현수막이 일렁인다. 친절하게 숲가꾸기 사업을 알리는 문구가 적혀 있는 것을 보면서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간다. 해마다 가을이면 노란단풍을 자랑하던 때죽나무 자리는 휑하니 비어 있다. 다람쥐가 빼꼼히 머리를 내밀던 덤불의 자취도 온데간데없다. 숲에서 흘러나오는 소나무 향기는 유난히 짙다. 평소 느끼던 솔향기와는 사뭇 다르다. 산을 오르내리며 자주 맡았던 나무향기는 은은하며 중후한 사군자 같은 향기였다면 이 향기는 서늘하면서도 습한 기운이 서려있다. 나무의 울음냄새가 있다면 이와 같을 것이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숲을 들었다 놓았다 하고 있다. 어린 소나무, 도토리가 익어가던 갈참나무, 봄을 알리던 진달래나무 등등 대체로 여리고 연약한 나무들이 벌채되고 있다. 방금 전 자신들과 어울려 햇살을 즐기며 바람에게 몸을 내맡기던 나무들이 옆에서 앞에서 뒤에서 쓰러지는 것을 바라보던 소나무들, 이 나무들은 벌채 대상에서 운 좋게 살아난 선택된 소나무들이다. 벌채의 대상에 포함되었다 벗어났을 그 악몽 같은 순간에서 놓여난 것을 기뻐하며 안도하고 있거나 또는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는 나무의 생태를 슬퍼하고 있을 것만 같다.


나뭇가지를 요리저리 오르내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귀엽게 꼬리를 흔들던 청설모나 담비도 보이지 않는다. 새들의 지저귐도 많이 줄어들었다. 늘상 눈에 띄던 생물들이 줄어든 만큼 이 숲에서 몸을 숨기고 살아가던 생물들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어느 날 산책길에서 만났던 꽃뱀, 살모사, 산개구리 등등은 모두 어디로 떠났을까. 그들도 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야 할 텐데 그들이 감당하기에 너무 무거운 환경이다. 이 파괴된 환경은 누구에 의해 선택되었나.


인간의 개입에 의해서 진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숲. ‘자연 환경에 적합한 생명체만 살아남는다’는 다윈의 ‘자연선택설’이 떠오른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이므로 인간에 의한 숲의 진보와 발전은 당연한 이치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숲에서 일어나는 선택들은 너무나 끔찍한 잔해를 남긴다. 19세기 제국주의자들은 다윈의 ‘자연선택설’의 영향을 받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 중 적자생존을 앞세우며 식민지를 찾아다녔다. 그러다가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꿈 많던 젊은이들을 희생시켰다. 이곳에서 희생되고 있는 나무들이 제국주의자들이 선택한 환경에 놓여야 했던 수많은 젊은이들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치에 맞지 않는 어불성설이 될 테지만 말이다.


숲가꾸기는 숲을 잘 보존하기 위해 숲의 생태를 원형 그대로 보존할 것인가 인간의 적극적인 간섭으로 숲을 더 우량하게 보전할 것인가 하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그 사이에 나무가 서 있는 것이다. 스스로 숲의 장래를 위해 희생을 선택할 수도 없고, 인간과 숲이 공존하고자 인간이 행하는 선택을 완전히 거부할 수도 없는 나무들, 인간의 판단에 의해서 제거의 대상으로 선택을 당하는 입장에서 저들은 나무의 짙은 생내음을 풍긴다.


나무파쇄기에서 벌채된 나무들이 종이처럼 잘려서 쏟아진다. 나뭇가지, 잎사귀, 가는 기둥, 뿌리 등등. 이제는 모두 다른 나무들을 위한 거름이 되어 이 숲에 다시 뿌려져야 한다. 보다 더 나은 숲이라는 공동체를 위한 거룩한 희생이다. 우리네 삶도 나무들의 삶과 마찬가지이다. 각자 개인 개인의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거대한 사회 전체를 보면 누구는 선택되고 누구는 선택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더 나은 쪽으로 선택되려고 선택하려고 아웅다웅 살아간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의 희생이 뒤따른다. 고맙다거나 감사함을 느낄 틈도 없이 사회는 진화되어 간다. 숲을 덮고 있는 나무의 냄새가 짙은 슬픔으로 다가온다.


조숙향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