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서평

뉴딜시대를 기점으로 미국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자유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개입을 최소화 했던 국가가 실물경제의 한 축으로 당당하게 등장하게 되었고, 사유재산권의 보호를 우선하며 노동자에 적대적이던 노동정책은 와그너법의 등장과 함께 그 균형추가 노동자 쪽으로 이동하였다. 이 시대는 20세기 초반까지 누적되어온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대화되고 그 모순이 대공황이라는 이름으로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이전과는 다른 근본적인 변화를 필요로 하던 시대였다.
본문 내용 중 후버 시절과 루즈벨트 시절을 나누어 비교한 부분은 그런 면에서 내게 흥미로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후버에 대한 당시 호프스태터의 분석이었다.


“효율성, 기업, 기회, 개인주의, 실질적 자유방임주의, 개인의 성공, 물질적 행복 등 후버가 믿었던 것은 모두 미국을 지배하던 전통이다...(중략)...1929년 이후 아주 많은 사람들이 후버를 혐오스럽고 우스꽝스럽게 여겼지만, 바로 그 똑같은 가치가 멀리는 19세기, 가깝게는 1920년대까지도 미국인 대다수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왔다.”


뉴딜 정책이 시행되기 이전 후버의 현실을 파악하지 못한 근거 없는 낙관론은 꽤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한편 흥미롭게 느껴졌는데, 그것은 후버가 숭상하던 그 가치들이 비웃음 받아 마땅한 얼토당토않은 가치가 아니라 어느 시점까지는 모두가 선(善)이라 믿고 있던 것일 뿐 아니라 심지어 지금까지도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가치라는 사실이 조금은 서글퍼서였다.


뉴딜시대를 전후로 치열하게 이루어지던 이 논쟁들은 실제로도 시대와 장소를 달리하여, 미국 자본주의의 심장부인 월 스트리트에서는 “Occupy Wall Street(월 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운동으로, 대한민국에서는 무상급식 등 다양한 복지관련 논쟁으로 여전히 진행 중이다.


효율(efficiency)이냐 효과(effectiveness)냐, 이윤(profit)이냐 사람(people)이냐. 경영학의 해묵은 논쟁은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변주되어 나타나는데 이러한 논쟁의 결론은 항상 그 중간 어디쯤이 최적화된 조합일 것이다 정도로 날 수밖에 없기에 (누가 정답을 알겠는가), 시대의 조류 한 가운데서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다 보면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후버”가 되어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고장 난 라디오 같은 소리만 떠들 수밖에 없는 바, 이 책의 첫 번째 효용은-당시 시대를 살았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통해 나의 현재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것-바로 그곳에서 나온다.


두 번째 효용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가 몰랐던 뉴딜 정책의 숨은 주역에 대한 이야기들, 아니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애써 굳이 끄집어 내려고는 하지 않았던 그 움직임들을 객관적인 사료로 목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뉴딜정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루즈벨트 대통령 혼자만의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다. 대공황 이전까지 누적되어온 자본주의의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목소리들이 각계각층에서 꾸준히 등장했고, 실업자, 노동자, 흑인 등 다양한 계층과 배경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그룹을 조직해서 함께 기본소득의 보장 및 작업환경 개선에 대해 목소리를 내었다. 이전까지 그러한 주장들은 사유재산권 보호 등 기본적인 시민법의 원칙에 따라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대공황이라는 인류역사상 초유의 상황은 이와 같은 원칙을 주장하기에는 너무나 급박한 상황이었고, 거리의 넘쳐나는 실업자와 굶어 죽어가는 그들의 가족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에서 너무나 한가한 대처였다. 일단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할 것이 아닌가.


당시 전면에 등장했던 인위적인 경기부양정책과 함께 국가가 필요로 했던 것은 가족이라는 경제단위의 유지 및 가정 내에서 유휴인력에 대한 재생산(reproduction)을 통해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었다. 이를 기본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뉴딜정책의 성공은 장담할 수가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국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가정에서의 여성의 역할, 특히 엄마의 역할에 대해서 통제하려 했고 여성들이 가정 내에서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동시에 펼쳤다. 


이와 같은 재생산 활동들은 경제적인 가치로 환산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분명 필요하고, 그래서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지만, 해도 티도 나지 않고, 공도 돌아오지 않는 그런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가사노동, 아이를 양육하는 것, 장애인.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보살피는 일들, 모두 전통적으로 여성의 영역이라 여겨지던 일이다.
이 시기에 국가는 여성들에게 가사일의 ‘전문가’가 되길 장려했으며 전문강사를 양성하여 이를 전문적으로 외부에서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까지 했다. 또한 가장 1인의 경제력으로만 유지되던 가정경제가 실업과 함께 파탄이 나면서 여성들은 용돈벌이 노동자(pin-money worker)로서도 사회에 전면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공장주와 정부를 대상으로 투쟁하는 남편들을 위해 상상 이상으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투쟁 중 하나였던 플린트 GM 공장 점거사태를 보면 그 활약상은 실로 감동적일 정도이다.


당시 여성들은 별도의 조직을 꾸려서 거의 군대와 같은 조직구조를 가지고 (사령관도 있었다), 일사불란하게 피켓라인을 구축하고, 파업에 참여한 어머니들을 위해 어린이집을 운영하는가 하면, 식량과 돈을 모아 파업을 지원하고, 남편들의 파업으로 심신이 지쳐있는 여성들을 만나 격려하며 결집을 유도하였다. 또한 세계 여성의 날 시위를 가장하여 경찰의 주의를 따돌려 밖에서 창문을 깨뜨려 공장 안 사람들이 최루가스에 질식되는 것을 막는가 하면, 자체적으로 의료지원 조직을 꾸려 운영하기까지 하는 등 거의 군대 수준의 지휘체계를 가지고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파업에 참여하였다.
당시 참여했던 한 여성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처음으로 확고한 목표가 생겼다. 여성이라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사고할 권리를 가진 한 명의 인간이 되고 싶다.”


대공황이라는 초유의 상황에서 여성들은 주변인이길 거부하고 당당히 당사자성을 주장하였다. 집 밖으로 나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였고, 동시에 가정의 관리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이렇게 말하면 당시 여성들이 지금 대한민국의 흔한 워킹맘들처럼 “슈퍼우먼”이었던 것처럼 생각되겠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은 여성들이 가사노동의 부담에서 어느 정도는 해방되었기에 가능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20세기 초반 각종 기술의 발달로 각종 가정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문명의 이기들이 등장하였고 이와 같은 배경이 있었기에 여성들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가 가능했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 진행된 투쟁들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여성들의 가사노동이 증가되지 않도록 하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용감한 여성들의 조직된 행동은 그녀들을 집밖으로 끌어내어 당당하게 한 인간으로서의 자아와 마주하게 해주었다. 가장들의 실업상태가 장기화되면서 푼돈이라도 벌고자 사회로 나온 여성들의 수는 각종 불합리한 차별에도 꾸준히 증가하였으며, 화이트칼라 여성들의 숫자 또한 함께 증가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변화는 많은 보수주의자들의 우려와는 달리 가정을 붕괴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가정을 유지하고 가정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지적 역시 흥미롭다.
이 책은 분명 소설책이나 실용서처럼 술술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우리의 현실과 대입해서 보게 만드는 생생함이 있다. 이상하게 자꾸 받아 적고 싶고 줄 쳐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말해주고 싶은 내용이 의외의 곳에 곳곳에 포진되어 있어 흥미롭다.


어디든 너무 한 쪽으로 쏠리면 그 반동으로 반대쪽으로 추가 이동하게 되어있다. 자본과 물질과 효율이 지배하던 사회, 그래서 그 모순이 폭발했던 시기에 그 한 축을 담당했던 주체가 바로 여성들이자 엄마들이었다는 점은 그래서 더더욱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단순히 저자의 직관에 의한 주장이 아니라 각종 사료와 객관적인 자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기에 이 책의 건조한 문체는 오히려 더 힘을 가진다.


이민경 공인노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