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취재: 반구대 호랑이의 원류를 찾아서
1. 반구대 호랑이의 비밀
2. 사라진 호랑이, 어디로 갔나
3. 연해주 표범의 땅을 가다
4. 라조 호랑이 숲의 지배자
5. 생태 보고 시호테알린
6. 버려진 땅 한흥동 옛 한인 마을
7. 연해주 원주민과 호랑이의 상생
8.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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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표범. ⓒ이종호 기자


연해주로 쫓겨 간 조선 범


남한에서 마지막 잡힌 야생 표범은 1970년 3월 4일 경남 함안군 여항면 내곡리 뒷산에서 잡힌 수표범이다. 경향신문 1970년 3월 6일자 기사에는 포수 설욱종 씨 등 세 명이 노루 사냥을 갔다가 범 발자국을 발견하고 해발 700미터 산속 소나무숲에서 총을 쏘아 이 표범을 잡았다고 쓰여 있다. 기사에 따르면 당시 잡힌 표범은 머리에서 꼬리까지 길이가 1미터 60센티미터, 무게 51.5킬로그램(14관)이었다. 신문에는 죽은 채 사지를 뻗고 애처롭게 축 늘어져 있는 표범 사진도 함께 실렸다. “총에 맞은 표범은 2미터나 치솟으며 산이 떠나갈 듯 소리치다가 일제사격을 받아 끝내 쓰러졌다.”는 목격담도 적혀 있다. 여항산 수표범의 이 마지막 포효를 끝으로 한반도 남쪽에서 더 이상 표범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됐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 중남부에서 먼저 사라진 호랑이에 이어 해방 뒤 1970년까지 한반도 남쪽 산악지대에서 사람 눈을 피해 끈질기게 목숨을 이어가던 은둔의 제왕 여항산 표범도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15~17세기 야생의 조선은 4000~6000마리나 되는 호랑이와 표범이 득시글거리는 범의 나라였다. 호환을 막기 위한 착호군과 거듭된 우역(돌림병)으로 18세기 이후 조선 범은 급감했다. 일제강점기 해수구제 정책은 한반도에 그나마 남아 있던 100여 마리의 호랑이와 표범을 멸절시켰다. 조선 범들은 백두대간을 따라 장백산맥 너머 중국 북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시호테알린 산맥으로 쫓겨 갔다.


조선 범(한국호랑이와 한국표범)은 연해주 타이가 숲과 러시아-중국 국경지대에 아무르호랑이와 아무르표범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았다. 야생 호랑이와 표범이 살기 좋은 원시 자연이 연해주와 중-러 국경 지대에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조선 범은 기적처럼 멸종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연해주에는 100년 넘게 사람의 출입을 통제하고 자연 그대로 보호해온 원시 숲이 자연보호구(자포베드닉)라는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다. 심각한 멸종위기에 몰려 있던 아무르표범(한국표범, 극동표범)은 연해주에서 가장 오래된 케드로바야 파드 자연보호구 일대에서 살아남아 개체수가 70여 마리로 늘었다.


표범의 땅 국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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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연해주 표범의 땅 국립공원. 주황색으로 표시된 곳이 케드로바야 자연보호구다. 자연보호구는 엄격하게 사람의 출입이 통제되고 수렵, 어로, 채취, 벌목 등 일체의 인간 활동이 금지된다. 표범의 땅 국립공원은 연구 목적으로만 출입할 수 있는 곳, 관광과 레저가 허용된 곳, 버섯이나 약초를 채취할 수 있는 곳 등 구역별로 등급을 나눠 관리하고 있다. ©러시아 표범의 땅 국립공원


2012년 4월 러시아 정부는 야생 표범을 보호하기 위해 연해주 남서부 케드로바야 자연보호구와 바르소니 연방야생동물보호구, 보리소브코 고원지역 야생동물보호구를 통합하고 표범이 주로 살고 있는 중국 접경지역을 더해 ‘표범의 땅 국립공원’을 설립했다. 26만1868헥타르(2620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표범의 땅 국립공원은 러시아에서 야생 아무르표범 단 한 종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된 유일한 국립공원이다.


1950년대 러-중 국경지대에 살아남은 야생 아무르표범은 서른 마리밖에 없었다. 위급한 멸종 위기에서 야생 표범을 구출하기 위해 러시아(소련) 정부는 1956년 아무르표범 수렵을 전면 금지시켰다. 소련 정부와 전세계 동물보호단체들의 노력으로 아무르표범은 완전 멸종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개체 수는 여전히 위태로울 만큼 적었다. 1980년대 말 소련이 붕괴되면서 밀렵이 다시 늘어나자 러시아 정부는 1995년 ‘연해주 및 하바로브스크주의 멸종위협에 직면한 아무르호랑이 및 희귀동식물 보호법’을 제정했다. 1998년에는 ‘아무르표범 보호 전략’이 승인됐다. 러시아 정부의 이런 노력에도 2007년 이 지역 아무르표범은 27~34마리로 조사됐다. 위태위태한 숫자였다. 러시아 정부는 2012년 부총리 주도로 천연자원부, 농림부, 연해주정부가 따로 관리하던 연해주 남서부 세 개 보호구를 통합해 표범의 땅 국립공원을 지정했다. 표범의 숫자는 2015년 50여 마리, 올해 70여 마리로 늘었다. 국경을 넘어 중국을 오가는 표범을 합하면 숫자는 80여 마리 남짓 된다.


표범의 땅 국립공원은 케드로바야 자연보호구처럼 허가받은 사람 외에 모든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는 곳과 연구 목적으로만 출입할 수 있는 지역, 관광과 레저가 허용되는 구역, 주민들이 가축을 먹이든지 버섯이나 약초를 채집할 수 있는 영역 등으로 등급을 나눠 엄격히 관리한다.


케드로바야 자연보호구


1916년 설립된 케드로바야 자연보호구는 가장 엄격하게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무단침입자는 자연보호구 숲을 지키는 경찰인 산지기(레인저)들이 현장에서 체포한다. 산지기들은 밀렵자나 도주자를 향해 발포할 수 있고 체포된 사람을 취조하거나 기소할 권리가 있다. 러시아 정부의 이런 강력한 보호 정책 덕분에 한반도에서 쫓겨 간 조선 범들은 완전 멸종의 위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1만8044헥타르에 이르는 케드로바야 자연보호구는 잣을 뜻하는 러시아 말 ‘케드르’에서 알 수 있듯이 숲 전체에서 잣나무 밀도가 높았다. 하지만 19세기 말 20세기 초 늘어난 인구와 벌목 때문에 잣나무 숲이 줄어들었다. 지금은 굴참나무가 숲의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케드로바야 자연보호구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를 이루고 있다. 숲 안개의 영향으로 기후가 독특하고 식생대가 다양하다. 북쪽으로 소나무, 잣나무, 오미자나무, 피나무를 비롯해 가래나무, 물푸레나무, 단풍나무, 황백나무, 느릅나무, 가문비나무, 자작나무, 돌자작나무, 흑자작나무, 전나무, 만주고로쇠, 쉬땅나무, 신갈나무 등이 울창하다. 표범의 땅 관리사무소 율리아 연구원에 따르면 나무는 관목을 포함해 활엽수와 침엽수가 940종에 이른다. 버섯도 1914종이 발견됐고, 251종의 이끼류와 283종의 민물 수초가 숲 생태계를 풍부하게 하고 있다. 아무르표범을 비롯해 아무르호랑이, 불곰과 반달곰, 멧돼지, 대륙사슴, 노루, 사향노루, 산양, 수달도 살고 있다. 민물고기도 12종에 이르고 도마뱀도 일곱 종이 서식한다.


1916년 제정러시아 시대에 설립된 케드로바야 자연보호구는 1935년 과학아카데미가 관할하면서 자연보호 개념을 들여오고 학술연구가 시작됐다. 동물 연구는 1975년부터 본격화됐다. 극동표범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빅토르 그리고리위치는 1991년 케드로바야 자연보호구 총책임자로 임명돼 10년 동안 일했다. 빅토르는 사직 뒤에도 케드로바야 자연보호구를 유네스코(세계자연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병상에서 서류를 준비했다. 2004년 유네스코 등재를 마치고 6개월 뒤 빅토르는 숨을 거뒀다. 빅토르의 무덤은 그의 유언대로 케드로바야 자연보호구 들머리에 세워졌다. 죽어서도 그는 아무르표범의 수호자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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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드로바야 자연보호구 옛 관리사무소에 있는 1974~1975년 연감. 눈 위에 찍힌 표범 발자국과 나무 위로 몸을 피한 새끼 표범 사진. ⓒ이종호 기자


케드로바야 숲 탐방로 입구에는 옛 관리사무소 건물이 있다. 지난 8월 말 케드로바야 자연보호구를 방문했을 때 건물 앞마당에는 보라색 쑥부쟁이가 한창이었다. 율리아 연구원이 잠긴 문을 열고 사무실 한켠 서류함에서 1974~1975년 연감을 꺼내 보여줬다. 눈 위에 찍힌 선명한 표범 발자국과 나무 위로 몸을 피한 귀여운 새끼 표범의 흑백 사진이 눈길을 끈다. 해마다 작성된 연감들이 케드로바야 자연보호구의 식물과 동물, 연구자와 산지기들의 수십 년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낡은 책장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잣나무 협곡을 가다


8월 30일 오후 1시 30분, 안내를 맡은 표범의 땅 국립공원 연구원 율리아와 알리오나, 산지기 유리, 세르게이와 함께 사람의 출입을 엄격하게 막고 있는 케드로바야 자연보호구의 협곡 속으로 들어갔다. 몇 달 전 수해로 숲 입구 다리가 쓸려 내려가 임시로 만든 출렁다리로 개울을 건넜다. 숲 가운데로 곧게 길이 나 있다. 연구원과 산지기, 허가받은 탐방객들이 걷는 길이고, 표범과 호랑이, 멧돼지와 사슴, 노루가 다니는 길이다. 사람과 동물이 함께 이용하는 이 길은 19세기에는 연해주 서남단 하산을 잇는 우편도로였다. 하산에서 두만강을 건너면 북한 선봉, 나진으로 이어지고, 서쪽 국경을 넘으면 중국 길림성 훈춘시 방천이 나온다.


앞서 가던 산지기 유리가 길가에 찍힌 동물 발자국을 가리키며 방금 전 멧돼지가 지나갔다고 말했다. 몇 주 전 호랑이가 앉아 있던 흔적도 남아 있다. 소금이 용출돼 염분이 많은 늪지에는 초식동물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다. 곰이 목청을 캐 먹고 수피를 파헤쳐놓은 아름드리 나무는 상처를 드러낸 채 묵묵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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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드로바야 자연보호구 안에 있는 늪지. 소금이 용출돼 사슴, 노루 같은 초식동물들이 염분을 보충하기 위해 자주 찾는다. ⓒ이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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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이 목청을 파헤쳐놓은 자리. ⓒ이종호 기자


뿌리째 쓰러진 커다란 나무들을 다리 삼아 개울을 몇 군데 건너고 숲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숨어서 표범과 호랑이를 촬영할 수 있는 관찰대(리바스)가 나온다. 표범이 자주 쉬었다 가는 개울가 바위 건너편 숲에 설치한 리바스는 일종의 간이 판잣집으로 개울 쪽으로 카메라 구멍을 다섯 군데 내어 놓았다. 겉에는 나무를 세워두고 초록색 헝겊들로 나뭇잎처럼 위장했다. 관찰대 안에는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간이침대와 주전자, 그릇들을 놓아둔 선반이 있다. 고정 관찰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황갈색과 초록색을 섞어 칠한 이동형 리바스도 보인다. 유리는 지난 폭우로 떠내려간 관찰대도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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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동물 관찰대(리바스). 관찰대 안에는 개울 쪽으로 난 촬영구와 침대, 선반이 놓여 있다. ⓒ이종호 기자


아무르표범 재도입 계획


율리아 연구원은 한 달 전 표범이 이곳을 지나갔고, 이틀 뒤 호랑이가 지나갔다고 했다. 율리아는 표범의 땅 국립공원에 호랑이 서른네 마리가 있다고 말했다. 2015년 세계자연보전기금(WWF) 러시아지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러시아 전체에 480~540마리의 아무르호랑이가 서식하고 있다. 연해주 표범의 땅 국립공원을 비롯해 라조와 시호테알린 자연보호구에 어른 호랑이 310~330마리, 새끼 70~85마리가 살고 있고, 연해주 북쪽 하바로브스크주에 성체 80~95마리, 새끼 20~30마리가 있다. 연해주 라조와 시호테알린, 하바로브스크주 호랑이의 면적당 서식 밀도를 놓고 보면 표범의 땅 국립공원의 호랑이 서식 밀도가 더 높다.


표범은 거의 표범의 땅 국립공원에 몰려 있다. 표범의 땅에 호랑이와 표범이 들어오면서 늑대들은 우수리스크 북쪽으로 대부분 올라갔다. 호랑이는 골짜기나 물가를 좋아하지만 표범은 암석이 많고 급경사에 절벽이 많은 곳을 좋아한다. 겨울엔 따뜻한 바위를, 여름엔 시원한 굴속을 주로 찾는다. 호랑이가 주로 멧돼지를 사냥한다면 표범은 사슴, 너구리, 오소리, 담비 같은 작은 유제류를 포획한다.


표범의 땅 국립공원에는 약 200개 지점에 400여 개의 시시티브이(CCTV)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러시아와 중국 국경을 넘나드는 표범과 호랑이의 개체 수를 정확하게 조사하기 위해 러시아와 중국은 관찰 자료를 공유하고 있다. 러시아와 민간 동물보호단체들은 ALTA(Amur Leopard and Tiger Alliance)라는 연합기구를 결성해 아무르표범과 호랑이 보호에 협력하고 있다.


아무르표범들의 개체 수를 회복하고 서식지를 넓히려는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고립된 지역에 한정된 표범들이 몰려 있다 보면 근친교배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유전적 다양성이 떨어지게 된다. 러시아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14년 4월 연해주 남동부 라조 자연보호구에 50여 마리의 새로운 표범 개체군을 재도입하는 계획을 승인했다. 전세계 동물원에서 건강한 아무르표범 암수 한 쌍씩 뽑아 번식장에서 새끼를 낳게 하고, 새끼가 사냥을 시작할 때쯤 살아 있는 먹이동물을 공급해 야생 사냥 훈련을 시킨 뒤 2세 표범을 자연으로 방사하는 계획이다. 10년 동안 표범 새끼 20마리를 야생으로 내보내 번식할 수 있는 암컷 열다섯 마리 등 50마리의 새로운 표범 개체군을 만들어낸다는 게 이 프로그램의 목표다. 이 프로그램이 성공하면 한국범보전기금 이항 대표(서울대 수의학과 교수) 등이 추진하는 남한 표범 재도입 구상도 힘을 받을 전망이다. 이항 교수는 강원도 민통선 일대를 한국표범을 복원할 수 있는 최적지로 꼽고 있다.


이종호 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