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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울산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 ⓒ이종호 기자


도서실 언니가 소개해준 독서모임


이종호 편집국장(이하 이 국장)=현대중전기에는 언제 입사했나요?


이현숙 울산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이하 이 대표)=82년도 입사해 87년 3월인가 5월에 그만 뒀어요. 그만둔 이유는 초반부터 너무 드러난 거죠. 선배가 예비군 훈련 가서 정치선동하고 그러고 나를 불렀는 거야. 그게 83,84년 정도였는데 경찰이 선배한테 니하고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 전부 물으니 나 말고 다른 사람 있는데 제 이름을 분거죠. 예비군 훈련 가서 정치발언 했다가 경찰에 불려가 회사 다니는 애를 분 거죠.


회사에서 관리대상이었어요. 엄청 힘든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다. 공개활동 밖에 못하는 상황이 되자 사회단체에 나와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됐어요. 회사에서 뭘 한다는 게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이었어요. 비밀로 한다는 게. 박종철 죽고 상황이 급변하면서 직업적 운동을 하고 싶다, 어차피 오래 노동운동 쪽으로는 도움이 안 되니까, 소모임 현장 소그룹은 했지만 그 이상 나서서 하기가 힘든 상황이어서 공개로 완전 떠버린 상황이었죠.


박종철 추모 싸움 하면서 거의 삼,사,오,유월 항쟁까지 연결되면서 회사는 정리했죠.


이 국장=80년대 초중반 현대중전기 현장은 어땠나요?


이 대표=회사 다니다보니 내가 생각했던 사회라는 게 내가 꿈을 실현하고 뭔가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더라고요. 그러면서 책을 많이 읽고. 중전기에 가면 도서실에 책이 좋은 게 많았는데 그 전에 사원회가 노조 결성 시도를 몇 번 했는데 내가 들어갔을 때가 백무산 선배 있다가 나가고 정인화 선배가 대기발령을 부산에서 받고 어수선하면서 되게 분위기가 그럴 때 입사를 한 거죠. 들어가 보니 잘 몰랐는데 하여튼 책이 좋아서 도서실 가고 그랬어요. 도서관 언니, 담당 사서 언니가 독서모임을 소개시켜줬어요. 그게 형제교회, 여성만 모인 독서모임이었어요. 장소가 형제교회였어요. 시작은 거기서 한 거죠.
멀미가 엄청 심한데 버스 안에서 책을 읽을 정도로 내 삶에 대한 통찰이나 욕구가 심했던 그런 시기였어요. 학교 때 사회에 나가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막상 던져지니 내 삶을 어떻게 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정체성의 혼란이 심했던 시기에 책 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어요. 문병란 시인의 시, 함석헌 선생 책, 그때는 출근하고 책 읽는 게 사회초년생 때의 일과 전부였어요.


직장에서 사람들이 똑같은 생활을 하니까 냉랭해지고 시니컬해지게 되잖아요. 그런 것이 운동을 하게 된 계기가 된 거 같아요. 가치관을 고민하면서...


빡센 학습 커리큘럼...지금까지 자양분


이 국장=형제교회에선 어떤 활동을 했나요?


이 대표=교회 활동을 한 건 아니에요. 종교에 관심이 있지도 않았고. 물론 종교에서 사람이 위안을 받기도 하고 어머니가 불교 신자지만 종교에 대해서는 냉소적이었어요. 장소가 교회다보니, 고민을 비슷하게 하는 사람을 만나다보니 그런 게 반가웠어요. 남녀노소를 떠나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거. 나만 고민하는 건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검증도 받고 의지할 데가 생긴 겁니다. 특히 타지에서 와서 자취를 하다 보니. 집은 경주였어요. 가깝긴 해도 예전에는 울산이 취직 잘 된다고 이쪽으로 많이 왔죠. 집이 좀 시골이어서 경주에 있어도 어차피 시내 나가서 자취해야 하는 상황이고 하니까.


이 국장=소모임에서는 어떤 학습들을 했나요?


이 대표=학생운동의 영향을 받아 커리큘럼이 빡셌죠. 여성모임할 때는 단편적인 기사, 신문의 사설, 책이라도 좀 나눠서 읽었는데 이후에는 젊은 친구들끼리 비슷한 또래끼리 하면서는 경제사부터 시작해서 경제학, 정치사, 한국근현대사 등등 되게 빡시게 했죠. 그게 지금까지도 자양분인 게 학교 때 그렇게 다양하게 안 배우잖아요. 그게 이후에 내 삶의 지식이라면 지식인 거죠. 그때는 단락 단락을 읽어야만, 거의 내용을 꿰고 있어야 해서 얼마나 치열했냐면 저자의 논리와 반박을 하고 소화 안 되면 튀어나가기도 하고...


우리 또래 친구 중에 이윤정이라고 서강대 다니다가 학비가 없어서 같이 회사를 다니다 형제교회 주보도 만들고 노래도 같이 부르고 그랬죠. 지금은 일산에서 마을 생활운동을 하고 있어요. 소소하게 아이들 가르쳐주고 글 쓰고 생협에서 활동하고 얼마 전에 형제교회 30주년 행사 때 만났는데 남편 분은 옛날에 어린이도서연구회 활동하고 지역아동센터를 하고 있어요.


박준석, 추용호도 있었고, 다 우리 또래들이었는데 또 누가 있었지. 조승수도 멤버는 아니었지만 서울에서 내려오면 소모임 구경도 하고. 또래끼리 발제하고 우리끼리 얘기하고 그랬죠.


회사에서는 현장 소모임을 했어요. 현장모임을 했을 때 중전기뿐만 아니라 몇 분 계셨죠. 자동차 사람은 한 명 있었고. 모임은 교회가 아니라 회사 앞에 집집마다 자취방을 전전하면서 똑같이 경제사, 경제학, 쉽게 풀어 쓴 책들은 87년 이후에 많이 나왔지만 그 전에는 되게 책들이 어렵고 딱딱했는데 그런 책 가지고 공부를 했으니...


“소복 입고 그런 건 다 내가 한 거죠”


이 국장=문화패 활동도 했나요?


이 대표=교회에서나 울사협이나 내가 어리고 이러니까 선배들이랑 문화패를 하고. 대학에서 활동하면서 춤 가르치고 북 가르치고 했던 분이 있는데 지금은 목수 하고 있는, 울사협 초반에 문화패를 자발적으로 만들어서 활동했어요. 젊은 사람들끼리 행사하려면 뭐가 있어야 되잖아요. 나에게는 주로 그런 걸 많이 시켰죠. 사회 보고 장송곡 부르고. 또 그 땐 참 많이 죽었잖아요. 매 장송곡 부르고, 노래 부르고, 하다못해 무당춤도 추고. 사진 보면 소복 입고 그런 건 다 내가 한 거죠. 공개적으로 행사 때 뭘 맡아서 많이 했죠. 대자보 쓰고 유인물 나르고 공개적인 행사만 했죠. 거리 시위 나가면 맨 앞에 나가서 하는 부대였어요. 여자 혼자 늘 이런 게 경찰에 찍힌 것도 있고.


울산협에서는 선배들이 운영 그룹이었고, 회의를 한 번씩 했어요. 후배 그룹은 회원이어서 거기 시간 짬짬이 와서 역할을 수행하고, 그때는 지금하고 사회단체 활동들이 많이 달라서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게 없고 한정적이니까 우리끼리 문화패 만들어서 연습하고 상황이 만들어지면 대응하는 형태였어요. 그러니까 지금처럼 사회단체가 프로그램 짜고 맞춰서 하는 게 아니라 상황이 주어지면 어떻게 대응할 지에 따라 각자 역할이 주어지고 그런 식이었어요. 87년 이후에는 달라졌죠. 노동자들의 요구가 있었고, 상담소 만들어지고 프로그램이 진행됐어요. 하지만 그 이전에는 경찰들이 먼저 알면 쳐들어오고 하니까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없었잖아요. 우리끼리 지탱하고 지속하는 게 중요했죠. 젊은이들이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문화패 만들고 하는 거였어요.


환경 사안도 컸어요. 온산 이주는 정말 큰 싸움이었고 울사협 이전에도 87년 이전인데 백무산 선배랑 김석출(동해안 별신굿을 마지막으로 공연.) 선생 굿을 보러 가기도 하고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고요. 울산성당 앞에서는 500여명 정도가 모여서 시위를 하기도 했죠. 87년 이전에도 환경문제로 상당히 큰 시위가 있었죠. 언양 동양나이론도 그렇고. 물론 당시에도 5.18 추모 집회 같은 소규모 시위가 있긴 했지만 내가 거의 처음으로 기억하는 대규모 집회는 온산 이주민 시위였죠. 주민들이 대부분 참석했고 최루탄도 터지고 했으니까.


강연하고 시국집회하면 인원이 적어서 다 팔다리 붙들려 경찰서로 끌려가고 그중에는 끝까지 이름도 이야기 안 하고 해서 풀려나오는 선배도 있고 했어요. 근데 그때만 해도 87년 이전에는 지금처럼 쉽게 구속시키진 않고 다 보내줬는데 지금은 왜 그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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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월 26일 ‘고 박종철 군 추모 및 고문폭력 범시민규탄대회’가 울산성당(현 복산성당)에서 열렸다. 흰 소복을 입은 이(왼쪽)가 이현숙 울산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다. 사진 제공=전재식 성공회신부.


개가 컹컹 짖는 새벽 유인물 배포


이 국장=87년에는 어떻게 보냈나요?


이 대표=1년 내내 거리에 있었죠. 박종철 1월에 죽고 울산은 본격적으로 3월부터 점점 시작해 5월에 본격적으로 유인물 만들고 실어나르고 선전물 찍어서 시민들에게 알리고 이런 것들이 이루어지면 울사협을 중심으로 해서 거리시위가 있다 없다 했고, 울산대 학생이 뜨면 시민들이 붙고, 밖에 친구들 플러스 울산대 친구들이 동력이었고 몇 명이 어디서 뜨냐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유월항쟁이 그때부터 피크였어요. 사람들이 점점 붙는 게 보이고.


유월항쟁 끝나고 아버지께 끌려가서 며칠 있다가 도망 나왔는데 그 사이에 난리가 난 거죠.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서 정병문 선배가 “현숙아 니가 그걸 못봤제.” 했던 기억이 나요.


87년 1년 동안은 어디서 뭐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뛰어다녔어요. 유인물 나눠줘야 하면 개가 컹컹 짖는 새벽에 치마 입고 껌껌한 데 서 있다가 어디 내려주고, 양정동 거기가 어디더라, 나중에 선거할 땐 거기가 어딘 지 알만큼 지형이 훤하고, 복산동도 그렇고... 2인1조였는데 한 명 빵꾸나면 나 혼자 해야하고. 선배들이 유인물을 안 들고오면 엉엉 울고 그랬는데 선배들이 “니는 무섭지도 안 하나” 그랬어요.


운동권 아가씨처럼 보이면 안 되니까 옷도 그렇게 입고. 지금 생각하면 참 무서운 일이었죠. 당시 혁신도시 근처에 사람 하나도 안 살고 버스도 안 다니는데 북정동 도서관 뒤로 성안동 올라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했나 몰라요. 그 껌껌한 데 무서운 데 어떻게 있었는지 그때는 사실 다 걸어다녔잖아요.


이 국장=유월항쟁 끝나고 바로 노동자들 투쟁이 이어졌죠.


이 대표=천창수 선배랑 학습 모임 같이 했어요. 유월항쟁 때 못 보다가 6.29선언 이후에 보러갔는데 느낌이나 이야기해달라고 해서 이야기했죠. 그때 “이제부터 노동자들이다.”라고 해서 의미심장했는데 그런 의미였는지 몰랐죠.


권용목 씨하고 첫 모임할 때 약국에 방을 빌려달라고 해서 7월인가 신동아약국 김순분 언니 집에서 모였을 거예요. 지금은 수암동 롯데캐슬, 약국은 아직도 있어요. 그 언니가 돈도 많이 내고 관여도 많이 했죠. 경희대 나온 선배인데 물적으로 헌신을 많이 했죠. 안 그래도 제일 그리워하는 선배인데 문화패 하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죠. 제대로 된 문화인으로 키운다고 해서 87년 이후에 공부시킬 거라고 서울 합정동 어디에 보내서 춤하고 다 배우라고 살풀이 이런 것도 자기가 돈 다 대가지고 끼가 있다고 해서 보내주고 그랬어요. 이상희 선배랑 같은 학교 후배였죠. 울사협 초반에 문화패 일원이어서 언니가 밥 사주고 항상 그 약국에서 모이고 그랬어요. 권용목 씨 등이 노동자대투쟁 초동모임을 했던 게 6.29 며칠 뒤였으니까 천 선배가 그 얘기했을 때가 이미 그 모임이 있고난 뒤였을 수도 있고요.


난 그때 너무 피로감이 있어서 어영부영하던 시기인데 현대엔진부터 시작해서 막 터지고 달려가고 그 이후에는 나 자신도 그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일순간에 일어난 것처럼 유월항쟁과는 다른, 굉장히 공격적으로 사활을 건 싸움, 나의 싸움, 내 문제의 싸움, 유월항쟁은 내 문제이지만 전체 한국사회의 큰 이슈였다면 노동자대투쟁은 밥을 어떻게 해달라, 내 삶이 걸려있는 내 문제잖아요. 본질이 걸려있는 문제라 사람들이 이걸 말하고 싶었는데 나도 이런 걸 말하고 싶었는데... 회사 다닐 때 여사원들을 동원해 간부들 식사 수발 들게 하고 그랬단 말이죠. 식판 엎고...


울산노동자의집, 임지본, 울노협


이 국장=87년 연말 대선 때문에 논쟁이 많았죠?


이 대표=각자의 길로 많이 갔죠. 난 백기완 선거운동의 최전선에 있던 한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백무산 선배를 찾아갔죠. 백기완 선생님이 출마하신다는데 같이 안 하시겠냐 하니까 선대본부장이 이애주 교수인데 그래 해보자, 백기완이 연설하고 이애주가 춤 추면 한 번 해보자 그랬죠.


백기완선본 울산본부 연락책이 돼서 동국대에서 있었던 추대집회에 갔어요. 5000명이 모였는데 후보가 안 나온 거라. 승인을 못 받은 거죠. 울산에서 몇 사람이 올라가 상황이나 분위기를 보고 백 선생님이 자의적으로 한다는 건지 우리가 판단을 하자 했는데 지도부들이 백 선생님을 만나러 가고 백 선생님이 그때 안 나오셨어요. 오실 때까지 덜덜덜 떨며 기다리다가 조승수 선배가 우리를 데리러 와서 밥 먹여주고 해서 내려왔죠.


백기완 후보는 양김 후보 단일화 요구하면서 막판에 사퇴했는데 그 사퇴가 충격이었고 우리는 양김은 안된다는 게 있었기 때문에 그랬는데 대세가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해하지만 어린 마음에는 되냐 안 되냐보다 유월항쟁의 정신을 살렸으면 좋겠는데 했죠. 그게 나중에 민중의당으로 옮겨가게 된 계기가 아니었나 싶고.


대선 끝나고 바로 총선 준비하려고 만든 당이 민중의당이었어요. 울산에서는 무소속으로 중구에 최영준 선생님이 김태호 씨랑 맞붙어서 제법 높은 득표율을 받았어요. 88년 하반기에는 울산노동자의집을 만들었죠. 학산동인가 중앙시장에서 한참 내려가서 있었는데 나중에 임투지원본부하던, 옛 역전시장 고 어디였어요. 소장은 백무산 선생님, 상근자는 제법 됐는데 김철호, 김혜란이하고 나하고... 본명은 아닐 거예요. 외지에서 엄청 내려왔죠. 그 분들은 일찍 내려와서 많은 활동을 같이 하고. 내가 공개단체에 있다보니 그 사람들을 다 만나다시피 했는데 90년대 초반까지 엄청 내려와서 피로감을 느끼기도 했어요. 울산에서 있었던 사람은 나밖에 없었고.


임투지원본부(임지본) 할 때는 상근자가 20~30명이 됐죠. 공식 비공식 포함해서. 울산은 지역노조협의회(지노협)로 할거냐 하다가 임지본에서 울노협(울산지역노조협의회) 준비위로 간 거죠. 울노협 준비위가 생기면서 88임투지원본부가 해산이 된 거고, 그 사람들은 각자 비공식적 모임을 갖는다고 했지만 뿔뿔이 흩어지는 계기가 됐어요. 난 89년에 양정동 울노협 준비위 실무자로 들어갑니다.


임지본 하면서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 때는 현대중공업 정영빈 씨 다락방에서 홍보물을 매일 만들어서 나눠주고 그랬어요. 난 다락방에서, 밑에는 남자들이 금종섭, 조승수, 세명 더 있었는데 안경 끼고. 남자들이 취재 가면 여자는 나 혼자밖에 없으니까 편집하고...


20~30명씩 노동자학교를 진행했던 기억이 나요. 조합원들 노래도 가르치고 효문공단 노동자들도 왔어요. 이후에는 봄날이었죠. 87년에는 서류상으로 있던 노조가 많이 생겼다면 그 이후에는 상담하고 집회하고 조합원 단결시키는 게 프로그램으로 세팅이 돼 들어가서 많이 뛰어다녔죠. 노동자들 여름 수련학교도 하고요. 선배가 경북대 나오는 바람에 경북대 찾아가서 동해안 경북대 수련원에 등록해서 3~4년 정도 김종훈 씨랑 같이 하고, 울림터 문화패하고 팀 꾸려서 하고, 그때 짧았지만 수련회도 하고 여러 가지 기획을 하고 해서 재밌었죠.


울노협 준비위는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가 중심이었어요. 재원도 그렇고. 그런데 현대자동차노조 집행부가 흔들리면서 기반이 없어지고 끝나버렸죠. 나는 굉장히 만신창이가 됐고. 공개 노동운동의 흐름을 1차적으로 굴절시킨 모양새가 됐죠. 우리가 너무 87년 이후에 밖에서 가지고 있던 힘을 축적하다가 울노협이라는 현장중심조직에 밖에 있던 사람들이 들어가면서 밑에도 잃어버리고 우리가 갖고 있던 자산도 뿔뿔이 흩어지는 계기가 됐고, 현장은 현장대로 구심점을 잃어버렸고...


그러면서 현총련(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이 생기고 뭐 더 좋아졌죠. 현총련 될 때부터는 현장중심으로 가니까 밖에서 더 할 게 없었죠.


신새벽서점과 ‘경계’ 세우고 치른 결혼식


이 국장=신새벽서점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이 대표=울노협 해산되고 현장중심으로 가면서 할 것도 없고 밖에는 와해된 거나 다름 없기 때문에 87년 이후 90년대 공개단체 들락날락하던 친구들도 현장 들어가면서 자기 몫을 하고 바깥의 몫은 필요성이 약해지고, 사람들도 많이 줄었고... 각자의 전망이 고민되는 시기였죠. 그러다가 신새벽서점에 문제가 있었어요. 128일 투쟁 이후에 경찰이 서점을 걸어서 조승수 씨를 국가보안법으로 수배령을 때렸어요. 이 양반이 워낙 전과가 많으니까 서점으로 걸었는데 판매처에 주인과 점원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과 수배를 당한 게 한국에서 아마 유일무이할 거예요. 경찰들이 노동자들을 압수수색해서 책 출처를 물어보면 무조건 신새벽이니까.


조승수 씨는 87년 가을에 두 번째 석방이 돼서 귀향을 하는데 88년 1월초에 성남동에 인문사회과학서점을 냈죠. 처음엔 울산초등학교 앞에 엄청 작은 서점으로 시작했어요. 조금 있다가 지금의 성남프라자 옆으로 옮겼죠. 신새벽서점은 중요한 곳이었지만 사장이 수배가 되면서 주인이 없는 상태가 됐어요. 직원도 구속됐죠. 울산대 학생이었는데 정말 일반인이었거든요. 그 당시 인권위 이런 거 있었으면 정말 제소하고 싶은 일이죠. 그 사람은 정말 일반인이었어요.


서점을 아무도 열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서점은 계속 이어가야 되고, 그럼 차라리 니가 맡아라 윽박지르다시피 요구를 해서, 그럼 딱히 내가 맡아서 해보죠 그랬죠 뭐. 1년 가까이 했나. 그러다 91년에 구속돼요. 나도 국가보안법으로 걸었죠. 서점으로.


내가 구속되면서 서점은 잠시 문을 닫고 울사협 영희 언니가 인수를 했죠. 남편은 수배중이고 나는 구속되고 서점은 완전히 문 닫혀 있는 상태여서 언니가 해보겠다고 한 거죠. 언니가 서점을 인수하고 일반 서점으로 같이 하다가 나중에 이름도 바꾸고 그랬어요. 그러다가 서넘이 정리된 건 나중에 내가 나와서 정리했죠.


이 국장=그 와중에 조승수 전 의원과 결혼은 언제 한 건가요?


이 대표=91년 3월 30일 조승수 씨가 수배중일 때 결혼했어요. 그때 내 나이가 스물아홉이어서 울 아버지가 날을 잡아가 경주에서 우인들만 100명 불러서 경계 서면서 결혼식 했어요. 울산 경찰들은 몰랐었죠. 신혼여행은 차 빌리고 면허증 남의 것 빌리고 해서 국내 온 산천을 떠돌아 다녔어요. 대전 현충원에 의문사 당한 친구 무덤도 찾아가고. 그러다 헤어지고 나 혼자 울산에 와서... 참 생각해보면 그런 걸 당연하게 생각했던 게... 지금 이야기하면 허, 무슨 결혼을 이렇게 하냐 그럴 거예요.


사람들은 우리가 128일 투쟁 때 연애했다고 그러는데 그때는 아니었고 그 뒤에 사귀니 마니 하다가 그렇게 됐어요. 결혼식 때 파업 지원하러 보냈더니 연애하고 그런다고 신랑 발바닥도 많이 맞고 그랬어요.


조승수 씨는 91년 가을쯤에 장태원 선생님하고 안기부 가서 조사 받고 수배가 풀렸어요.


평등세상을 여는 울산여성들


이 국장=결혼하고 나서는 어떻게 지냈나요?


이 대표=결혼하고 출산하고, 애 둘 낳고 내 인생에서 95년까지는 암흑기였어요. 95년 여성모임으로 복귀했어요. 민중당으로 모여 있던 사람들이 타지에서 많이 왔어요. 현대자동차, 현대정공 쪽. 90년대가 다 그런 세대잖아요. 80년대 활동가들이 90년대에 결혼을 많이 하고...


우리끼리는 얼굴은 다 보고 하는데 서울에서 시집온 현대중공업 김형광 씨 부인 남숙자 언니가 아파서 우리끼리 모여서 텃밭이라도 가꾸자 하고 모임을 시작했죠. 그 모임이 평등세상을 여는 울산여성들이라는 단체로 진화해요. 여성모임 하면서 여성운동을 시작했고, 그 이후에 정치 한 것도 여성운동의 일환이었어요. 그 시점에 엄청 중요했던 게 비례대표제나 30프로 여성할당제, 호주제 폐지 법제화, 정치제도 개선 등이었어요. 여성운동에서 주요한 굉장히 중심적인 이슈였죠. 제도를 바꿔나가는 역할을 내가 민주노동당 참가하면서 여성위원장 하고, 민주노동당에서 여성위원회 활동을 중심으로 여성단체와 여성정치의 결합을 시도했어요. 여성운동, 마을운동, 생태운동, 생활운동 등등 2000년도에 참 다양한 핵심 이슈들이, 자기가 발 딛고 있는 현안들과 삶을 다루는 운동이 주류였죠. 친환경 우리밀빵 도투락 빵 엄청 팔고, 비누 만들기, 방과후학교, 여행 프로그램, 체험활동... 지금은 그걸 다 직업으로 하던데 그때는 우리가 내 아이 같이 키우고 건강하게 키운다는 프로그램을 같이 진행했죠. 살면서 큰 자산이 된 운동들이었어요.


87년은 대규모 이슈, 사회를 향한 요구, 그 속의 역할, 거대담론에 주목했다면 결혼 이후 90년대 후반에는 내 삶에서 정체성을 찾고 내삶을 살아내고 변화시키고 주변을 바꿔내는 데에 푹 빠져서 치열하게 즐겁게 살았죠.


얼마 전에 숙자 언니 환갑 때 당시 영상을 봤는데 애들이 엄청 놀라더라고요. 지금도 저게 쟁점인데 엄마들이 저걸 했단 말이야 하면서 엄청 놀라고 감동 받고 그랬었죠. 지금은 그 연장선상에서 생협도 그렇고 환경운동도 그렇고. 환경운동연합에 오영애가 있고 할 때는 연결해서 사업도 같이 하고 더러 있었는데, 아이들 교육이나 여성생태운동을 하려고 연결고리를 가지려고 애썼는데, 지금은 그게 끊겨서 여생생태운동, 여성환경운동의 연결고리가 끊겨서 조금 아쉽고, 그런 걸 해보고 싶다 해서 환경운동을 했는데 먹고 사는 업이 이렇다보니 못해서 지금도 숙제입니다. 환경운동연합에 있는 이유가 그건데요.


울산시의회의원, 민주노동당 분당


이 국장=2006~2010년 울산시의회의원으로 활동했는데, 의정활동은 어떤 부분에 중점을 뒀나요?


이 대표=비례로 들어가서 상임위나 이런 부분들은 남이 안 가는 기획예산성 내무위원회로 들어갔어요. 여성 소수자의 입장에서 예산부터 시작해서 정책을 계획하는 제도부터 바뀌었으면 하는 점에 주안을 뒀고, 실질적으로 변화를 이룰 수 있는 활동을 하려고 애썼죠. 내무위원회가 문화, 체육 예산, 그 다음에 문화재, 도시설계 이런 큰 부분부터 아주 일상적인 부분까지 굉장히 다양한데 어찌보면 굉장히 붕 뜨는 역할이었지만 시민들이 보다 지방자치에 많이 참여하는 형태를 고민했는데 어쨌든 굉장히 신나게 했습니다. 1년을 10년처럼. 매일 밤에 시에서 나온 용역보고서 하루에 한 권씩 읽고, 행정사무감사 5분 발언 하면 매 한 권씩 읽고 다음날 3분짜리 글 쓰고 했던 기억...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체육시설에 가임기 여성 할인해주는 조례를 만든 거예요. 수영장 안 가는 만큼 할인을 해줘야지.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 그리고 도서관 조례 문제라든가 사회적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평생교육 제공하는 조례를 만들려고 했는데 시에서 만들어버렸죠. 공청회도 하고 공평한 교육기회를 만들려고 애썼죠. 디테일한 부분들, 문화 쪽은 예산도 많은데 그쪽하고 많이 싸우고 했는데 변화가 가장 더딘 부분이 아닌가 싶어요. 사회적 현상하고도 맞물리니까 문화가 융성하는 건 맞는데 어느 부분으로 집약하는 건 아닌 거 같고, 그렇다고 이건 못 해 하기도 애매하고... 그런 부분들이 힘들었죠. 까마득하네요. 벌써 7년 전이네요.


이 국장=시의원에 다시 도전하지는 않았죠?


이 대표=그때는 민주노동당이 쪼개지면서 비례였는데 되게 애매한 위치였어요. 어떤 행태를 취하기가 애매한 나 같은 케이스가 다섯 명 정도였는데 다 각자 알아서 하는 형태를 취했죠. 끝까지 임기를 마치고 어느 당도 안 간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정리하고 간 사람도 있고, 우리에게는 엄청난 혼란이었어요. 지금까지도 후회되는 것도 많고, 임기 끝나기 전에 사퇴를 해서요. 3월달에 사퇴를 하고 나면 그 뒤에는 별반 기여할 의원으로서 역할이 없고 다 선거하러 나가버리고 해서 상반기 추경하고 마무리하는 걸로 주변 분들하고 마무리했습니다.


지나고 보면 찜찜하고 끝까지 갔어야 했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 당시에는 너무 혼란스러워서 내가 주장하는 바하고 맞으면 좋은데 사람들이 다 떨어져 나가버리고 나는 비례고 하니까 괴로웠던 시기죠. 어느 누구도 담보해주지 않고 나만이 결정하고, 아무도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시기였고, 업무를 끝까지 하고 가겠다는 시한이 3월이었고, 그 시점에서 출마는 전혀 생각 안 했죠. 다른 사람들 당선될 수 있도록 하는 게 컸어요. 다른 당 소속이면 못 하니까 그것도 일장일단이 있어서 이후에 여러 평가가 있었고 저는 잘했다 잘못했다 의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내 스스로 출마해야겠단 생각은 못했고 준비할 수도 없었고 당이 이쪽인데 니 어디가서 출마해라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다른 지역도 아무도 출마를 못했죠. 탈당 때문에 사퇴하는 건데 비례는 그게 다 연결돼 있고, 2번이 나보다 먼저 사퇴를 해서 2번이 있었으면 그 다음에 고민을 해봤을 텐데...


같이 들어간 여성의원들 비례대표제 당 안팎으로 30프로 할당하고 이걸 만들어낸다가 핵심이고 그게 컸어요. 이 사람들이 계속 더 큰 정치인으로 크길 바랐죠. 지역의 정치적 이념을 떠나서 여성 정치인이 진보진영에 많이 포진하도록 하는 역할 자체로 스스로 위안하고 있습니다.


울산 생협 조합원번호 1번


이 국장=시의원 사퇴 뒤에 뛰어든 게 생협 활동인가요?


이 대표=아이쿱 생협을 만든 게 아니고 그 전부터 있었죠. 시의원 그만두고 그 다음해에 울산생협이 10주년을 맞이하면서 행사하자고 해서 내가 이사로 들어가 활동하면서 10주년 추진위원장 하고, 지역에 조합원 행사도 하고, 영화제도 하고 다양하게 했죠.


남편은 불안한 상태고 하니까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인데 우연히 자연드림 개인점 시범사업에 신청을 하게 돼요. 순위가 5순위 정도였는데 울산서 앞에 한다는 사람도 많았지만 교육이 아주 빡세서 시험도 쳐야 하고, 협동조합운동사, 노동운동사와 비슷한, 패스가 돼야 혜택이 주어져서 그런 것들을 교육을 받고 협동조합에서 하는 사업의 특성을 동의해야만 주는 거죠. 일반인들은 동의를 못 하죠. 그러다보니 5순위가 1순위가 된 겁니다.


구영리에 건물을 짓고 있는데 가봐라고 해서 며칠만에 파바바박 된 거죠. 운이 좋았죠. 내가 울산에 생협 조합원번호 1번이고 선배 그룹이죠. 97년인가 허달호 씨가 하자고 해서 한 게, 탈퇴 안 하고 한 게 1번이 된 거예요.


후배들이 하는 데 도움은 주고 싶은데 그런 역할도 했지만 이제는 너무 활동들을 잘 하니까... 아이쿱은 대단해요. 활동가들 교육의 힘이 큰 거 같아요. 아이쿱은 이사 코스 교육을 하고, 아카데미를 서울 가서 하고, 이사장 이런 사람들은 경영 코스를 밟아요. 매장이 있으니까 쉬운 공부가 아니고, 인문학, 경제사, 협동조합사, 1844년 이전에 영국노동조합부터 시작하니까요. 이사는 1년 정도 하고 패스를 하고 하다보니 활동력 자체가 급격하게 나올 수밖에 없고 탈핵이나 시민들 사안 있으면 나오고 놀랍죠. 자긍심이 있죠.


내 삶을 열심히 살았을 뿐


이 국장=그 간의 삶을 돌아보면 어떤가요?


이 대표=글쎄요. 인터뷰하자는 이야기 들으면서 여러 생각이 나던데 나는 내 삶을 열심히 살았을 뿐이고, 내가 끌리거나 하고 싶은 걸 하다보면 그게 운동 속에 포함된 거고, 나는 울산에 열일곱살 때 왔어요. 79년에 고등학교를 울산으로 오면서 살기 시작해 지금까지 살고 있으니까 인생의 대부분을 울산에서 살고 있어요. 거창하게 운동을 해야지 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생각이 드는 게, 내가 대견한건 한편으로 허투루 매 순간을 살려고 했을 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정면으로 어떤 문제를 바라보면서 거기에 비키지 않고 뛰어들며 살았구나, 비겁하지 않게.


아쉬움보다는 초창기에 우리도 조직 운영을 모르다보니 울산의 현장 뿐 아니라 밖에 있었던 여력을 좀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역할을 했다면 지금처럼 시민단체들이 힘들게 가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다른 지역에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게 울산 시민단체 활동이 약하잖아요. 여성도, 환경도, 환경운동연합도 이런 상황에서 20년을 이어왔다는 게, 명맥을 유지할 정도로 있어왔다는 게 대단할 정도로 시민사회가 활발하게 구성이 덜 된 상황에서 87년 이후에 우리가, 좀 더 선배들이 다른 지역으로 안 가고 나도 그런 데 집중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안타까움일 뿐이지만...


나는 내 삶을 살았을 뿐이고, 운동을 하겠다 거창하게 생각한 적도 없고, 끌리거나 궁금한 점이 있으면 움직였는데 그게 운동에 포함이 된 거고. 내 삶에서 울산에 열일곱살에 왔으니까 고등학교로 79년에 와서 지금 살고 있으니까 인생의 대부분 40년을 산 거죠. 쭉 살아오니, 거창하게 운동을 하겠다 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한편으로 대견하고 대단한 건 허투루 매순간을 살려고 할려고 할 때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어떤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비키지 않고 비겁하지 않게 살았구나, 나 자신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어요.


한편으로는 지역의 활동 역량들이 한 곳으로 집중됐더라면 지금처럼 시민운동이 힘들게 가지 않았을텐데 여성 쪽도 환경 쪽도 그렇고요. 87년 이후에 선배들이 다른 데 가지 않고 나도 시민운동에 집중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랬다면 울산의 시민사회가 지금보다 좀더 활발하게 구성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요.


친구들 모이면 추억이 있던 성남동으로


이 국장=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시죠.


이 대표=87년 사람들 인터뷰한 거 책 내기 전에 그거 한 번 해요. 다 다른 기억 줄기를 한 자리에서 막 토론해서 출간 전에 집담회를 한 번 하는 게 어떨까요.


기억나는 게 그때 내 사진 보면 얼굴이 까매요. 머리로 딱 묶고 성당에 앞에 있는 하얀 소복, 그거 내 사진이에요. 전혀 안 닮았을 거예요. 얼굴형이 그래도 제일 안 변한 사람 중에 하나인데.


아 그리고 경찰들한테 신새벽 책값 좀 지불 받고 싶은데... 신새벽이 장사가 잘 됐거든요. 장사 좀 된다 싶으면 500권 가져가고, 장사 좀 된다 싶으면 한 500권 가져가서 안 줘. 이건 전국에서 유일무이한 사건이죠.


지금 나이 들면 뭐할까 생각해보면 그 향수가 있어서 서점 해보고 싶어요. 책 좋아하니까 소개해주고, 바쁘면 머리말이라도 읽어보고 권해주고,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재미가 쏠쏠하고, 인문학 한정된 책만 취급하니까 대화가 되기도 하고. 근데 카페처럼 하면 다들 안 된대. 나이 들어 빈 공간 하나 있으면 전기세 수도세만 나가면 되는데...


우리 친구들 모이면 항상 추억이 있던 성남동으로 가요. 거의 없어졌어요. 명동칼국수 하고 몇 개 안 남았어요. 아 우리 어릴 때 대성파전 할매 욕 얻어먹어 가면서... 87년 이전에는 노동운동을 한 게 아니라 책 읽고 술 잘 먹으면 노동운동 잘 하는 거였어요. 지금도 그 얘기 합니다. 준석이나 걔들은 현숙이 퇴근 언제 하노? 그야말로 한량이었어. 턱 괴고. 아 오늘은 집에 가야지 하다가도 현숙이 퇴근 후에 뭐 하노? 하면 순해가지고 친구들을 못 뿌리치는 거야. 월급을 술값으로 탕진하고... 퇴직금은 임투지원본부 사무실, 울노협 사무실 하는 데 다 깨지고. 얼마 안 돼. 지금으로 치면 얼마 안 되는데. 나중에 돌려주려고 했는데 내가 싫다 그랬어요.


그래도 나는... 아, 끝에 그거 써주세요. 행복한 시절을 살았다. 이 한국의 격동기를 온전히 젊은 시절부터 살았고, 여자가 거의 없었는데 좋은 남자들 사이에서 보호 받으면서, 요새는 사건사고도 진짜 많찮아요, 그 남자들 사이에서 술먹고 쳐돌아 다니면서 귀하게 소중한 존재로 있었던 거 지금 생각하면 감사하고. 왜 이렇게 다들 공부시키려고 애썼는지. 우리 시대는 다 그렇게 살았죠.


대담=이종호 편집국장

정리=이채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