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역사기행1

<울산동헌과 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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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읍내 성곽과 건물 배치 추정도>



울산지방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성(城)이 축조되었다. 신라 말~고려 초의 신학성을 비롯하여 울산읍성, 언양읍성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가 되면서 울산에는 군사적 성격의 성들이 주로 세워졌다. 조선 초 경상좌도 육군사령부인 병영성과 수군사령부인 개운포영성이 축성되었다. 이밖에도 염포성, 문수산성, 서생포진성, 기박산성, 유포석보, 관문성, 기박산성 등 많은 성들이 울산에 구축되어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여기에다 임진왜란 때 일본인이 쌓은 왜성(倭城)도 두 개나 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약 330여 곳의 군현이 있었다. 이 가운데 성벽을 쌓은 읍성은 120곳 정도 되었고, 나머지 고을에는 읍성을 쌓지 않았다. 성벽이 갖추어진 읍성은 주로 해안 지방이나 북쪽 국경지방, 그리고 주요 교통로에 있었다.
읍성은 지방 관아가 소재한 고을을 둘러싸고 세워진 성으로, 지금의 시청 또는 군청 소재지에 해당한다. 읍성의 중심지에는 객사(客舍)와 동헌(東軒)을 비롯한 각종 관아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읍성은 돌로 쌓은 성벽과 2~4개소의 성문, 그리고 이들 성문 및 주요 관아를 잇는 길이 있었다. 그리고 성의 남문(南門)이 정문 역할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려 말~조선 초 울산에는 두 곳의 읍성이 있었다. 하나는 학성공원 맞은 편 충의사 자리에 있었는데,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이곳을 병영성으로 삼았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의 성을 지금의 병영성 자리에 신축하여 읍성으로 삼았다. 그 후 새로 신축한 병영성 자리의 읍성을 병영성으로 바꾸고, 옥교동 일대에 새로운 읍성을 축성하였다. 충의사 자리에 있었던 옛 읍성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때 새로 축성한 읍성을 ‘울산읍성’이라 부른다.


새롭게 건립된 울산읍성은 조선 성종 때인 1477년에 축성되었다. 높이가 7m, 길이가 1.7km로 우리나라 전국 곳곳에 있었던 읍성과 규모가 비슷하였다. 울산읍성 중심부에는 다른 읍성과 마찬가지로 객사와 동헌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시대 한양 도성은 평균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약 18.6km로 지방 읍성보다 길이가 10배 정도 더 길었다. 울산과 인접한 경주읍성은 정사각형으로 가로, 세로 길이가 각각 600m, 전체 길이는 2.4km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기의 치열했던 전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명과 일본 사이에 협상이 시작되었다. 이때 울산지방에는 가토 기요마사 부대가 서생포에 왜성을 쌓고 주둔하였다. 두 나라 사이에 오랫동안 전개되던 협상이 깨지고 1597년에 정유재란이 시작되어 다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일본군은 울산읍성을 비롯한 여러 성곽을 허물어 그 석재로 지금의 학성공원에 그들의 왜성을 쌓았다. 이것을 ‘울산왜성’ 혹은 ‘도산성’이라 한다. 당시 일본군 입장에서 보면 적의 성을 허물어버리면서 동시에 잘 다듬어진 석재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으니 일석이조였던 셈이다.


전쟁이 끝난 후 동헌 등 관아 건물은 다시 세워졌다. 그러나 울산읍성은 다시 축성하지 않은 채 지금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제는 그 흔적조차 가늠하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정유재란 전까지 존재했던 울산읍성은 지금의 중구 성남동과 옥교동, 북정동, 교동에 걸쳐 있었다.


울산읍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남문은 성남동 신호등 네거리에 있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성남동 젊음의 거리-국민은행 성남동 지점-장춘로-옹수골-울산 기상대-해남사-중앙동 주민센터-성남시장을 따라 성벽이 이어졌다. 옛 성벽이 있었던 곳은 지금은 주택, 골목길, 도로가 되어버렸다. 옛 성벽길 따라 길바닥 중간 중간에 흰 페인트로 ‘울산읍성’이라는 글자를 찍어 놓았다. 이 코스를 따라 걸어가면 울산읍성의 옛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김문술 전 울산역사교사모임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