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반구대 호랑이의 원류를 찾아서

1. 반구대 호랑이의 비밀
2. 사라진 호랑이, 어디로 갔나
3. 연해주 표범의 땅을 가다
4. 라조 호랑이 숲의 지배자
5. 생태 보고 시호테알린
6. 버려진 땅 한흥동 옛 한인 마을
7. 연해주 원주민과 호랑이의 상생
8.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연해주로 쫓겨간 건 조선범만이 아니었다


19세기 한반도에서 쫓겨나 만주와 연해주로 밀려간 건 호랑이와 표범 같은 조선범만이 아니었다. 1860년대부터 조선왕조의 가혹한 세금과 부역, 관료와 지주들의 횡포와 수탈, 허리가 휘는 고리대를 피해 조선 이북지역에 살던 농민들이 국경을 넘어 만주와 연해주로 떠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홍수와 기근, 흉작과 전염병 창궐로 농민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조선 농부들은 살기 위해 식솔들을 이끌고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사형을 받을 수도 있는 불법 국경이탈을 감행했다.


카자흐스탄대 김게르만 교수가 쓴 <한인 이주의 역사>에 따르면 1864년 1월 열네 가구 65명의 조선인이 처음으로 조성정부 몰래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이들은 러시아 노브고르드 국경초소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지신허(地新墟)’ 마을을 일궜다. 이주 한인들은 시디미강과 얀치혜강 유역에도 마을을 만들었다. 3년 뒤인 1867년 지신허, 시디미, 얀치혜(연추) 세 마을에 사는 한인들은 1801명으로 늘었다.


1869년 가을 조선 이북지역에 난 홍수 피해와 흉작으로 배고픔을 피하려는 한인들이 대규모 이주를 감행했다. 그해 9월말~10월초에만 1850명이 지신허 마을로 넘어갔고, 11월말~12월초에는 4500명이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들어갔다. 러시아는 몰려드는 한인들을 국경지대에서 수이푼, 슈판, 레푸, 다우비헤 강변 등 연해주 내륙 쪽으로 이주시켰다. 1870년대말 연해주와 아무르주에는 모두 스물한 곳 마을에 한인 이주민 6766명이 살았다.


1880년대 들어와 러시아는 1884년 조로수호통상조약 체결 이전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에게 러시아 국적을 부여했다. 정주권을 갖지 못한 이주민은 러시아 거주증을 발급받아야만 러시아 영토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1900년 모든 한인 이주자에게 러시아 국적이 부여됐다. 이주민 한 가구당 50데사찌나(1데사찌나는 약 1헥타르)의 토지가 분배됐고 조세 의무도 부과됐다. 1895년 프리아무르 변강 공식 통계에 따르면 한인 인구는 1만8400명이었고 이중 1만6700명이 연해주 수이푼 지역과 포시예트 지역에, 600여명은 하바로브스크 근교에, 1100명은 아무르주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에 살았다.


1904~1905년 일어난 러일전쟁과 제국주의 일본의 조선 강점으로 국권을 상실한 한인들의 이주가 급증했다. 일제 통치에 항거하려고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학교와 신문사를 세우고 독립군 양성에 나섰다. 연해주 한인 인구는 1906년 3만4399명에서 1910년 5만965명으로 늘었다. 김게르만 교수는 공식 거주 등록된 한인들 수치 외에 실제 인구는 더 많았다며 1908년 연해주 전체 인구는 6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1917년 ‘10월혁명’ 직전 러시아에 살고 있는 한인은 약 10만명에 달했다. 연해주에만 8만1825명이 살았는데 연해주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한인이었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러시아 내전과 일본군 등이 참여한 대소간섭전쟁이 시작되자 한창걸, 김경천 장군을 비롯한 한인 항일운동가들은 소비에트 정권 편에 서서 무기를 들고 함께 싸웠다.


내전이 끝나고 러시아 전역에 소비에트화가 진행되던 1923년 연해주에 사는 한인 숫자는 12만982명에 달했다. 이중 9만명이 포시예트, 수찬, 니콜스크-우수리에 모여 살았고 나머지는 스파스크, 하바로브스크, 이만, 올가 등 연해주 곳곳에 흩어져 살았다. 1924년 54개의 한인 농촌 소비에트가 만들어졌다. 1929년 연해주 한인 이주자는 모두 15만795명으로 연해주 전체 인구의 24.3퍼센트를 차지했다.


1930년대 중반 러시아 이주 한인들의 숫자는 20만명에 달했다. 김게오르그 교수에 따르면 이 시기 한인 이주자의 80퍼센트 이상이 강제적인 ‘전면적 집단화’를 경험하게 된다. 1937년 9월 소비에트 정부는 극동지역 한인들을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스탈린 정권은 강제 이주 전 한인 대표와 지도자들을 일본 첩자라는 누명을 씌워 사전 ‘제거’했다. 길게는 50년 이상 살던 삶의 터전에서 하루아침에 강제로 쫓겨난 한인들은 소비에트 정권이 개조한 수송열차에 살림살이도 변변히 챙기지 못한 채 몸을 실었다. 열차 한 칸에 대여섯 가구 서른 명 남짓한 남녀노소가 몸을 부대끼며 30~40일 동안 달려 생면부지 낯선 땅에 도착했다. 김게르만 교수는 강제 이송 중 사망한 한인이 수백명에 이른다고 했다. 1937년 10월 25일 예조프 소련내무인민위원회 위원장은 “극동 한인 이주가 완료됐으며 3만6442가구 17만1781명의 한인이 최단 기간 내에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송됐다”고 발표했다. 카자흐스탄 이주 초기 많은 한인들이 부족한 식량과 의료시설, 열악한 주택, 전염병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극동 한인들은 소련에 거주하는 민족 가운데 최초로 강제 이주를 겪었다. 한인 강제 이주 이후 게르만족, 쿠르드족, 타타르족, 폴란드족, 체첸족 등 다른 민족들의 강제 이주가 이어졌다.


신창동 마을 터에 무심한 쑥부쟁이만


지난 9월 4일 연해주 중부 동해안에 있는 도시 테르네이를 출발해 사라진 옛 한인 마을을 찾아 나섰다. 종일 비포장 산길을 차로 달려 연해주 북부 해안마을 암구에 도착했다. 길 안내를 한 세르게이 전 테르네이 부군수는 1937년 강제 이주 전 암구 인구의 30퍼센트가 고려인이었다고 했다. 암구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이튿날 아침 일찍 북쪽 막시모프카로 향했다. 시간을 줄이려고 막시모프강을 건널 요량으로 길을 나섰는데 새로 다리가 놓여 있었다. 지난 6월 공사를 시작했는데 다음날이 마침 개통식이다.


막시모프카 마을 사무소에서 알렉산더 이장을 만나 옛 한인 마을 신창동 길 안내를 부탁했다. 알렉산더 이장은 “1937년 강제 이주 이후에 구소련 시절 마을을 다 파헤쳐서 밭을 만들었다”면서 “마을 흔적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알렉산더 이장을 태우고 막시모프카 마을을 출발해 차로 30분 달려 도착한 곳은 마을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버려진 풀밭이었다. 알렉산더 이장은 커다란 단풍나무를 가리키며 이곳에 가게도 있었고 학교와 러시아 교사도 있었다고 했다. 스탈린 시대 강제 이주로 한인들이 쫓겨나자 마을을 갈아엎고 농사를 짓다가 지금은 폐허가 됐다고 했다. 세르게이 전 부군수는 1937년 테르네이군에서 3000명 정도의 한인들이 강제 이주 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고문서 보관소에서 1937년 이전 테르네이군 한인 거주민 명단과 지도들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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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게이 전 테르네이 부군수(왼쪽)와 알렉산더 막시모프카 마을 이장(오른쪽)이 옛 신창동 마을 터를 안내했다. ⓒ이종호 기자


풀밭을 헤치며 옛 집터나 구들돌이라도 찾아볼 수 있을까 뒤져봤지만 신창동 한인들이 살았던 흔적은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맥없이 발걸음을 돌리는데 길가에 지천으로 핀 보랏빛 쑥부쟁이만 초가을 햇살 아래 무심하게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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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동 길가에 핀 쑥부쟁이꽃. ⓒ이종호 기자


카레이스키 아도와 버려진 땅 한흥동


신창동 마을 터에서 막시모프카 마을로 돌아와 동네 ‘마가진’(가게)에서 점심거리를 샀다. 쓸쓸해 보이는 막시모프카 해변 모래밭엔 소들이 한가로이 누워 있고 말들이 떼 지어 어슬렁거렸다. 소금기를 보충하려는지 말 한 마리가 멀리서 바닷물을 마신다. 바닷가 백사장에 쓰러져 있는 고목 위에 마가진에서 산 냉동 게살과 검은빵으로 점심상을 차렸다.


막시모프카 마을을 출발해 북쪽으로 10킬로미터 떨어진 소볼리에프카 마을로 갔다. 그곳에서 빅토르 전 마을 이장을 만났다. 빅토르 씨는 세르게이 전 부군수의 요청에 흔쾌히 자신이 살았던 옛 한인 마을 안내에 나섰다.


한 시간을 차로 달려 막시모프강 다리 위에 섰다. 빅토르 씨는 강 상류 쪽에 러시아인들이 사는 마을이 있었고, 하류 쪽으로 1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젠트랄리 아도(중앙 마을)가 있었다고 했다. 중앙마을은 마차가 다닐 정도로 길이 넓었고 판자집들이 두세 채씩 여러 군데 모여 있었다. 거기서 하류 쪽으로 더 내려간 곳에 카레이스키 아도(한인 마을)가 있다.


다리에서 다시 차에 올라 30분을 더 달렸다. 옛 마을 어귀 자작나무 숲 안쪽으로 들어가 개울을 건너니 너른 공터가 나온다. 여기가 카레이스키 아도다. 빅토르 씨는 이곳 개울물이 한겨울에도 얼지 않았다며 이 물로 옥수수와 호박 밭에 물을 줬다고 했다. 마을 진입로는 잡풀로 덮여 있긴 했지만 아직 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 길을 따라 집들이 스무 채 넘게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빅토르 씨는 1937년 한인들이 강제 이주 당한 뒤에도 이곳에 한인들이 살던 집이 그대로 있었고, 러시아인과 우데게인들도 같이 살았다고 했다. 한인들이 살던 집에서는 까만 돌로 구들을 놓아 난방을 했다. 마을 인근에는 40헥타르 규모의 군사비행장도 있었다. 1980년대 건초를 벨 때 한인들이 쓰던 옹기 조각과 농기구 파편들이 나오기도 했다.


카레이스키 아도에서 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한인 60여 가구가 살던 한흥동 마을이 있다. 한흥동으로 가는 찻길은 오래 전 없어진 데다 마을로 진입하는 옛길은 막시모프강의 거센 물살이 가로막고 있었다. 차로는 강을 건널 수 없어 긴 나무 막대기 하나에 의지해 카메라와 신발을 목에 메고 급류가 흐르는 막시모프강을 맨발로 건넜다. 강을 건너 40분남짓 걸음을 재촉해 목초지를 지나 키 높이로 자란 쑥대밭을 헤쳐 들어가니 그곳이 한흥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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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흥동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은 막시모프강을 막대기 하나에 의지해 맨발로 건넜다. ⓒ이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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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전 소볼리에프카 마을 이장은 키높이로 자란 쑥대밭을 헤치고 옛 한흥동 마을을 찾아 들어갔다. ⓒ이종호 기자


1937년, 1940년 두 차례 진행된 강제 이주로 한흥동과 카레이스키 아도 한인들은 수십년 피땀으로 일군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다. 한인들이 쫓겨간 뒤 한흥동에는 러시아인들의 집단농장이 들어섰다. 빅토르 씨의 아버지는 1958년까지 집단농장에서 방아간 책임자였다. 한흥동 집단농장에서는 귀리와 보리를 재배하고 건초를 깎고 갈아서 소 800마리와 말 100여 마리를 사육했다. 북한에서 온 한인들도 여섯 가구 살았다. 이들은 빻은 귀리를 펴서 너는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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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씨가 옛 한흥동 마을을 찾아 당시 마을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이종호 기자


앞서 걷던 빅토르 씨가 자작나무 한 그루를 가리키며 이곳에 학교가 있었다고 말했다. 졸업 기념으로 심은 자작나무, 백양나무들은 모두 열한 그루였다. 빅토르 씨는 자기 형이 한흥동에서 태어나 이 학교를 졸업했다고 말했다. 학교는 1962년까지 운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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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흥동 마을 학교가 있던 입구에 졸업 기념으로 심은 자작나무. ⓒ이종호 기자


1972년 농민들에게도 여권이 발급돼 한흥동 주민 절반은 막시모프카로 ‘소개’됐다. 나머지 주민들도 교육 기회를 찾아 한흥동을 떠났다. 사람이 살지 않게 된 한흥동은 1990년대 초반 마을 전체를 갈아엎고 목초지로 만들면서 버려진 땅이 됐다.


빅토르 씨는 15년 전 막시모프카 마을 이장이었을 때 카자흐스탄에서 한흥동에 살던 한인 후손이 편지를 보내왔다고 했다. 편지를 부친 사람은 자기 아버지를 모시고 한흥동에 와보고 싶다고 썼다. 빅토르 씨의 형도 자기가 태어난 한흥동에 가보려고 두 차례나 시도했지만 태풍으로 불어난 강 때문에 실패했다. 빅토르 씨는 한흥동에 한국인이 찾아온 건 처음이라고 했다.


억새와 쑥대만 무성한 차피고우 마을


2차 취재에선 우수리스크 서쪽 옛 한인 마을을 찾아 나섰다. 10월 29일 아침 일찍 우수리스크역을 출발해 험지 오프로드용으로 개조한 ‘델리카’를 타고 옛 차피고우 마을로 향했다. 길 안내는 우수리스크 일대 유적 발굴팀장을 했던 러시아 국방부 소속 알렉산더 연구관이 맡았다. 보리소프카를 지나 크로우노프카 마을 가기 전 옛 한인 공동묘지부터 들렀다. 지금은 모두 파헤쳐졌지만 이곳 무덤들은 모두 5000여 기나 됐다. 야산에 수북이 쌓인 낙엽들 사이에 옛 무덤 흔적을 찾던 중 한자로 ‘차룡산묘’라고 쓰인 묘지석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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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 서쪽 보리소프카와 크로우노프카 사이에 있는 야산에 한인 공동묘지 터가 있다. ‘차룡산묘’라고 쓰인 묘지석. ⓒ이종호 기자


크로우노프카 마을에는 한인들이 사용하던 우물이 남아 있다. 마을 들머리 마가진에서 한인 2세 홍신현 씨를 만났다. 홍씨의 아버지 홍봉근 씨는 1937년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됐다 1957년 크로우노프카 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아버지를 따라 다시 마을로 돌아온 홍신현 씨는 이곳에서 60년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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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우노프카 마을 들머리 마가진(가게)에서 만난 한인 2세 홍신현 씨. ⓒ이종호 기자


크로우노프카 마을 서쪽 야산에는 석공들이 맷돌을 만들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석재가 흔했던 이곳에서 만든 맷돌들은 인근 농가로 실려가 긴요하게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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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우노프카 서쪽 야산. 맷돌을 만들다 만 돌들이 흩어져 있다. ⓒ이종호 기자


움푹 패인 진흙길을 달려 차피고우 옛 마을 터에 도착했다. 억새와 쑥대만 무성한 너른 평원이 펼쳐졌다. 이곳은 우즈베키스탄에서 두 차례나 노동영웅에 오른 김병화가 1937년 강제 이주 전 살던 곳으로 유명하다. 1936년 크로우노프카에는 65가구의 한인이 살고 있었고, 이곳 차피고우에는 마을길을 따라 500미터 간격으로 줄지어 서 있던 판잣집에 120가구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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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와 쑥대만 무성한 옛 차피고우 평원. ⓒ이종호 기자


차피고우 마을에서 서남쪽으로 강줄기를 따라 골짜기 구석구석 옛 한인 마을들이 숨어 있었다. 참나무가 빽빽한 한 야산에서는 러시아식으로 주위에 철망을 두른 무덤을 발견했다. 강제 이주로 벌초조차 할 수 없었던 어느 고려인이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에서 자란 또 다른 후손과 함께 몇십년 뒤 조상의 무덤을 찾아 이렇듯 묘소를 정비했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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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식으로 철망을 두른 옛 한인 무덤. ⓒ이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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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한인 마을에 남은 흔적들을 설명하는 알렉산더 연구관. ⓒ이종호 기자


이종호 기자

통역=이동명
자문=배성동 작가, 현지연 연구원
도움=세르게이, 알렉산더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