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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산은 원효의 척판구중 설화가 깃들인 곳이다.>


겨울이다. 꽃눈 내리더니 비눈 내리는 시절이 되었다. 때론 걷는 것은 역사문화의 흔적을 찾는 길이다. 올해 2017년은 원효(617~686) 탄생 1400년이 되는 해였다. 원효가 얼마나 대단한 스님이었는가는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은 ‘성사(聖師)’라, 중국인은 ‘해동보살’이라 칭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원효가 활동하던 시대는 삼국의 격변기에 해당한다. 그는 논쟁의 화합을 도모한 화쟁의 사상가였다. 민중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주고, 극락정토와 열반의 세계로 인도하는 삶을 살았다. 영남알프스 영축산의 맞은편 양산 천성산 원효의 길을 다녔다. 원효의 이야기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호계리 반고굴, 내원사, 원효암, 천성산 화엄벌이 그곳이다. 원효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해골물, 요석공주와 설총, 나무아미타불일 것이다. 양산 천성산은 원효의 ‘척반구중(擲盤救衆)’ 설화와 관련된 곳이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


원효(元曉)는 우리말로 ‘첫새벽’이다. 어릴 때 ‘새벽(始旦)이/새밝이’라고 불렸을 것 같다. 15세에 출가한 원효는 특정한 스승 없이 공부하였다. 원효와 의상은 당나라 유학을 시도한다. 두 번째 유학길에서 45세 원효는 저 유명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홀연히 깨달았다. 간밤에 먹은 물과 아침의 물은 같지만, 그 물을 바라보는 마음이 달라 물을 대하는 행동이 달랐다. “온 세상은 모두 마음뿐이요, 이치는 모두 인식일 뿐이다(三界唯心 萬法唯識).”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사상을 득도한 것이다. 그러다 667년 52세경 어느 날 원효는 요석궁의 과부를 만나 훗날 이두를 창안한 아들 설총을 낳고 환속한다. 그는 우리 불교사에 최초의 파계승이자 대처승이었다. 환속한 후에는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불렀다. 그리고 그는 수없이 많은 거리를 돌아다니며 조롱박을 두드리고 노래하고 춤을 췄다. 그의 무애행(無碍行)은 걸림 없는 자유인 그 자체였다. 누구도 삼국통일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시시때때로 죽음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조롱박은 원효가 민중 속의 부처를 만나는 매개체였다. 부처의 이름을 알게 하고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면 극락정토에서 왕생한다고 가르쳤다. 여기에 ‘나무관세음보살’을 덧붙인 것은 의상대사이다. 원효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 내세구복적인 정토종을, 의상은 현실의 어려움을 구제하는 현세구복적인 화엄종의 문을 열고 완성한 사람이다. 춤과 염불로 민중을 구원한 원효는 승려 사회에서 배척의 대상이었다. 아무튼 파계 이후 원효가 양산지역에 내려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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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호계리 마애불이 있는 반고굴은 원효의 수도처이다.>


요석공주를 멀리한 산막의 반고굴


양산IC에서 롯데제과를 지나면 산막공단 진입로 입구에 ‘마애불 석굴암’ 이정표가 보인다. 산막(山幕)이란 말은 요석공주가 설총을 안고 와서 원효를 만나기 위해 산에 막을 치고 기거했다는 것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원효는 공주를 만나지 않고 호계리 반고굴에서 수행 정진을 하였다. 호계(범실)는 호랑이 계곡이니 사람의 인적이 드문 깊은 곳이었으리라. 차는 1단 기어로 숨 가쁘게 올라간다. 호계리 마애불은 자연석 바위에 높이 2.20미터 규모로 활짝 핀 연꽃무늬 받침 위에 새겨져 있다. 투박하고 질박하다. 커다란 사각 얼굴, 길게 감은 눈, 굳게 다문 입과 뾰족한 입술, 어깨까지 처진 귀,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한 편이다. 총탄 자국도 있다. 약사여래불로 보인다. 최근 보호각을 세웠다. 그런데 마애불 바위 밑에 동굴이 있다. 원효의 수도처라 알려진 반고굴이다. 온돌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동굴 약수 맛이 참 좋다. 신라 때는 원효대사의 수행처이지만 조선후기는 천주교인의 피난처였다. 반고굴이 있는 석굴암은 특정 종단에 소속되지 않고 개발제한구역이라 임시건물 형식이다. 무정스님은 소탈하다. 1990년대부터 대밭에 가려진 이곳을 울력하며 문턱 없는 절로 만들고 있다. 원효가 수행했다는 반고굴이라 여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반고사지(槃皐寺址)는 (울산) 영축산 서북쪽 대곡천 반구대에 있다. 1970년 12월 문명대 교수는 반고사지를 찾다가 천전리 각석을 발견하였다. 반고사지 석불좌상은 현재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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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판구중 벽화>




판자를 던져 천 명의 중국인을 구하다


한때는 원적산, 원효산이라 불리었던 천성산은 원효와 천 명의 제자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송고승전(宋高僧傳, 찬녕스님 988)>에 원효가 “때로는 상을 던져 대중을 구하였고(혹척반이구중或擲盤以求衆)”라는 구절이 있다. 이 내용이 확대되고 구체화 되어, <천성산 운흥사 사적(千聖山雲興寺事蹟, 우운당 진희 대사, 1697)>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운흥사는 원효가 창시했는데, 진평왕 39년(원효 탄생 617년 때라 다소 문제가 있다)이다. 당전(唐傳)에 이르기를 선덕왕 때 계림부 단석산 척반대에 있었다. 선정에 들어 관상(觀想)하니 중국의 큰절 법운사(法雲寺) 일천 승려가 안거하고 있는데 요사한 한 승려의 죄로 모두 함몰할 조짐이라 원효가 이름을 적고 소반 하나를 던져 구했다. 그 천 명의 스님이 원효를 스승으로 모시고자 찾아왔다. 양식과 거주할 곳도 막연하여 돌아다니니 산신령이 나타나 말하길, 원적산(圓寂山)이 마땅히 거주할 곳이라 했다. 원효는 천 명의 사람을 이끌고 이 산에 주석하였다. 정족봉(鼎足峰) 대둔대(大芚臺)에 올라 세 줄기의 산맥을 둘러보고 삼둔(三芚-중둔암, 대둔암, 소둔암), 삼방(三防-장방사, 중방사, 소방사), 삼적(三寂-원적암, 명적암, 묘적암 ) 등에 암자 89곳을 세웠다. 천 명의 스님이 안거했다. 산 이름을 천성산(千聖山)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단석사에는 천 명이 원효를 찾아왔으나 이미 원효가 열반하여 탑을 쌓고 원효의 명복을 빌고 갔다는 ‘천탑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문무왕 13년(673)에 원효가 창건한 부산 기장의 장안사 척판암에는 운흥사와 다른 이야기가 전해온다. 중국 종남산 태화사 대웅전이 산사태로 매몰될 것을 알고 판자에 ‘해동원효척반구중(海東元曉擲盤救衆-신라 원효대사가 판자를 던져서 사람들을 구한다)’ 글자를 적어서 구했다고 한다. 나머지는 암자 이름 등은 다르지만 운흥사와 유사하다. 그런데 보운자(普運子) 희근(禧謹)이 쓴 <척반대사적기 擲盤臺事蹟記>는 그 무대가 북한의 묘향산 척반대이다. 여기에는 중국의 어떤 곳인지도 없고 단지 판자로 사람을 구한 내용만 있다. 아무튼 역사와 전설이 때론 뒤섞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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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니 수행도량 내원사는 언제나 고요 속에 있다. 입구에 산신 외벽화가 있다.>


원효는 자생적 한국 불교의 상징


실재 중국 스님이 오지 않았다고 하여도 원효의 신통력이 중국, 일본에까지 알려졌다. 심지어 불교의 원산지 인도에까지 그의 이름이 알려졌다. <삼국유사>의 일연이 말했듯이 “원효는 이름 그대로 불교를 처음으로 빛나게 한 사람”, 신라 불교의 새벽(曉)이었다. 그는 중국 불교가 아닌 자주적 불교이론을 펼쳤다. 그가 남긴 <금강삼매경론>, <십문화쟁론>, <대승기신론소> 등은 그의 학문적 경지를 보여준다. ‘경(經)’이 붓다의 글이라면, ‘론(論)’은 불경에 대한 논문으로 붓다 제자의 글이고, ‘소(疏)’는 론에 대한 고승의 주석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원효의 경지는 붓다의 제자와 고승의 반열에 있다 할 것이다. 특히 그의 <금강삼매경론소>를 <금강삼매경론>으로 변경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경지는 높이 평가되었다. 원효는 한국불교의 자생성과 자주성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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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암은 한창 불사 중이다. 신장바위가 암자를 외호하고 양산시를 바라보고 있다.>


절 입구에 산신각이 있는 비구니 사찰 내원사


‘척판구중’ 이야기는 확대 재생산된다. 원효는 지금의 내원사 입구 다리에서 산신을 만나게 된다. 산신의 말을 따라 원효는 89 암자를 짓고 설법을 한다. 산신각은 대부분 사찰의 가장 안쪽에 차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원사는 가장 바깥쪽에 산신각이 있는 거의 유일한 사찰이다. 그런데 산신각에는 원효와 관련한 어떤 것도 없다. 산신각에서 내원사까지 3킬로미터는 가히 소금강산이라 할 만한 풍경이다. 포장길이라 걷기에는 다소 불편해도 기암과 계곡을 바라보는 매력이 있다. 금강암 암벽에 손병희가 그 제자와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다. 내원사 안 주차장 개울 건너편 산 중턱에 원효와 최제우가 수행한 적멸굴(적미굴)이 있다. 내원사는 원효 이후 의천이 중건했고, 일제강점기에는 경허의 법제자 혜월스님이 주석하여 운봉, 향곡 등 많은 선승을 배출했다. 한국전쟁 이후 완전 소실된 내원사는 수옥(守玉) 스님에 의해 비구니들의 사찰로 변모했다. 1959년 선해일륜(禪海一輪) 선방을 완공하여 참선 수행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다. 내원사에는 출입금지 구역이 많다. 내원사 홈페이지에는 창건연대를 단지 선덕여왕 때라고 기록하고 있다. 척판암보다 30여 년 앞서니 차이가 크다. 운흥사지에는 내원암이 보이지 않는다. 연대적 기록이 모두 불일치하다. 하지만 현재 미타암, 원효암을 비롯해 천성산의 대부분 암자는 내원사에 속해있다.


햇살에 눈부시게 밝은 마애불이 있는 원효암


천성산 아래 원효암이 있다. 암자 가까이 차량으로 갈 수도 있어 예전보다 접근도가 높다. 굽이굽이 산길을 5킬로미터 올라간다. 홍룡사에서 걸어가면 편백나무 숲이 있어 걷기에도 좋다. 암자에 오르면 아래로는 호계리 마애불이 있는 산막공단이, 멀리는 양산시와 부산 금정산이 눈에 들어온다. 맞은편 오룡산 쪽의 골프장과 밀양으로 넘어가는 송전탑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원효암은 한마디로 기묘한 바위들이 많다. 용왕당 뒤에는 원효가 열반에 들면 떨어질 것이라던 신장바위가 있다. 의상대 뒤에는 관세음보살 바위와 거북바위가 있다. 대웅전 바로 담벼락 아래에는 부처바위가 있다. 그리고 백팔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1991년 여름 천둥 번개가 부처형상을 만들었던 바위가 있다. 통도사 월하 대종사는 이를 ‘천광약사여래보살’이라 이름 하였다. 전해오는 말에 원효스님이 용왕당 토굴에서 수행하고, 서쪽 바위 의상대에서 의상스님이 수행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의상대에는 두 분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1976년에 만든 ‘원효암 호국사자후 범종’에서 통도사 극락암 경봉스님의 현판과 주련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원효암 아미타삼존불을 보아야 한다. 오전에는 햇살에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오후 되면 밝은 빛에 삼존불이 환히 드러나 절로 합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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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암 신장바위 아래에 있는 아미타삼존불, 마치 불화를 바위에 새겨놓은 듯하다.>


화엄벌 억새는 바람에도 꺾이지 아니하네


원효암에서 의상대 아래로 난 1.7킬로미터를 걸어가면 화엄벌이 나타난다. 원효는 천성산에서 <화엄경>을 강론하였다. 그곳이 화엄벌이다. 풀이 자라지 않는 곳은 원효가 화엄경 강독 때 책을 놓은 자리라고 한다. 중내원암에는 큰 북을 달아놓고 산내의 모든 암자가 다 듣고 보이게 했으므로 집붕봉(集朋峰, 짚북재)이란 이름이 생겼다. 탁발 갔던 제자가 칡넝쿨에 걸려 양식을 다 쏟고 오자 원효가 흰 종이 한 장을 그 자리에 버리고 오게 하니 그 이후로 내원사 계변에는 칡넝쿨이 잘 자라지 않았다. 원효의 가르침을 받은 승려들은 988명이 오도(悟道)를 하였다. 나머지 8명은 대구 경산의 팔공산(八公山)에서, 4명은 문경의 사불산(四佛山)에서 오도하였다는 이야기로 또 번졌다 (운흥사 사적기에는 사불산 이야기만 있다).


 양분이 많지 않은지 억새 키가 작다. 화엄벌은 35만 평가량이고 화엄늪은 3만5000평 남짓이다. 스펀지처럼 물을 머금는 이탄층(泥炭層)은 풀과 나무가 죽어서 일부는 썩고 나머지 섬유질은 그대로 남으면서 만들어진다. 억새 등등이 무리지어 자라지 않으면 이탄층은 생겨날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화엄벌에 늪지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의 출입이 금지된 군부대가 한때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때 한국의 경치 좋은 곳은 모두 군인이 군사적 목적으로 주둔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덕분에 많은 자연과 경관이 보존되었다. 이 역설을 무엇이라 할까. 이제 사람의 발길이 점점 늪지를 사막화하고 있다. 화엄벌의 세찬 바람은 스님의 강론 사자후와 같다. 억새는 그 강의를 듣는 제자들이다. 겨울바람은 매섭고 억새는 부러지지 않았다.


원효로 인해 천성산이 있게 되었지만 세간에 이 산이 유명하게 된 것은 내원사의 지율스님에 의한 도룡뇽 소송사건 때문이었다. 2001년 4월 천성산을 파헤치는 KTX 터널공사 현장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고 늪지 훼손과 생태계 파괴를 막기 위한 소송을 하게 되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무튼 단식 묵언 삼천배 농성과 소송을 하였음에도 13.5km 원효터널을 뚫었다. 환경운동 역사상 자연물(도룡뇽)이 소송의 주체가 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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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엄벌과 화엄늪을 수호하듯 비행하는 까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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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성산 정상에 쌓고 있는 평화의 탑>


천성산에서 영구평화를 기원하고


천성산 제1봉(922m, 원효봉)에 오르니 사방이 탁 트인다. 멀리 부산, 울산, 양산 사방이 다 보인다. 흐린 날이라, 첩첩 산들이 구름에 떠 있는 듯하다. 정상에 평화의 탑을 쌓고 있다. “평화로 하나 되자. 한반도의 평화 이곳에서 시작되다.”라는 구절이 바위에 흰색으로 쓰여 있다. 주변에 바위가 많지 않다. 그래도 돌 몇 개를 주워 탑을 쌓는 데 보탠다. 영구평화가 이 땅에 정착되기를 기원한다. 겨울바람이 차다. 까마귀와 독수리가 비행을 한다. 독수리는 도도하고 까마귀는 깜찍하다. 귀를 에는 듯한 바람에 억새가 부러지지 않듯 한반도의 평화도 지켜내야 한다. 천 명의 성불한 스님들은 뒤에 모두 천성산 바위로 남았다고 한다. 그 흔적을 천성산 제2봉(비로봉) 주변에서 볼 수 있다. 뾰족한 바위와 깎아지른 절벽, 운흥사 사적기에 있듯이 상서로운 구름이 모여 오오삼삼이라 백 층의 바위들을 이루고 있다. 원효암을 내려오다가 홍룡사를 들렀다. 89 암자의 하나였던 낙수사(落水寺)였다고 한다. 홍룡폭포는 특히 장마 끝 물 떨어지는 모습과 가끔 어리는 무지개가 장관이다. 초겨울이라 물은 이끼를 타고 흐른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봄은 가까워지리라.


이병길 영남알프스학교 교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