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김명숙

김명숙 (주)나비문고 부대표 ⓒ이종호 기자


울산사회선교협의회 노동상담소


(지난호에 이어)
김명숙 부대표(이하 ‘김’)=그 와중에 박종철 사건이 터집니다. 3월에 선경에서 해고되고, 그때쯤 박종희 선배랑 울산대 친구들을 만납니다. 그전에 울산사회선교협의회 생기고 노옥희 선생님 해직되고 그 타이밍이고 협의회 안에 노동상담소를 만들기로 하면서 “야 잘 됐다. 일 같이 하자.” 그렇게 된 거죠. 현장을 바로 갈 순 없으니 같이 하게 됐죠. 실무간사까지는 아니고 노 선생님하고 상담소 준비하면서 가투(거리투쟁)하고, 모두가 거기 있으니 글우리고 뭐고 간에 전부 국민운동본부 생기면서는 길거리에서 살고, 매일 집회하고, 매번 유인물 뿌리고 2인1조로.


선경 잘리고 투쟁하고 상담 업무하면서 유월항쟁 끝나고 노동자대투쟁 속에서 노 선생님하고 바빠 죽는 줄 알았어요. 매일 홍보물 쓰고 어용노조 뒤집고 민주노조 세우고 김진석, 김종훈도 학교에 있을 때 울대 총학생회 애들이랑 아침에 출근길에 뿌리고. 계속 노 선생님하고 그걸 하니까 중전기노조 설립부터 중공업노조도 쫙 뿌리고 매일 했잖아요. 에이포(A4)보다 조금 작은 종이에. 저는 인쇄소에서 살았죠. 노 선생님이랑.


그러면서 내 인생의 중요한 선배인 배남효 씨를 만나죠. 천창수 형 선배인데 배 선배가 소모임을 꾸려요. 태광에 노 선생님 제자인 김보석 씨하고, 이영도 씨도 같은 소모임이었어요. 상담소 계속 있으면서 고민이 되는 게 노동운동 하려면 상담소에 있으면 안 되고 현장으로 가야하는데 노 선생님 혼자 두고 갈 수도 없고... 노 선생님이 붙잡았지만 나는 현장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한성기업으로 갑니다. 450명 있던 장생포에서 제일 큰 회사였죠. 거기서 글우리에 나오던 선배를 만났어요. 관리자더라고요. 서로 모른 척하자 그랬죠. 후배가 운동한다고 들어왔으니까 괴로웠겠죠.


그러다가 한성에 젊은 사람도 없고 해서 현대 쪽으로 알아봐야겠다 해서 알아본 게 현대종합목재였어요. 종합목재가 여성 비율이 2할이라 내 이름으로 들어가자고 해서 고졸로 하고 나는 그렇게 하고, 이영도 씨도 같이 들어갔습니다. 임금도 낮고 이동도 심했는데 목재는 그저 거쳐가는 곳이었죠. 마구 뽑기도 하고 여자도 필요하고 학력도 따지지 않으니 그래서 결국 목재로 같이 들어가게 됐죠. 그러면서 같이 운동을 하게 되고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고 연애하게 되는 사이가 됐죠.


386은 맑스 도그마에 빠졌던 세대


현장 가서는 어떠냐면 주마다 모여서 학습을 하는데 소모임 할 때 보면 혁명 될 거 같은데 현장에 혼자 있으면 혁명이 안 될 거 같은 거라.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깨달음이 들어요. 맥락없는 이야기지만 우리 시대 386은 어땠냐면 맑스 도그마에 빠졌던 세대예요. 맑스 이론은 완벽하고 하여간 수용자들이 비판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거죠. 나는 원래 학생운동 안 하고 예쁘고 아기자기한 거 좋아했던 예술가 스타일이었는데, 본래 작가 하고 싶었으니까. 원래는 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그림을 좋아했으니 잘 한다는 칭찬도 들었고 창의적인 거 손으로 만드는 거 좋아했어요. 중학교 때 클래식, 그중에서 베토벤을 좋아해 전기를 찾아보고 사진도 걸어놓고 음악이 너무 좋잖아요. 팝송도 좋아했고 영화도 책도 좋아하던 문학소녀였는데... 그러고 운동권으로 오니까 언니 옷 예쁜 거 독서모임 때 그걸 입고 가니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냐 이런 눈초리예요. 내 취향이 부르주아 취향이라고 비판하던 자도 있었어요. 취존이 안 되네. 취향존중. 그땐 그랬죠 뭐.


교사운동이나 지금은 다 인정되는데, 운동에 여러 영역이 있는데, 교사하면서 독서운동하면 되겠다 싶었는데 그때는 교직으로 가는 걸 이기적인 행위로 규정했어요. 현장으로 안 간다고 부모님과 절충하려던 입장이었는데... 너무 경직되고 취향이나 삶의 다양한 단면을 존중해주지 않는 분위기가 깝깝하고, 나도 책을 많이 읽었지만 노동운동한다고 학습하는데 너무 어려운 거에요. 선배 하는 말도 어렵고 내가 책을 좋아해서 들어왔는데 내가 무식해서 운동 못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진짜 지식인들 지 좋은 일 하려고 그런 거구나. 나도 대졸이지만 평범한 사람이었는데 운동권이 말 쓰는게 너무 어렵고 보라는 책도 어렵고... 운동권의 그런 분위기가 갑갑했어요. 취미도 없애라고 그러지 않나. 문화생활도 접어라, 치마 말고 바지만 입어라, 화장은 내가 싫어했지만 치마는 입으면 편하거든요. 답답한 인간이 돼 버린 거죠. 필요에 의해서 하면서도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고.


원칙주의라는 것도 경직된 거죠. 상대가 있으면 대화하고 타협하는 게 아니라 정해진 원칙에 따라 해야 한다는 게 너무 불편했고 또 한 가지는 나는 평화주의자인데 기본적으로 예전부터 운동권에서는 안 좋게 보더라고요. 내가 학문이 짧아서 그런가 폭력주의가 너무 드셀 때였는데 약자가 논리적으로 이기려면 비폭력 평화주의가 최고고 막강한 권력자들과 폭력으로 맞서면 계속 말려들지 않나? 비폭력 평화주의를 말할 수 없는 게 운동하면서 든 갑갑함이었죠. 지금은 많이 바뀌었는데...


89~91년 사이에 소련이 무너지고 운동권 와해되고 선배들도 떠날 때 고민했는데 우린 민주주의를 위해서 도전해야 할 게 많은데 왜 운동권을 떠나지? 혁명을 안 해도 할 일은 많다 하고, 선배들이 허약하다 생각하고... 90년대 중반에 문제의식이 나는 계속 있었어요. 갑갑한 문화가 불편하고 스탈린주의는 아닌 거 같다 생각하고 러시아 혁명도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가 그대로 카피하고 좇아가는 건 문제다 생각했죠. 정진상 교수를 초대해서 손석춘 씨가 쓴 소설 <아름다운 집>도 읽고 토론하고, 정 교수가 공부를 많이 해서 주사파에 대한 시각, 스탈린주의에 관한 시각, 제가 의문나는 걸 물었죠. 그 시간에 또 많은 걸 깨닫는데 우리 80년대 초 운동권의 무지함, 유럽이나 전 세계적으로 러시아 혁명이나 스탈린주의 문제, 프롤레타리아 독재 문제 등등 학술토론 많이 하고 유럽에서는 합의하고 그랬는데 남한 운동권에서는 이미 끝난 이야기가 차단돼서 들어오지 않았던 거죠. 스탈린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하면 안 된다고 배웠는데 레닌 사망할 때 스탈린이 레닌 유언을 조작하고, 정 선생님이 다 이야기해준 거죠. 그걸 듣고 이 뭐야, 우물 안에 갇혀서 운동할 때 이런 문제가 생기는구나, 역사가 어떻게 조작되는지를 알게 되고...


각자의 삶이 존중을 받아야 하는데 다양성 같은 걸 존중하지 않는 문화가 노동운동에서도 그게 남아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현대종합목재 파업과 8개월 구속


이종호 국장(이하 ‘이’)=종합목재 현장생활은 어땠나요?


김=종합목재에 88년 9월쯤 들어갔는데 12월에 파업이 일어나요. 회사가 연말 성과급 약속을 어긴 거죠. 부서별로 대표도 나오고 자발적 파업이 일어나니까 이영도 씨도 고민하다가 나섰죠. 바로 스타가 되고 민주파들 모아서 어용노조 민주화하자 이렇게 됐죠. 성과급 투쟁 이기고 민주화투쟁도 이기고 하면서 현대계열사 다른 데는 다 안 하는데 유일하게 현대종합목재가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에 연대를 결의해요. 그러다가 우리 신분이 드러난 거죠. 사측에서 삐라를 뿌려서 김명숙이 조종한다, 동거한다, 내연관계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사귄다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집회 때 부모님도 알고 계시고 서로 사귀는 사이다 얘기해요.


쇠붙이 회사들 틈에서 목재가 정말 파업을 잘 했는데 아주머니들은 파업하면 밥하는 것도 잘하고 지침대로 시간 맞춰서 투쟁 잘하고 정말 여성의 힘이 빛나던 파업이었어요. 잘난 남자들은 권력투쟁하느라 회사에 쑤시고 당하고 그랬지만 여성 노동자들은 젊은 노동자들을 자식처럼 생각하고 노동조합을 신뢰하고 합의한 건 잘 지키고 그랬죠.


투쟁이 길어지면서 단식 농성도 하는데 단식 풀고 이선희(박유기 전 금속노조 현대차지부장 아내)랑 나랑 구속돼요. 초범이라 풀려날 줄 알았는데 90년 4월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 때문에 갑자기 뒤집어지면서 실형 8개월이 떨어져서 부산구치소로 가요. 변호사도 나갈 거라고 했는데 부산 가서 8개월을 살았습니다. 어이없었죠. 감방 있는데 옆방에 김진숙 씨가 들어와서 환영식 해주고 메이데이 기념식도 우리들끼리 하고 그때 재밌었어요. 석방 이후에 해고자 생활을 하면서 현장 아주머니들을 만났는데 “그만 해라” 그래요. 부모 마음인거죠. 아줌마들이 노동운동 그만하고 결혼하라고 그러는 거죠. 미치는 거죠.


민주노총 사직, 비정규직 여성노조


지역에 현대계열사 말고 태광 같은 데서도 해고자들이 생기니까 현해협(현대그룹해고자협의회)이 울해협(울산해고자협의회)으로 바뀌어요. 난 거기서 울해협 사무국장을 합니다. 북한술도 팔고 티 판매 재정사업도 하고 그랬죠. 들쭉술은 없어서 못 팔았어요.


울노협(울산지역노동조합협의회)준비위에서 상근자 뽑는대서 큰애 임신하고 있을 때였는데 노 선생님하고 의논해서 들어갑니다. 울노협준비위는 출발할 때부터 엔엘, 피디 정파투쟁이 시작되는 전쟁터였죠. 상근자 티오 문제로 갈등이 심해지고 일을 하면서도 정파갈등이 심각했죠. 많이 시달렸죠.


민주노총 울산본부가 되면서 정책을 담당했어요. 2000년에 그만두는데 어떻게 보면 기자회견문 쓰는 게 일이었어요.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해지는데 언론플레이만 해서는 안 된다,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동운동하고 사회운동 하는데 내부갈등으로 소진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내가 운동하면서 보람이 있고 기뻐야 하는데 너무 힘들고 우울하더라고요. 가정생활도 어려운데 많은 시간을 투여한 지역본부 일을 하면서 내가 죽어 있다는 느낌이 계속 들어서 친한 사람에게 그만 둔다고 하니 다들 말리대요. 주요 직책이 관두면 어떻게 하느냐고요.


근데 그걸 떠나서 내가 의미 있게 살고 사회적으로 기여해야 하는데 이건 내가 너무 불행하고 존재감도 의미도 없다고 느껴졌어요. 독서토론도 하고 싶은데 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고, 비정규직 정책도 해야 하는데 모든 게 정규직 대공장 중심이니까... 계속 고민하다가 가난하게 살아도 운동을 하고 싶으니 민주노총을 사직하고, 비정규직 노동운동하면서 운동 내부의 성차별 문제와 부딪혀봐야겠다 그랬죠.


나는 순진해서 운동하는 남자들이 기본적인 성평등의식이 있을 줄 알았는데 성희롱 성추행 사건도 생기고 너무 비민주적인 걸 많이 목격하다보니 노동운동하는 남자들 정책적으로는 진보적이지만 나머지는 아닐 수도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동녘 출판사에서 <여자는 왜?>라는 책이 나왔는데 그런 갑갑함들을 공부하고, 민주노총 여성국 만들고 여성관련 교육도 하고 그랬는데 민주노총 관두면서 여성노동자 노동운동은 계속 해야 된다는 생각에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 중심으로 활동해야겠다 다짐하고 그런 모임을 최미아, 윤현경, 고은희 씨 등과 하죠.


그러다 한겨레신문 뉴스 보니까 여성노조가 있대요. 울산에도 협상권과 파업권을 갖는 여성노조가 필요하다 논의가 돼서 활동가들 선에서 ‘평등세상을 여는 울산여성들’하고 여성노조 두 축으로 가기로 합의했죠. 여성노조 울산 준비위가 만들어지면서 제가 대표가 됩니다. 전국여성노조와 무관하게 신문 보고 자발적으로 생겨난 거죠.


큰애 어릴 때 생협 준비위에도 참여해요. 노조의 협소함을 극복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이렇게 하다보니까 전국여성노조에서 연락이 와요. 전국여성노조에서 비정규직 영양사 노조 설립하고 비정규직 여성을 조직하기 시작했죠. 전국여성노조와 연결되니까 할 게 많더라고요. 소모임도 하고 그렇게 하다가 송철호 변호사 선거사무실 쓰던 곳에 사무실 내서 들어갑니다. 우연찮게 네팔노총 초청으로 네팔 다녀온 뒤에 교육청 앞에서 영양사들 투쟁을 신나게 했죠. 1년 내내 교육청 앞에서 살았죠. 2년만에 교육청하고 협상해서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합니다.


2006년 지방선거...지금도 눈물이


민주노동당 울산시당에 김광식 씨가 시당위원장이 되고 여성할당제도 있고 비정규직 활동을 하니 그쪽 티오로 활동해야 한다고 해서 시당부위원장이 됩니다. 여성위원장을 겸해... 그 전에 민주노총 있을 때 민주노동당 여성 중앙위원을 했어요. 그때 주대환 선배가 많이 챙겨줬어요.


그 즈음에 시장선거 논의가 됩니다. 투쟁은 일단락되고 거기서 시장 후보 누가 하느냐, 김창현 씨, 윤인섭 씨, 정창윤 씨 등등으로 각자 정해지고, 내 생각엔 세 명 다 아닌 거 같아요. 그러다 고민고민하다가 노옥희 선생님도 포함된 후보군 명단을 만들어서 장태원, 김연민 선생님 등등 서른 명을 만났어요. 울산지역 운동을 쭉 했으니까 여러 사람들을 다 만났어요. 시장선거를 고민하는 사람은 다 만났어요. 이 후보군 중에 누가 좋으냐 모니터를 하니 이중에서는 노옥희다 그래요. 그런데 노 선생님이 계속 안 나간다고 하시니 최종 답변을 받으려고 전교조 선생님 몇 명, 박경숙, 현대중공업 몇 명, 비정규직 몇 명 해서 십여 명이 답변 들으러 갔어요. 바빴어요. 잠도 못 자고. 그러다가 돌아가면서 얘길 한 거야. (눈물) 그때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다 ‘노’할 거라고 했는데 거기 있는 사람들이 다 돌아가면서 당신이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드린 거예요. 노 선생님도 원래 ‘노’하려고 했는데 그분들 보고 차마 ‘노’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하겠다고 한 거죠. 2006년 지방선거 때.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노 선생님이 출마를 결정한 거죠. 나중에 욕도 많이 듣고, 생고생하고.


민주적으로 진행했는데 같이 해야 할 사람들이 멘붕 상태에 빠져서 연락이 안 돼요. 나중에 보니 일주일 어디 쉬었다 왔대요. 마음 달랜다고. 이영도, 천창수 씨하고 노 선생님 출마를 바랐던 사람들이 사무실 구한다고 쫓아다니고 난리법석이었어요. 돌이켜 보니 초보여서 그랬던 거 같아요. 뒤통수가 이런 게 뒤통수구나. 내 인생에 충격이 어마어마했어요.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지. 이미 딴 사람을 출마시키기로 해놓고.


내가 그렇게 만들었는데 시장선거 올인해야죠. 그래 가지고 여성노조 지부 상근 못 한다고 하고, 울산지부가 그래서 울산여성회로 넘어가요. 겸한 거죠.


평등여성 해산, 울여문 창립


평등세상을 여는 울산여성회는 급진주의 입장이었어요. 평등여성 회원인 학습지 교사가 집에 가다가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요. 그런데 평등여성에서 국가 상대로 손해배상청구를 하기로 결정해요. 의욕이 앞서서 피해자 심리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내린 결정이었어요. 너무너무 힘든데 소송을 진행한 거죠. 소송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죠. 난 패소할 거라고 봤어요. 1심 패소하고나서 피해자가 폭발을 해서 소송 진행했던 평등여성 회원 두 명에게 너거는 인간이 아니다, 논문 쓰려고 나 이용한 거냐, 평등세상 활동 소재로 쓴 거 아니냐 그런 거죠. 그 사건 때문에 한 명은 울산을 떠나고 또 한 명은 여성운동을 접어요. 평등세상도 문을 닫게 돼요. 단체는 방치돼 있다가 2년 후에 겨우 수습해서 자료는 노동역사관에 주고 우리 사무실에도 좀 오고...


시장선거 지고 선거운동 열심히 한 친구들끼리 노 선생님하고 열 명 정도 모여서 1박2일 토론했어요. 대중적 단체, 아예 여성정치단체를 만들자 하는 토론이었는데 정치로 바로 가는 건 무리다 싶어서 대중적인 걸 하면서 정치 얘기도 할 수 있는, 옆집 아줌마도 데리고 올 수 있는 여성교육문화센터 준비위로 하자 그렇게 됐어요. 내가 대표가 돼서 독서토론도 하고 문화사업을 죽 하다가 사무실을 다운동으로 옮긴 게 2007년이었어요. 그때 중심을 뜻하는 센터 준비위보다는 울산여성문화공간 줄여서 울여문이 좋겠다 해서 이름을 바꾸고 2008년에 창립을 해요. 지역에 도서관도 없고 해서 꿈틀꿈틀 작은도서관으로 등록하고 지원금도 좀 받고 하면서 여러 사업을 했어요. 전업주부 중심으로 공부모임, 책모임, 동양고전 읽기 모임 등등 많습니다. 회원들이 경주 산내에 땅도 사서 작년부터는 농사도 짓고 소풍도 하고 재밌게 살아요.


소외계층에 한 달 백여 권 책 나눔
모든 출발은 자기...스스로를 돌봐야


이=나비문고 부대표는 언제부터 맡게 된 건가요?


김=이영도 씨가 나비문고를 너무 키워서 혼자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됐어요. 빚도 계속 쌓이고, 혼자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 된 거죠. 사회공헌 파트라고 해서 다문화자녀, 장애인들에게 한 달에 책을 백여 권 나눠주는 사업을 하는데, 독서문화운동도 하고 그거 맡기로 한 건데... 너무 과하게 해서 몸도 안 좋은데다가 내가 안 하면 안 되는 곤란한 상황이 돼서 인사관리도 내가 맡고 부대표를 하게 된 거죠. 성남동 예비사회적기업 입주 빌딩에 서점을 새로 내고 헌 책보다는 새 책 납품을 늘이려고 하고 있어요. 그런데 입주한 곳이 비리 문제가 불거져서 조금 곤란한 상황이에요.


이=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김=모든 일의 출발은 자기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버리면서 출발하면 그건 첫 단추가 잘못 된 거라고 봐요. 나는 내 삶에서 원하는 게 그거고 행복하고 멋있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자기를 보살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운동을 시작한 거고, 운동을 하면서도 자기를 가꾸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취미생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 성찰을 하고 명상을 하거나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기심리를 돌볼 수 있어야 하는데 일에만 매몰되면 판단력이 흐려져요. 그건 자기성찰도 안 되는 거고 활동가 개개인이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고 자기를 도구화하면 안 돼요. 부속품... 운동하는 사람들 중에 일중독에 빠진 사람들이 많잖아요. 스스로 생명체라고 생각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해요. 공부 안 하는 활동가들 많잖아요. 조합원들이 그걸 교육이라고 하냐고 한다니까요. 살아있는 인간의 기본이 공부인데, 특히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이 공부하지 않으면 그 운동은 문제가 생길 거라고 봅니다. 급변하는 사회에 공부를 안 하면 어떻게 대응을 하나요. 자기를 돌보면서 운동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운동할 때는 우리 개인사에 관심이 없었는데... 울여문하면서 개인을 안 거죠. 힘들었던 걸 지금 이야기하고... 최근에 술 마시면서 그걸 알았어요. 재밌기도 하고.


정리=이채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