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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 어려웠던 점이 말이 안 되어 남들 앞에서 부끄러움이 많았다. 이제 미용기술을 가지면서 자신감이 생기고 당당해졌다고 했다. >


부군인 김호철 씨는 몸이 불편한 장애인인데 8년 전 마음씨 고운 캄보디아 유하나 씨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유하나 씨는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어려운 미용필기시험을 통과하여 드디어 미장원을 개업했다. 이들 부부 이야기는, 늘어가고 있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다문화가정에 대한 이야기다. 아직 한국말을 잘 못해서 내용을 기자님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좋다는 유하나 씨. 미장원에는 손님이 여러 명 대기하는, 머리 손질하는 중에 인터뷰했다.  


1. 미장원 기술은 언제 배웠나?


공부는 잘 못했지만 기술은 배우고 싶어서, 다른 미장원에서 배웠다. 학원에서 기술자격증반만 3개월을 배웠다. 예전에 국가자격증 필기시험을 열 번 쳤는데 열 번 떨어졌다.


하도 안 되니 포기를 했었다. 캄보디아에서도 미용 관련 일을 했는데 한국에는 소용없는 자격증이더라. 언어가 서투르니 힘들어 하다가 작년에 다시 필기 두 번을 쳤는데 한 번은 떨어지고 두 번째에 붙었다. 네일 자격증도 가지고 있어 자격증은 두 개다. 미용사 자격증을 가지고 드디어 이 공간을 열었다. 이 공간은 좁아서 네일 아트까지 겸해서는 못한다.


머리 하는 것보다 ‘네일 아트’는 돈이 안 된다. 네일은 돈이 비싸니까 쉽게 이용하지는 못한다.
바로 오늘이 개업날이다. 동네사람들이 많이 온다. 머리카락은 자꾸 자라는 것이니 깎아야 하고, 동네사람들이 많이 도와주는 느낌이다. 오늘 새벽에 첫손님이 염색을 하고, 머리를 한 명 하셨고 지금 세 번째 손님을 받고 있는 중이다.


2. 원래 손재주가 있는 편이었나?


내가 말 똑바로 하지 못하니 힘들다. 애들 낳고 키우고 이것저것 기술 배우는 걸 계속했다. 어릴 때부터 머리 만지는 것을 좋아해서 캄보디아에서도 했는네 머리 디자인도 다르고 우리나라에서 딴 디자이너 기술이 한국에는 안 맞더라. 다시 국내에서 디자이너 기술을 배웠다. 자격증은 한 5개월 정도를 배워서 두 번 만에 합격했다. 디자이너 자격증을 배웠는데 열 번 정도 떨어져서 포기를 하다가 2년 전에 다시 공부를 해서 겨우 붙었다. 학교는 못 다녀 글을 알아듣기는 하는데, 말은 잘 안 된다.


읽고 쓰는 것은 되는데 말만 똑바로 안 되는 편이다. 같은 캄보디아 친구들 몇 년을 살면 저절로 잘 하는 친구들도 있는데 나는 말이 잘 안 된다. 머리 똑똑한 친구들은 금세 배우는데 나는 잘 안 되는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는 못 했다. 손재주는 좋다. 뭐든 잘한다.


3. 한국에 와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무언가?


말이 안 통하는 것이 제일 어려웠다. 남편은 평생 나에게 똑똑하고 ‘잘한다, 잘한다’ 하지만 나는 똑똑하진 않다. 지금은 괜찮은데 2~3년 전에는 눈물을 많이 흘렸다. 포기하고 있다가 2년 전에 다시 가서 배우는데 한국 사람들은 1~2주 보면 금세 배워서 시험 합격하는데 나는 5개월 정도, 애들 재우고 나서야 잠도 안 자고 책을 보는데 남편이 “이제 그만 자. 내일 공부해도 돼.”하는데도 난 책을 놓지 않고 밤새워 책을 봤다. 한동안 시험을 치지도 않고 꼬박 5개월을 책만 붙잡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시험을 치러 가니까 48점이 나오더라. 다시 한 번 시험을 쳤더니 61점이 나와서 합격했다. 그 때 합격했을 당시 시험시간에 다른 사람들은 다 나가고 나 혼자만 감독관하고 남았는데 “빨리 하세요, 빨리 하세요,”하면서 시간을 주면서 조금 봐주더라.


시험 다보고 나는 힘이 빠져서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는데 합격했다는 말을 듣고는 주변에 있는 사람 누군지도 모르고 확 끌어안았다. 그 때는 몸이 아픈 사람처럼 꼼짝도 못하고 있게 되더라. 내가 힘 좀 받으려고 그렇게 했다.


내가 나오면서 씨익 웃는 것을 남편이 보더니 “합격했어? 합격했어?”하면서 너무 좋아하더라. 그래서 끌어안고 둘이 같이 울었다. 나도 울먹이면서 “합격했어. 합격했어.”하면서 울었다.


미용학원에 나가 보니까 기술만큼은 내가 타고 난 사람 같았다. 필기는 그렇게 떨어졌지만 네일 아트도 한 번에, 헤어미용기술도 한 번에 합격을 하고, 실기는 다 한방에 합격했다. 실기는 안 떨어졌다. 학원에서도 “대단해. 대단해.”하더라.
다문화가정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에 대해 센터에서 자주 문자 오고 전화 오곤 하는데 시간대가 맞지 않아서 못 간다.


4. 그렇게 손재주가 좋으면 바로 채용이 되었을 것 같은데?


그 사람들은 손톱 손질하고 머리 만지는 것이 기술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오는 손님들 비위 맞추고 서비스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라 그런지 채용이 이뤄지지는 않더라.
내가 말이 잘 안되니 정말 피눈물 나는 고생을 했다.


5. 한국으로 시집을 오고 나서 친정인 캄보디아는 몇 번 갔다 왔나?


8년 동안 두 번 갔다 왔는데 주로 설 명절 때 갔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형제자매는 다섯 명이다. 집은 농촌인데 주로 벼농사를 짓는데 이모작으로 살아간다. 집에 엄마가 안 계시니까 아무 할 일도 없고 유명한 곳에 한 10일 동안 여행만 하고 놀다가 돌아왔다.
앙코르와트를 갔는데, 우리는 여행객이고 관광지에서 먹고 놀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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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슈퍼마켓이 부군이 운영해온 가게이고, 이제 그 한 모퉁이에 드디어 미장원을 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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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한 날이 바로 개업식 날이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개업떡이 배달되었다. >


6. 여기 미용실 개업하는 재산은 어떻게 모았나?


우리 형제들 다 도와줬다. 형제들, 시누이들이 다 도와줬다. 착한 시누이들이 많이 해줬다. 내가 이만큼 살려고 애쓴 것도 있지만, 나는 진짜 복이 많다. 남편도 잘 만났지만 형제들도 잘 만났다. 내가 하는 행동이 좋으니까 그 사람들도 저를 좋아한다. 남편도 말은 잘 못하지만 속이 깊다. 속이 좋고 깊으니까 나에게도 잘해 준다.


원래 이곳은 남편이 하는 슈퍼 가게 일부분을 밀어내고 벽을 쳐서 미용실로 만든 것이다. 형님이 건축 일을 하니까 2주일 동안 작업을 해서 이렇게 만들었다. 가게에 딸려 있는 방으로 물건을 옮기니까 살림방은 따로 얻었다.


큰 어려움은 없다. ‘말하는 것’만 어려웠다. 처음에는 100% 어려웠는데 지금은 한 50%정도만 어렵다. 전에는 말도 안 되고 부끄러운 것만 있었는데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기술이 있고 하니 뭔가가 든든하고 당당해진다. 캄보디아 친구들도 일 나가는 친구들 많고 미용기술 배운 친구들도 몇몇 있는데 합격이 안 돼 가지고 못한다. 필기가 안 돼서 포기했다.


필기할 때도 실기할 때도 내 마음이 편해야 하는 거지 안 된다. 가정에 남편이 마음을 편하게 해줘야 한다. 나는 책 잡고 공부하면 내 남편이 뭐라 안 한다. 일도 안 시킨다. 내 마음도 되게 편하게 해주고. 다른 친구들은 공부하기가 힘들 거라 본다. 남편이 내조를 잘해줘서 가능한 일이었다.


7. 애들에 대해 아쉬운 것은?


애들한테는 미안한 것이 너무 많다. 교육시키는 것도 부족하고 말로 하는 것도 잘 못해주니 되게 마음이 아프다. 애들 교육만 좋게 시키면 좋을 텐데 이것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주말에는 주로 애들 데리고 교회를 나간다. 교회에 나가지만 그냥 예배만 하고 돌아온다. 교회에서 모임 같은 것은 안 한다. 그래서 교회를 나가도 그렇게 친한 사람은 없다. 복산동에 있는 교회를 나가는데 여기 동네 분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8. 개업한 오늘 분위기가 어떤가?


오늘은 새벽 6시에 나왔다. 내일도 새벽에 6시에 머리 해달라는 약속 했다. 나는 여기 사니까 시간대에 관계없이 머리 해달라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래도 남성커트가 제일 많을 것 같다. 여자들 머리는 단골이 있으니까 손님이 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 동네 분들이 많이 도와주려는 분위기니 잘 될 것 같다.


9. 남편, 남편 친척에 대한 이야기한다면?


남편 친척들은 자주 보지는 않는다. 남편 형님만 전주에 살고 시누이는 일하러 제주도에 산다. 본가인 전주는 시부모님이 안 계시니 자주 갈 일이 많다.


우리 남편은 잘 하는 것이 너무 많다. 몸이 조금 불편한 것은 있는데 마음이 너무 좋다. 술도 안 먹고 담배도 안 피우고 기운 없을 때, 힘들 때, 실패했을 때도 항상 “괜찮아, 괜찮아”하면서 힘을 준다. 하지만 내가 어디 놀러 가서 늦게 돌아오는 것이 힘들다. 들어와야 할 시간을 6시 정도로 해두고 들어와야 한다. 애 밥시간은 챙겨줘야 하도록 서둔다. 저녁 자유시간이 없다. 본인도 잘 지키면서 하니까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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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님이 여러 분 기다리고 있어 양해를 구하고 인터뷰를 했다. 동네사람들이라 다 언니, 삼촌이라 불렀다. >


10. 마지막 소망과 바람을 말하자면?


그동안 힘들게 살았지만 미장원 개업을 하고 보니 한국 사람과 대화가 안 될까 걱정한다. 미장실 손님하고 많은 대화를 나누고 하는 것을 잘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을 잘 못하니 내가 가진 기술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애 잘 키우고 돈 많이 벌고 하는 것이 꿈이다. 마음 편하고 가족들 건강하게 잘 지내는 것이 바람이다.
 


< 김호철 씨 인터뷰 >


먼데서 와가지고 못된 놈 만나서 고생만 하는 거지. 이 사람이 만났으니 이 정도 고생이지 딴 사람 만났으면 더 고생했을 것이라고 위안을 해준다.


성격이 좀 느글느글해서 좋은 편이지. 그리고 미장원 개업하는 데 시누이들이 도와줬는데 80~90% 노력을 하니 도와주지 농땡이를 누가 도와주려 하겠어. 합격했을 때는 정말 짜릿짜릿하지. 예전에는 열 번이나 떨어졌는데 이번에는 두 번 만에 붙은 거지. 합격했을 때 정말 기뻐서 축하파티를 했어.


1년에 몇 번 캄보디아 친구들과 약속 생기면 주로 나는 가게를 지키고 혼자만 나간다. 술도 안 먹고 하니까 일찍 들어온다. 전에 미장원 기술 배우러 다닐 때는 8시에 퇴근을 하니 애들 밥이며 일상이 뒤죽박죽되어서 할 수 없이 무리를 해서라도 미장원을 연 거지. 


애들 크니까 애들 교육을 받기 위한 준비를 해야지. 둘인데 하나는 초등학교고 하나는 유치원생이고 하지. 슈퍼마켓은 무척 갈수록 힘들다. 다들 대형마트를 찾아서 사니. 아침에는 7시부터 열어 밤 11시까지 문 연다. 형이 그런 건축 일을 하니 쉽게 했지. 슈퍼 바로 옆에 붙어 있으니 편하다. 최선을 다해서 손님을 맞아야지. 이제 실력 발휘해서 손님을 끌어들여야지.


기뻐하고 감사하고 노력해야지. 주말에도 별 일은 없는 편인데 1년 전 덕유산 갔다 온 기억들이 아직 새록새록하다. 고향친구들과 불편하지만 소백산도 갔다 오고. 계룡산도 갔는데 아이젠 신고 겨울에 갔는데 끝까지는 못 가봤다. 그래도 등산이 좋더라. 힘들지만 등산은 계속할 것이다.



인터뷰어 이동고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