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가지산의 상고대

<가지산의 상고대>


단풍비 맞으며 벌써 가을인가 했는데, 코끝이 시린 겨울이 코앞에 다가왔다. 추위가 오니 하얀 겨울산이 그리워졌다. 각 계절마다 산에서 찾을 수 있는 보물들이 있다. 봄철엔 꽃, 여름철엔 계곡, 가을철은 단풍, 겨울은 눈이라고 생각한다. 추위가 피부를 따끔하게 할 때면 어김없이 하얀 세상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핀 상고대가 떠오른다.


남쪽지역인 울산에 눈이 오는 일은 아주 드물지만, 고도가 높은 곳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산하에는 비가 와도 어김없이 산정에는 눈으로 떨어질 때가 많다. 일기예보를 눈여겨보며 비소식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반가운 비소식!


12석남고개 가는 길의 비소식

<석남고개 가는 길의 비소식>


요즘 Zion.T와 이문세의 신곡 ‘눈’에 빠져있는 김혜진(영남알프스학교 교무팀장)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가지산으로 가자며 약속했다. 영남알프스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가지산(1241미터)은 울산의 북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산군의 큰형님답게 가장 눈이 빨리 내리고, 늦게 녹는 곳이다.


손꼽아 기다리던 약속한 날이 왔다. 기상청 산악일기예보에서는 가지산이 섭씨 영상 1도라고 한다. 기다리던 비소식이 갑자기 달갑지 않았다. 젖은 상태로 가지산 칼바람 맞으며 오들오들 떨 생각을 하니 갑갑했다. 가지산을 가는 길에 차에서 ‘눈’이라는 곡을 계속 반복해서 들으며 따라 불렀다. 눈이 와주기를 바라는 주문 같기도 했다. ‘눈이 올까요. 우리 자는 동안에 눈이 올까요. 그대 감은 눈 위에’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서로를 안타까워했다. 눈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이미 충분히 며칠 동안 행복했다. 굳이 눈이 오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12정산에서 본 가지산 갤러리

<정산에서 본 가지산 갤러리>


들머리를 석남터널로 잡았다. 초입에 가파른 계단길이 조금 힘들어도 다시 편한 능선길이 나오고, 거기서부터 약간의 돌길을 지나면 금방 가지산 정상에 도착하는 코스다. 초입에 오전 10시가 넘어 도착했다. 주차된 차들이 그득했다. 출발할 채비를 했다. 반다나를 얼굴에 덮어쓰고 장갑을 꼈다. 가방을 싸고 출발하는데 두고 온 아이젠이 생각났다. 동행한 혜진 언니에게 물어보니 “아 맞다!”를 외친다. 눈을 보러 가겠다면서 아이젠을 놓고 온 것이 제법 한심하였다. 마음이 들떠 기본을 놓친 것이다.


12가지산 정상에서 바라본 절경

<가지산 정상에서 바라본 절경>


12정상을 앞에두고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며

<정상을 앞에두고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며>


처음 초입에는 산이 말갛기만 해서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나 석남고개를 지나니 어김없이 기다리던 눈님이 떨어지셨다. 좋기도 하고, 두고 온 아이젠 덕에 걱정도 됐다. 하루를 일찍 시작한 산행객들은 벌써 하산하는 분들도 계셨다. 그 분들의 모자 위에 눈이 하얗게 쌓여있었다. 마음이 콩닥콩닥하여 주체할 수 없이 들떴다. 정상으로 가까워질수록 쌓인 눈의 양이 점점 많아졌고 바람소리도 만만찮았다. 드디어  정상에 도착했을 때는 바람 덕에 두 다리만으로 버티고 서있기 힘들 지경이었다. 한치 앞이 안보이고 눈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그 바람 덕이었을까? 순식간에 구름이 강처럼 흘러 지나가더니 하늘이 파랗게 열렸다. 파란 하늘의 상고대가 너무 어여뻐 눈물이 찔끔 났다. 사실은 강한 바람에 자각하지 못한 눈물이 흘렀다.


12가지산 갤러리의 외관

<가지산 갤러리의 외관>


12가지산갤러리 지기 정학춘(56) 씨

<가지산갤러리 지기 정학춘(56) 씨>


12가지산갤러리3

<가지산갤러리>


너무 추워서 서 있기 힘든 와중에 정상에서 약간 북쪽에 건물 하나가 보였다. 돌과 낮은 초목밖에 없는 정상에서 추위와 바람을 피해 건물 안에 들어오니, 너무 아늑하고 감사했다. 그 건물의 이름은 ‘가지산 갤러리’이다. 많은 이들은 그저 매점으로 알고 있다. 정학춘(56) 씨가 그 건물을 짓고 지금도 지키고 있다. 15년 전에 건물을 지을 때 혼자 자재를 지게에 짊어지고 날랐다고 한다. 울주군 상북면 궁근정이 고향이고 궁근정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 지역 토박이로 그는 남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다. 갤러리 안에는 직접 찍은 사진과 손수 적은 글귀가 그의 철학을 보여준다. 산행객들에게 불을 피우지 말고, 쓰레기를 제발 버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직접 찍은 사진액자 덕에 가지산의 절경들이 실내에 그득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물었더니 7~8년 전에 올라온 장애인 한 분이 해질녘이 되어, 못 내려가셔서 같이 밤을 지새웠던 일이 기억이 난단다. 이 건물은 대피소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형형하다. 대부분 인상이 좋은 편에 속한다. 갤러리지기 또한 그러하다. 그 인상 좋은 웃음으로 나가는 길에 배웅을 해주신다.


12가지산갤러리 안에서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김혜진, 정학춘, 노진경)

<가지산갤러리 안에서 찍은 기념사진 (왼쪽부터 김혜진, 정학춘, 노진경)>


겨울을 만끽하러 가셨다가 추위에 몸 둘 바를 모를 때는 학춘님의 ‘가지산 갤러리’로 찾아가세요. 훈훈하고 넉넉한 웃음으로 맞이해주실 겁니다.


노진경 울산생태문화교육협동조합 교육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