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6역사기행

<울산동헌 및 내아 ⓒ울산광역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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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부분의 읍성은 뒤로는 산, 앞으로는 강을 두는 전통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택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 읍성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지형에 따라 성을 쌓다보니 원형, 사각형, 부정형(不定形) 등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울산읍성도 뒤로는 울산의 주산인 함월산, 앞으로는 태화강을 바라보고 축성되었다. 울산읍성은 원형에 가까운 부정형인데 비해 언양읍성이나 경주읍성은 반듯한 사각형이다. 이와 같이 다양한 모습의 성안에서 읍민들의 생활이 이루어졌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477년(성종 8)에 울산읍성이 축조되었다. 중구 북정동, 옥교동, 성남동, 교동 일대에 있었던 울산읍성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울산 왜성(도산성)을 축조하기 위해 이곳의 돌을 허물어 가져가면서 사라져버렸다.
조선시대 읍성은 도성인 한양을 모델로 삼았다. 둘레가 약 1.7㎞인 울산읍성 안에는 20여개의 관청과 8곳의 우물, 4대문 그리고 동서남북을 가르는 십자형의 도로 등이 있었다. 4대문 가운데 동문은 전 옥교동사무소 인근, 서문은 양사초등학교 인근, 울산읍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남문은 성남동 신호등 사거리, 북문은 울산기상대 왼편 일대로 각각 추정하고 있다. 이 중 성문 이름이 알려진 것은 남문이었던 강해루(江海樓) 뿐이다.


읍성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객사(客舍)다. 이곳은 임금님을 모시는 신성한 공간으로 전국 모든 고을마다 으뜸으로 꼽았던 시설이다. 지방에 있는 대궐인 셈이다. 객사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설, 동지, 왕의 생일,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지방관이 대궐을 향해 예(禮)를 올렸으며, 외국 사신이나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전국 고을마다 있었던 객사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곳은 청도, 전주 등 몇 곳 밖에 없다.


울산객사는 ‘학성관(鶴城館)’이라 했는데 구 울산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조선 초부터 울산에 객사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학성관은 1667년(현종 8) 부사 류지립이 중건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되고 다시 복원되기를 거듭하다가 1895년 을미년 지방제도 개혁으로 객사 본래의 기능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후 이곳은 1903년 개진학교, 1907년 울산공립보통학교(구 울산초등학교) 건물로 사용되었다. 학성관 정문인 남문에는 ‘태화루(太和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태화루 주변으로 군 장교들이 근무하던 도총소, 약방, 지방 재정을 맡았던 상정소(詳定所) 등이 있었다. 구 울산초등학교 앞에 있는 태화서원이 도총소 자리다.


객사가 그 고을에서 형식적으로 으뜸이 되는 곳이라면, 심장부 역할을 하는 곳은 지방 수령이 행정사무를 보는 동헌이다. 울산지방은 조선 전기까지 ‘군(郡)’이었지만 임진왜란 때 이 지역 의병의 활약상이 널리 알려지면서 1599년(선조 32)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이에 울산 동헌의 정문에는 ‘학성도호부(鶴城都護府)’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동헌 입구에는 가학루(駕鶴樓), 뒤에는 오송정(五松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동헌 남쪽으로는 이 지방 양반들이 기거하던 향사당(鄕士堂), 서쪽의 양사초등학교 자리에는 교육을 담당하던 양사재(養士齋), 군사업무를 맡았던 군관청(軍官廳), 오늘날 경찰서인 토포청(討捕廳) 등이 있었다.


한편 울산 동헌 대청 마루에는 ‘반학헌(伴鶴軒)’이라는 현판이 있는데, 이것은 1760년(영조 36)에 당시 부사였던 홍익대가 동헌 건물을 중창하면서 걸었다고 한다. 동헌 건물은 일제강점기 때는 울산군청으로, 해방 후에는 울산군청 회의실로 사용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동헌 건물은 옛 모습 그대로가 아니고 축소된 모습이다.


김문술 전 울산역사교사모임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