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성경식

라온누리 성경식 셰프 ⓒ이종호 기자


지난 20일 동구 동부동 협동조합 레스토랑 라온누리에서 성경식 셰프를 만났다. 성경식 셰프는 울산 성공회교회 청년회와 와이엠시에이 독서모임 글우리, 울산 이와이씨(기독쳥년협의회) 등에서 활동하며 19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대투쟁에 함께했다. 울산민주시민회에서 시민역사기행을 이끌고 노래패 해오름에서 노래도 했다. “사회 안에서 작은 역할이나마 내 역할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그는 대의를 너무 좇다가 자신과 주변을 망치기보다 자기를 돌아볼 것을 조심스레 권했다. 그에게 87년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외면하지 않도록 하는 삶의 자양분이었다. <편집자 주>


스물셋 청년 시절에 만난 성공회 전재식 신부


이종호 편집국장(이하 ‘이’)=80년대 초반 울산성공회 교회 청년회 얘기부터 해 주시죠.


성경식 셰프(이하 ‘성’)=성공회가 모태신앙이었어요. 울산성공회 교회는 70년대 말에 생겼구요. 신정동에. 83년쯤 이때 잠깐 신앙생활을 안 하다가 재개해야겠다 해서 울산성공회를 찾으니 전재식 신부님이 계셨죠. 전 신부님을 만나 여태 살아오면서 느낀 역사의식의 굉장한 변화를 겪고 스물셋 청년 시기라서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죠. 성공회에 노옥희 선생님도 나오고 계셨고 그때는 84년입니다. 인제 와이엠시에이 글우리 독서회가 있다는 걸 알게 돼요. 그땐 작은 직장을 다녀 갈 여력은 안됐지만, 집에서 뭘 하다가 안 돼서 여기저기 전전하던 때였죠. 그러다 84년이 끝날 즈음에 독서회에 들어갑니다. 그때 그 친구들이랑 책이나 이런 걸로 나눴던 대화는 대부분 노동현장에 관한 얘기였어요. 세상은 이런데 노동현장은 이렇다, 노래도 그런 노래를 부르고요.


84년 넘기고 나며 노동현장을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돼 몇몇이 따로 모여 공부를 하기도 하고 계속 그렇게 진행이 될 거라 생각했죠. 그런데 85년 말 86년 초에 학습을 주도했던 친구가 교통사고가 나서 학습 자체를 못하게 돼요. 그건 그걸로 끝났고 그 친구는 위장취업 상태였는데 사고가 나 집으로 불려갔고 치료겸. 그래서 연락이 자연스럽게 끊겨요.


학습을 더 이상 못하고 개별로 그렇게 현장으로 들어갔어요. 한국프랜지를 들어갑니다. 밖에서 보던 현장과 안에서 겪는 현장은 상당히 많이 달랐어요. 육체적 노동을 하기도 힘들었고. 그런 시기를 보내며 할 수 있는 건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인데 익숙해질 무렵 산재를 당합니다. 86년 5월에 병원에 들어가 거의 그해를 다 보내고 이듬해에 산재정리를 하고... 허리를 다쳤습니다.


더 이상 현장 안에서는 활동이 불가능하겠다 느껴서 당시만 해도 또 다른 유사 사업장을 취업하기 힘든 상황이라 전혀 다른 맥락의 일터를 찾게 된 거죠. 프랜지를 퇴사하고, 치료 끝나고 6,7개월 쉬다가 다른 사업장에 취업하는데 그 공간이 현대자동차 안에 있었어요.


글우리 활동을 여전히 열심히 했구요. 현장에서 하려고 했는데 그러질 못했기 때문에 바깥 활동을 더 열심히 하고 신앙생활을 하며 엔씨씨(NCC 한국교회협의회) 이와이씨(EYC 기독청년협의회)를 알고 사람들을 만나고 자연스럽게 교회가 하는 사회민주화운동에 흡수돼 같이 갔죠.


5.18 되면 거리 나가서 전단지 뿌리고 교회 청년들이랑 같이 4.13 호헌 철폐 전단을 안기부에도 집어 던져 넣고, 어떤 친구는 거기가 안기부인 줄도 모르고 신정동에 케이비에스 앞에 삼일공사에다가도 넣고 그랬어요.


성공회 교회 등사기 몰래 들고 나와
자취방에서 만든 유인물 공장에 뿌려
87년 대투쟁 현대차 민주노조 시발


그런 시절을 보내고 87년에는 울사협(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 안에서 움직이면서 나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현대자동차에서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사람들과 연결이 돼 그 사람들과 같이 등사기를 교회에 있는 걸로 혹시 누가 알면 그럴까봐 몰래 들고 나와 한 분 자취방에 가서 등사를 밀고 그때 세 명이서 저녁에 민 걸 몸에 숨겨서 나눠 가지고 공장안에 쭉 뿌리죠. 이용복이가 어용노조를 만든 다음날인가. 그 세 명이 금효섭, 하인규, 저. 한두 명 더 있는데 기억이 없어요. 제가 등사기 들고 가고...


다음날 공장 노동자들이 바깥으로 다 쏟아져 나와요. 그 차를 따라 갔는데 그 차 위에 윤종오가 있었어요. 대열이 이렇게 가면 힘이 빠진다, 노래를 해야 한다, 그래서 나 보고 하라는 거예요. 근데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입장이 안 됩니다 그랬죠.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윤종오 씨였어요.


87년에 나는 지도부는 아니지만 시내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했어요. 최루탄 뒤집어쓰고 다음날 그 옷을 다시 꺼내 입고 눈물 콜록콜록하면서 나갔어요. 부산은 어떻게 하나 궁금해서 부산으로 가기도 했어요. 부산진시장 앞쪽에 해서 오바 브릿지 넘어서 시위대열도 움직이고. 부산 가서 색다르게 느낀 건 좌천동 가구거리에서 움직이면 주민들이 시위대를 향해 건물 밖으로 던진 치약 휴지 과자 등이 떨어지는 게 장관이었죠. 울산에서는 시민들이 부산하고는 다르게 그렇게 시위대에 호의적이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시위대가 폭력을 당할 때 제지를 하고 야유를 보낸 건 봤고, 성남동 옥교동에서 먹을 것을 주고 하는 건 있었지만. 나는 현대중공업에서 노동자 가투(거리투쟁)가 있고 하면 뒤에서 같이 시위를 했던 그런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운동권 발 들인 건 박종희, 노옥희
두 분이 사람이 너무 좋아서...


이후 현대자동차에서 노동조합이 제대로 만들어졌지만 나는 할 일도 없고 해야 할 일도 없는 그런 위치였어요. 직장생활 잘 하면서 있다가 울사협이 민주시민회로 바뀝니다. 참교육학부모회하고 전교조하고 같이 했던 어린이 역사기행 진행자로 쭉 따라다녔는데 민주시민회에서 시민역사기행을 만들면서 기획팀으로 들어갔어요. 2,3년 남짓에 전국의 문화유산을 다 돌아보게 됐죠.


그러던 차에 내가 노래를 좋아해서 같이 좋아하는 친구들끼리 울사협에 울산민족문화운동 노래패를 만들기로 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거긴 모인 친구들끼리 전문성을 가진 노래패를 만들자 해서 차정화, 조일래, 나 그리고 몇몇이 노래패를 만든 게 해오름입니다. 3년 정도 활동했습니다. 현장이나 바깥 행사를 다니며 노래하고 했습니다. 그러다 93년인가 해체를 해요. 각자 여건상 노래패에 집중할 수 없고 각자 자기 일들이 달라서요.


그 즈음에 민주시민회 역사기행도 진행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 울산향토사연구 이쪽으로 넘어가요. 행사를 치러낼 수 있는 인력이 안됐고 다른 쪽에서 붐이 일어나 그쪽으로 사람들이 분산되기도 하고, 시민역사기행은 자연스럽게 마무리가 됩니다.


같은 시기에 민주시민회에서 시민이야기마당을 했었죠. 그 안에 들어가 기획을 같이 하면서 필요한 일들을 내가 챙겨서 하기도 했어요. 88년부터 울사협으로 이어지는 민주시민회 일들에 내 역할을 했던 거죠. 거기서 박종희 선배나 신명찬 씨도 만나고.


내가 운동권을 발을 디딘 게 박종희, 노옥희 두 분이 너무 사람이 좋았고, 그들이 세상을 보는 시각과 행동이 내가 꼭 닮고 싶더라고요. 그들이 원하는 세상이 내가 원하는 세상이 되는, 지금은 나도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 있진 않지만 종희 형님하고는 편하게 잘 얘기하고 잘 지내고 있죠.


아이엠에프 때 사직, 피자가게 창업
자고 나면 이자 눈덩이... 문 닫아


시민회가 정리가 되면서 사무실이 성남동에서 신정동으로 이사를 가는데 그 이후로 내가 활동을 못해요. 자연스럽게 해체가 되는 상황이어서, 시민회하고 연락이 끊기고 종희 형하고도 그때는 연락이 잘 안됐고. 내가 힘들었던 시기인데 98년말쯤에 다니던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당했어요.


그러고 다른 일을 시작했죠. 요리는 어릴 때부터 좋아했고, 사직을 당할 때도 내 능력을 썩히는 것 같아 다른 길을 모색하다가 보험도 하고 백화점도 했는데 이건 다 아닌 거 같아 아는 형님이 피자를 하고 계셔서 전문적인 걸 배우고 그래서 몇 달 후에 오픈을 했죠, 동구에. 그땐 이걸 놓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잘 되고 못 되고를 떠나서. 주변에서 어리석다고 하는데도 붙들고 있었죠. 2006년에는 더는 못 끌고 가겠다 싶어서 땡을 친 거죠. 사실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서 가족 친구들 돈을 빌려서 그 일을 시작했어요. 그때는 자고 나면 이자가 불어있는 그런 시절을 보냈습니다.


잘해보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았어요. 적어도 사람이 먹는 음식은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 가격에 해야 하는데, 워낙 싸게 치고 들어오는 게 많아서 피자 한 판에 1만4500원을 받았는데 9000원, 6000원, 5000원 피자도 나온 거예요. 도무지 게임이 안 되는 상황에서 만신창이가 돼 문을 닫고, 돈은 벌어야 되고, 빚은 남아있고 애는 키워야 되고...


2001년부터 2006년까지는 다른 데는 전혀 신경을 못 썼어요. 간신히 그때는 국민승리21부터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 해체된 통합진보당까지 당원으로만 있었죠.


협동조합 레스토랑 라온누리 셰프로


친구 따라 그라인더 사상공으로 현대중공업에 들어가 그 생활을 6년 정도 합니다. 신용불량도 풀고 직장과 교회 그 생활이 전부였습니다. 다른데 눈 돌릴 상황이 아니었고 그렇게 열심히 생활을 했고...


2010년인가 그때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이렇게만 살면 안 되겠다 싶어서, 결국엔 나도 이렇게 별 의미 없는 삶을, 살아본 거 같지도 않은 삶으로 끝나겠다 싶어 다니던 직장을 과감하게 때려치웁니다. 민주노동당 사람들에게 미안한 것들이 부담처럼 있었는데 그들은 나를 도와줬는데 나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그래서 선거캠프에 들어가고 김종훈 구청장 선거에도 들어가고 그렇게 2년을 보내요. 그때 조카가 허리를 다쳐서 하반신 마비가 와서 조카를 도우면서 여러 가지 일을 했죠.


2012년 초에 이은주 전 시의원하고 이야기가 돼요. 이 의원 낙선하고 난 뒤에 뭔가 좀 해야 된다고 해서 건강한 먹거리를 이야기하고, 2012년에 협동조합이 눈길을 얻을 때 협동조합으로 레스토랑을 열자고 해서 일사천리로 추진합니다. 사업을 기획하고 출자자들을 모으고 10월쯤에 대체로 마무리가 돼 가게도 얻고 인테리어도 하고 빨리 진척이 돼서 12월에 라온누리 문을 엽니다. 지금 요리사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80년대가 가르쳐준 ‘외면하지 않는 삶’


작년을 넘어오면서 오십 중반으로 들어오니 20,30대는 저기가 목적지라 생각하고 맹렬히 달리기만 했는데 이렇게 달리는 건 아니다, 많은 이들을 알아야 하는 게 필수라 생각했는데 그렇진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통합진보당 이후에 새로 들어가는 당에는 안 들어갔습니다. 당적이 없는 프리한 상태인데 현재는 그게 좋습니다. 예를 들자면 자유한국당 사람이 여당을 욕하는 걸 편한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앞으로는 당을 갖게 될지 어떨 진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은 내가 하고 있는 요리나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일들을 통해 사회 안에서 작은 역할이나마 내 역할을 온전하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렇게 버티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즐기면서 살자! 큰 돈 안 드는 여행을 자주 다니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도 자주 보고 들으려고 합니다. 시간을 낼 수도 있는데 안 내던 걸 지금은 일부러라도 내서 누리고 이러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이=80년대의 경험이 지금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요?


성=외면하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글우리, 시민회, 교회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외면하지 않도록, 돕진 못해도 상황을 알도록, 혹은 다른 방향에서 바로잡을 수 있는, 그 사람 아픈 곳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하는, 외면하지 않도록 하는 역할.


글우리 사람들은 순박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출세지향이 없고 가진 게 있으면 어떻게 나눌까 고민하는 사람들, 지금도 그렇고.


맘 놓고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없다
그럼 우리가 하자...라온누리 문 열어


이=건강한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갖게 됐나요?


성=요리를 참 좋아했는데 사람들이 모이면 내가 뭔가를 해서 같이 나눠먹는 걸 좋아해서 음식을 하게 됐어요. 온산 공해 문제 터졌을 때 세상이 변화되고 발전되는데 사실은 세상을 파괴하고 망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럼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온전히 제대로 키워지고 있는지 관심을 갖게 돼서 이왕이면 가려먹어야겠다, 이건 이렇게 섭취하면 사람들에게 안 좋다는 걸 알려줘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됐어요. 나중에 친환경급식센터에 들어갈 일이 생겨 미리 1년 정도 지엠오라든지 공부를 하게 되고, 주변 생산지를 둘러보게 되고 먹거리에 대한 공부를 더 하게 되면서 손 가는 대로 먹으면 안 되겠다 했죠.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식당이 없다, 그럼 우리가 하자! 그래서 식당을 열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우린 쉽게 맛있는 음식들을 섭취하지만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먹을 땐 즐겁지만 10년이 지나면 안 좋은 영향으로 우리 몸에 나타나는 걸 막아보자, 그런 취지로 차렸습니다.


라온누리는 잘 되는 건 아니지만 버텨내고 있습니다. 지역에 있는 사람들, 동네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공간이 되고, 건강한 문화, 건강한 식문화를 전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이=앞으로 계획은?


성=딱히 계획이라기보다는 좀 더 여유롭게 살고 싶습니다. 이번 달에 얼마를 벌어 어떻게 생활하고 이런 거보다는 생겨나는 대로 먹고 지내는, 내게서 뭔가 더 이상 확대가 안 되고, 좋아하는 여행 가고 싶을 때 가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는 자주 갈 생각입니다. 출근을 하다가도 잠깐 한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 일상 밖으로 벗어나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고요. 길게도 가지만 경주를 갔다가 잠시 여유를 즐기다 돌아오는 것도 여행이잖아요.


이=당적을 안 두고 있다고 했는데요.


성=당 관련해서라면 쭉 청년 이후로 살아오면서 동구 안에서 관계 맺는 사람들이 전부 당 사람들인데 별로 할 얘긴 없고, 당적이 없다 뿐이지 흐트러진 건 없고... 내가 원하고 그들이 원하는 일이 있으면 하게 될 거예요. 이런 말을 해도 될까 몰라도, 대의를 너무 좇다가는 자기도 망치고 주변도 망치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내가 하는 것이 제대로 하는 것인가를 돌아봤으면 좋겠네요.


이=가 볼만 한 여행지를 추천한다면요?


성=가을에는 영주 부석사. 거기 갔을 때 기억들이 참 좋았고 지금은 좀 변했다고 하던데, 절까지 가는 길이 좋았고. 만대부 올라가면 태백산맥이 쭉 뻗어 내려 오는 게 눈에 보이니까요. 그게 참 좋았던 거 같아요. 부석사 자체도 절도 좋고 그랬는데 지금은 가을 되면 가을여행 1번지로 그곳을 추천합니다. 문화유적은 다 비슷비슷했는데 영주 부석사는 참 좋았죠. 익산 미륵사지도 좋았고.


내가 자주 가는 곳은 감은사지인데 아침에도 밤에도 한 번씩 가 보고, 해 뜨고 해 지는 것도 느끼고, 감은사지를 자주 가는 편입니다. 가다 보면 그런 시간대에 걸릴 때가 있습니다.


가능하면 여행을 많이 다니려고 합니다. 딸에게 내년 3월 달에 블라디보스토크를 간다고 했죠. 여행 얘길 하다가 시베리아 횡단열차 이야길 했는데 딸이 왜 그 기차를 타려고 하냐고 물어요. 80년대를 살았던 이들에게 러시아에 대한 로망이 있다, 지금은 자본주의 사회가 됐지만 자기가 추억하고 싶은 게 있어서 갈 거다라고 얘기했어요. 나도 이번에 다녀오면 그 다음에는 횡단열차를 타보려고 합니다.


녹취=이채훈 기자
대담/정리=이종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