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돔 위로 모형기차가 달리는 시계탑-사진 허재영

<돔 위로 모형기차가 달리는 시계탑 . 사진 허재영>


울산시 중구 성남동에는 은하철도 999같은 기차가 있다. 마치 우주를 유영하다 지상으로 내려온 듯한 이 기차는 울산 원도심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시계탑 돔 위를 매시간 한 바퀴씩 도는 모형 기차다. 1921년경 이곳에 최초의 울산역이 자리했던 과거를 추억한다.


40여 년 전 ‘은하철도 999’에 등장하는 메텔은 어린 나의 로망이었다. 짙은 속눈썹과 우수에 찬 검은 눈동자, 가녀린 몸매에 긴 금발. 그런 메텔과 우주를 여행하는 철이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어린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 난해한 내용이 많았다. 메텔을 향한 남성성의 성적 욕망을 어렴풋이 숨기고 있었고, 인간과 기계문명의 대결, 문명의 극단적 발달에 따른 인간성 상실 같은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12월 마지막 주말, 성남동 시계탑을 찾았다. 때마침 시계탑의 시곗바늘이 오후 3시 정각을 가리키자 돔 위의 모형기차가 뿌우 뿌우~~ 기적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시계탑 아래 횡단보도에서 엄마 손을 꼭 잡은 꼬마숙녀가 내 눈에 들어왔다. 아이가 고개를 한껏 젖혀 기차를 올려다보며 이렇게 외쳤다. “엄마, 저기~ 또마스 기따, 또마스 기따~” 말문이 금방 터진 듯한 아이가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지만 금방 ‘토마스기차’라는 애니메이션 만화가 생각났다. 토마스기차는 상대에 귀 기울일 줄 알고,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기차로 우리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인 캐릭터다. 횡단보도에 파란불이 들어왔지만 기차가 돔을 한 바퀴 다 돌 동안 아이는 시계탑을 떠나지 않았다. 잠시지만 아이의 손을 잡고 기차를 쳐다보는 엄마도 어떤 추억 속으로 빠진 듯 아련한 모습이다.


12옛 철길과 겹쳐지는 젊음의거리

<옛 철길과 겹쳐지는 젊음의거리>


12문화의 거리 어린이 문화행사 _예술기차여행

<문화의 거리 어린이 문화행사 "예술기차여행">


마음먹고 살펴본 시계탑 주변은 의외로 기차와 관련된 상징물이 많다. 시계탑의 모형기차는 물론이고, 외관을 기차 모양으로 꾸민 식당이 있는가 하면, 공교롭게도 문화의 거리에서 진행 중인 어린이 문화 행사도 ‘예술기차여행’이라는 이름으로 기차모양 부스를 길게 늘여놓았다. 비록 지금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은연중에 이곳에 다니던 오래전의 기차를 추억하고 있는 듯했다.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 기차라는 존재는 이처럼 남녀노소 모두의 감성을 끌어내는 묘한 마력이 있다


12시계탑 옆 기차 모형으로 외관을 꾸민 식당 (1)

<시계탑 옆 기차 모형으로 외관을 꾸민 식당>


하지만, 기차가 가지는 특유의 감성적 이미지 뒤편에는 근대 제국주의의 흑여사가 숨겨져 있다. 은하철도 999가 철이를 기계인간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이듯이, 서양의 근대 제국들도 인도, 아프리카 등의 식민지에 철도망부터 구축한다. 기차를 활용한 식민지 자원의 빠른 수탈은 제국의 국부를 살찌우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일제 역시 이를 본떠 식민지 조선과 만주, 동남아에 거미줄 같은 철길을 구축한다. 경인선은 개항장 인천과 조선의 최대 시장이라 할 수 있는 서울을 이은 한반도 최초의 기차선로다. 3포 개항지 중에 하나였던 울산 역시 여타지역보다 빠르게 철도 부설계획이 수립된다.

 
1921년 10월 25일, 성남동 옛 울산역사에 첫 기차가 들어왔다. 커다란 쇳덩이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장관을 보기 위해 저 멀리 언양과 두동 골짜기에서도 구경꾼이 몰려왔다. 최초 울산역은 구 소방서 사거리 인근에 있었다. 노선의 정식 명칭은 ‘조선중앙철도경동선’이었다. 민간에서 부설했으며 대구를 기점으로 경주, 모화, 병영을 거쳐 왔다. 당시 경동선을 달린 기차는 선로 폭이 표준궤 1435㎜보다 훨씬 작은 762㎜로 경편열차라고도 불리는 협궤열차였다. 꼬마증기기관차에 네댓 량의 객차를 달고 다니는 협궤선은 운행속도와 안전성이 떨어졌지만 일반적으로 건설·유비지가 적게 드는 장점이 있었다.


성남동 울산역의 흔적을 잘 안다는 김기석(72세)씨를 젊음의 거리에서 수소문 끝에 만났다. 그의 명함 속 직함은 월남참전자회 울산중구지회장이다. 선친이 철도공무원이셨다는 김회장은 먼저 필자를 중구 젊음의거리 38 ‘깐느 DVD 영화관’ 뒷골목으로 이끌었다. 총각상회 앞에서 김회장은 맨홀 하나를 가리키며 “과거 여기에 증기기관차에 물을 채우던 취수탑이 서 있었고, 이곳이 취수탑에 물을 퍼 올리던 취수정”이라고 했다. 그리고 당시 이곳에는 상상도 못했을 기관차 회전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단다. 힘겹게 먼 길을 달렸왔을 기관차는 이 장치에서 360도 돌려진 뒤 다시금 대구로 향할 채비를 했다.


12성남동 울산역 취수정 자리를 가리키는 김기석씨(72)

<성남동 울산역 취수정 자리를 가리키는 김기석씨(72)>



1935년 성남동 울산역은 학성동으로 이전된다. 부산을 기점으로 한 동해남부선 표준궤가 경동선과 연결된 뒤였다. 이때 철도 당국은 성남동 울산역사 주변에 달리역, 야음역 등에 흩어진 철도관사를 모았는데 그 수가 30여 채에 가까웠다. 당시로서는 강촌 벌판에 현대식 중산층 마을이 하나 생긴 셈이다. 인근 빈촌 아이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이 마을은 지금의 성남동 시가지를 이루는 밑천이 된다. 깐느 영화관 맞은편 골목에는 아직도 일제강점기에 지은 철도관사 한 채가 그대로 남아있다. 김관태라는 자개문패가 붙은 집으로 특유의 스끼나무 외벽이 일본식 가옥임을 말해준다. 고인이 된 문패의 주인공은 야음동 역장을 끝으로 철도 일을 마쳤으며 지금은 그 아들이 이 집을 지킨다. 학성동으로 울산역사가 옮겨간 뒤에도 중앙시장 입구까지 빈 기차선로는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역무원들의 잦은 이사를 돕기 위한 철도 당국의 조치였다.


12유일하게 남은 일제강점기 철도관사

<유일하게 남은 일제강점기 철도관사>


김회장은 도시정비사업 때 취수정 맨홀을 없애려는 공무원을 막아선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비록 일제 강점기의 흔적이지만 이곳에다 ‘최초울산역’이라는 표지석이라도 세워야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또한 김회장은 울산 성남동 일대의 근대 자료를 많이 수집하고 있었는데 그 정성과 집념이 놀라웠다. 김회장과 헤어지면서 그가 지키려고 한 것은 단순한 우물 하나가 아니라 이 동네 사람의 역사를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맨홀마저 없어진다면 100여 년 전 성남동에 존재했던 울산역의 흔적은 이제 완전히 사라진다.


일제의 기차가 식민지 수탈의 도구였다면, 해방 이후 한반도의 철도는 공업화를 견인하는 역할을 떠안는다. 울산은 이 같은 우리나라 철도변천사를 잘 대변하는 곳이다. 산업수도로 도심이 하루가 다르게 팽창하던 시절, 학성동 울산역 주변은 번화한 상가로 변신한다. 역사 진입로에는 작업복가게, 선술집, 일반상점 등이 즐비하게 들어섰다. 상설시장은 물론 농·수·공산물 등의 수송이 용이한 이점을 십분 활용한 번개시장도 번성했다.


하지만 1992년, 학성동 울산역은 지금의 삼산동 부지로 옮기게 된다. 이때부터 병영, 학성동, 번영교를 지나던 기차는 호계, 효문, 태화강역, 여천 고개를 지나며 도심 외곽으로 벗어났다. 지금 생각하면 노선 변경이야 어쩔 수 없었다지만, 당국은 왜 학성동 울산역사驛舍 마저 추호의 망설임 없이 철거했는지 알수 없다. 울산은 직장을 찾아온 외지인이 80% 이상을 차지하는 도시다. 이른바 공업화 세대에게 울산의 관문, 학성동 울산역은 희망과 두려움이 교차하던 추억의 심장 같은 곳이다. 울산역에 대한 철거만큼은 온전히 그들에게 물었어야 했다.


사실 필자가 바라보는 울산은 도시정체성이 결여된 도시였다. 그 어떤 고민도 없이 낡고 오래되면 무조건 부수고 없애는 일을 능사로 알아왔다. 울산역 말고도 소리 소문 없이 지워진 울산의 근대문화유산은 너무나 많다. 오래 전 백무산 시인은 노동운동으로 자신이 수감되었던 옛 울산경찰서 유치장이 미셸 푸코의 판옵티콘처럼 부챗살 모양으로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일제는 울산경찰서 유치장을 가장 효율적인 감시 공간으로 설계했다. 보전했더라면 우리아이들에게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들과 민주·노동투사들이 겪은 고초의 흔적을 쉽게 알릴 수 있는 산 교육장이 되었을 것이다. 이 역시 당국은 그 누에게도 묻지 않고 쉽게 허물어 버렸다. 어떻게 보면 시민의 애환이 담긴 어떤 공간은 한 시대의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비록 그것이 친일세력의 굴절된 역사, 부정한 권력으로부터 우리를 무의식적으로 지배했던 억압의 공간일지라도.


12시계탑 인근 규당약국 약사 강현숙 시인

<시계탑 인근 규당약국 약사 강현숙 시인>


해질 무렵, 시계탑 사거리 인근 강현숙 시인이 운영하는 규당약국에 들어섰다. 2017년 울산작가상 수상자이기도 한 그녀는 마산이 고향으로 울산에 터를 잡은 지는 언 30여년 다 되어 간다. 강 시인에게 시인이 지켜본 울산의 원도심은 어떤 모습인지를 물었다. 그녀는 가끔씩 약국을 찾는 사람 중에 이곳이 고향이라며 옛 추억을 더듬는 이들을 종종 본다고 했다. 울산역이 시류에 따라 여러 번 옮겼듯이 한때 울산 최고의 상권이었던 이곳도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는 중이라고 했다. 간밤에 약주 좀 한 얼굴이라며 필자에게 술약을 챙겨주던 강 시인은 또 이렇게 말을 이었다. “어쩌면 원도심이란 공간은 흐르는 세월만큼 추억이 쌓이고 또 멋스러움과 낡음이 입혀지는 그 자체가 현재진행형의 간이역일지도 모르지요.”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6시 정각, “뿌우,뿌우,뿌우~ 칙,칙,칙~” 시계탑 쪽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싣고 달리는 기차 소리가 어김없이 들려 왔다.


황주경 시인. 울산민예총문학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