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작 펄먼이 연주하는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협주곡 D장조 35번을 틀어놓고 오는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다시 못 올 이 한 해, 제게 다가오는 주제가 무엇일까 생각하는 아침입니다. 생애 유일한 이 한 해를 맞이하며 살아갈수록 애틋해지는 새로운 시간에 대하여 열린 주제를 떠올려보아야겠습니다.


끝닿을 데 모를, 인간의 감정의 깊은 곳을 찾아가는 그의 음악에 박수를 보냅니다. 가없는, 무한한 그곳에서 무한이 주는 황홀함에 도취되고 탐닉되기를 바랍니다.


한 목숨 태어나서,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아침의 떠오르는 태양, 작열하는 석양 그 언저리, 이 모두를 읽어내더라도 아쉬울 것 없을 만큼 아름다운 한 생이었더라도,
한 목숨 태어나서, 가 닿을 수 없는, 무한, 어루만질 수 없는, 멀고 아득한, 그 향수를 어찌 접을 수야 있겠습니까?


무한은 먼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과 나의 사이, 그 사이에도, 아찔하게 끝 모를 깊이의 사이의 무한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사이를 읽어냅니다.


무한에는 허무라는 것도 숨어있습니다. 현실의 질긴 끈에 대한 애착의 다른 이름으로 사람은 허무를 지니고 살아갑니다. 허무에 대한 집착으로 끝까지 허무를 쫓아가, 허무가 그리는 텅 빈 곳을 찾아가, 허무의 얼굴을 그릴 것입니다.


무한, 허무 같은 관념에 그려진 얼굴들을 찾아 뒷면에 숨겨진 어떠한 현실들이 그러한 관념을 쫓도록 했는지 밝힐 생각입니다.


관념이 머무를 곳은 너무도 많을 것이며, 하늘에, 나무에, 시린 겨울 매달린 붉은 열매에, 저 차가운 반달의 곡선과 직선 위에, 끝없이 가지 위로 물을 끌어올려 꽃을 피우는 집착의 얼굴 위에 머무를 것입니다. 거기 머무르는 제 관념의 아름다움을 꽃 피워 놓을까 합니다.


누구에게나 현실에 다가가지 못하는 말 못할 사연이 있는 법이지요. 그 사연을 해결하고 극복할 때까지 어쩌겠습니까, 자신이 길러내는 관념 속에 갇혀 때론 울부짖으며, 때론 그 관념에 걸려 넘어지며 헛것 투성이로 살아내지 않겠습니까.


묘한 것은 관념이든 현실이든 어느 것의 손을 함부로 들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서로 공존하며 서로 주고받으며 각자의 삶을 그려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미로 같은 궤도, 궤도와 궤도 사이의 보이지 않는 연결과 분리 속에서도, 얽혀 있는 틈들의 무한 간격 사이에서도 삶은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관념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일지도 모르지만 이 생을 끝내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현실에서 누군가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므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관념의 춤을 추며 지금, 여기로 돌아올 궁리를 하고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무한과 무한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읽어냅니다. 그 사이는 그 사람이 쓰는 말들의 차이입니다. 그 말들이 어우러지는 문체의 차이입니다. 그 사이의 간격은 너무 먼 것이라서 피동이든 능동이든 그 사람의 정서를 정직하게 대변하는 그 동사의 형태는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 동사들의 정지도, 거짓도 때로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만 궁극적으로 저는 솔직한 동사의 움직임을 추구합니다.


누구나 이 세상에 한 번을 태어나서 드높은 이상을 꿈꾸며 불타게 사랑하고 미워하고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가는 육체 앞에서 경건하게 자신의 삶을 끌어안을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 솔직하지 못한 태도로 이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차이코프스키는 이 음악으로 어디에 가닿으려 하였을까요, 이작 펄먼은 그 음악을 연주하며 그곳에 가보았을까요, 저는 올 한 해 그곳에 다녀올까 합니다. 언제 다시 그 먼 곳을 감히 가 볼 수 있겠습니까, 아직 힘과 열정이 남아 있을 때 떠나볼까 합니다.


올 한해 가야할 길이 멀어 행복합니다. 갈 수 있는 길을 닦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어디로든 가더라도, 무한에로의 첫 발이니 무척 설렙니다.


강현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