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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형 직전의 해월 최시형 >


지금부터 120년 전인 1898년 6월 2일, 동학의 2조인 해월 최시형은 현재 서울의 종로3가의 육군법원에서 ‘좌도난정’(左道亂正, 그릇된 도로 성리학적 가치를 어지럽힘)의 죄목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동학의 우두머리로 우리 근대사의 한 획을 그었던 노 성자(聖者)는 72세의 일기로 이렇게 생을 마감했다. 유일하게 그의 모습을 담고 있는 참형 직전의 사진에는 깡마른 모습의 야윈 얼굴에도 성자의 선한 눈빛은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사진을 살펴보면 고문에 의해 퉁퉁 부은 손과 발이 앙상한 몸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사진 한 장이 그의 힘겨웠던 삶의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해월은 최보따리라고 불렸다. 그가 최보따리라고 불렸던 이유는 해월의 제자였던 오지영이 지은 <동학사>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수운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해월 선생이 도의 제반 일을 맡아 보았다. 선생의 초명은 경상(慶翔)이오, 개명한 것은 시형(時亨)이니, 또한 경주 최씨 집안에서 출생했다. 선생은 어려서 그 부모를 잃고 가도가 빈한하여 남의 집 고용살이를 하였었다. 일찍이 수운 선생을 만나 도를 배워 깨달은 것이 있어 수운 선생의 심법(心法)을 받아 도의 장래를 당부하였었다. 수운 선생이 갑자년(1864년)에 변을 당한 이후 숨어서 몰래 다니며 경상·전라·충청·강원·경기·황해·평안 등의 각 도를 다니며 비밀히 도를 전하여 수만 명의 문도(門徒)를 두었었다.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지목은 점점 커서 고난의 생활로 몸을 마치었다.”


오지영의 말대로 해월은 늘 비밀리 도망다녀야 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보따리를 머리맡에 두고 잠을 잤다. 그러다 관군이 급습하면 보따리 하나만 둘러매고 흔적 없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렇게 그가 도망 다닌 기간이 35년간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도망 다닌 도바리꾼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백성들에게 다가갔다.


해월은 수운의 가르침인 동학의 시천주(侍天主)를 실천하기 위해 ‘사람을 하늘과 같이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을 강조하였다. 사인여천은 “어린 아이를 때리는 것은 하늘님을 때리는 것이니 아이를 때리지 말라.”, “저 건너방에서 베를 짜고 있는 아낙이 하늘님이다.”라는 실천으로 구체화되었다. 또한 “우리 도인 중에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재물을 베풀어라.”라고 하는 ‘유무상자(有無相資)’는 당시 빈천한 사람들을 동학으로 이끌었다. 이렇게 해월은 백성의 벗으로 한 평생을 살았다.


해월이 아니었으면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이 일으킨 자주적 근대화운동인 동학농민혁명도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사람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외치던 동학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30년간을 한 걸음 한 걸음 디디며 전국을 다니며 백성들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새로운 세상을 같이 건설하고자 했던 해월의 발끝에서 시작되었다. 해월의 발걸음 속에는 우리 민중의 고통과 염원이 함께 했다. 그 고통과 염원이 동학농민혁명으로 폭발한 것이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도 해월의 영향을 받았다. 우리 독립운동사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손병희와 김구는 해월의 제자였다. 해월의 수제자인 동학의 3세 교주인 의암 손병희는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는데 그는 15년간 해월 밑에서 공부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 김구도 동학의 접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당시 황해도에 살던 김구는 청산에서 해월을 만났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었다. 


“어떤 고을 원이 도유(동학도)의 전 가족을 잡아 가두고 가산을 강탈하였다는 것이다. 이 보고를 들은 (해월) 선생은 진노하는 낯빛을 띠고 순 경상도 어조로 “호랑이가 물러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서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가서 싸우자.” 하시니, 선생의 이 말씀이 곧 동원령이다.”(<백범일지>) 
 
초기 동학농민혁명을 관망하던 해월이 동학도가 관에 의해 탄압을 받아 죽고 가산을 강탈당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해 동학도의 총기포령을 내렸다. 이러한 해월의 적극적 투쟁은 김구의 이후 독립운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해월은 우리의 자주적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었다.  


해월의 120주기를 맞는 오늘 우리가 해월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점이 해월이 살던 시기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난제들이 얽매어져 있기 때문이다. 밖으로는 미중의 영향력 확대와 일본의 우익화, 그리고 북한 핵 위기 등이 엄습하고 있고, 안으로는 금수저와 흙수저로 논란되는 빈부의 격차, 보수와 진보의 갈등 등이 산재해 있다. 해월이 동학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구현하고자 하였듯이, 해월의 걸음을 따라가며 우리 시대의 해법을 찾아보고자 한다. 해월의 생명사상을 실천했던 장일순은 이 시대에 해월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땅에서 우리 겨레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고, 또 온 세계 인류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알려주신 분이 해월이지요. 우리 겨레로서는 가장 자주적으로 사는 길이 무엇이며, 또 그 자주적인 것은 일체와 평등한 관계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는 설명해주셨지요. 눌리고 억압받던 이 한반도 100년의 역사 속에서 그 이상 거룩한 모범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저는 해월에 대한 향심이 많지요. 물론 예수님이나 석가모니나 다 거룩한 모범이지만, 해월 선생은 바로 우리 지척에서 삶의 가장 거룩한 모범을 보여주시고 가셨죠.”(<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음을>)


우리 지척에서 삶의 가장 거룩한 모범을 보여주며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준 이가 해월이다. 


해월 이야기는 해월의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를 가능한 한 세밀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그 대강으로는 소년기의 최경상, 시천주의 충격과 동학 입도, 수행과 종교적 체험, 동학의 제2대 교주 등극, 수운의 죽음과 고난의 시작, 영해교조신원운동, 강원도에서 수난, 단양 은거와 경전 간행, 삼남으로의 교세의 확장, 종교의 자유 획득을 위한 교조신원운동, 반봉건 반침략의 동학농민혁명, 교단 수습과 순도 등이다.


08성강현

성강현 ------   경희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부산의 동천고등학교에서 역사 교사로 부임하였다. 동학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갖고 공부하던 그는 동의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6·25전쟁 시기 천도교포로의 전향과 종교 활동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 동의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6·26전쟁 시기 천도교 포로 연구>, <부산 근·현대사 산책>(공저), <타는 바다>(공저), <반도의 총후진>(공역)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해월 최시형의 단양 은거시기 연구’,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의 9·17폭동 연구’, ‘제1차 교육과정의 국사 교과서 서술체제와 내용 분석’, ‘하와이 한인 사회를 통해 본 천도교와 천도교인의 활동’ 등이 있다.  


성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