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2일 공직선거법 위반 대법원 판결로 의원직을 잃은 윤종오 민중당 전 국회의원을 만났다. 87년 7월 25일 현대자동차 노동자 투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한 윤 전 의원은 노동조합 소위원, 대의원, 상무집행위원을 거쳐 1998년 북구의회의원으로 정치 일선에 뛰어들었다. 울산광역시의회의원과 북구청장을 지냈고, 2016년 총선에서 울산북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87년의 경험을 ‘시대와의 조우’라고 말한 윤 전 의원은 대법원 판결에 대해 “억울하지만 담담하고 꿋꿋하게 활동을 계속해나가겠다”고 했다. <편집자 주>


윤종오1

윤종오 전 국회의원 ⓒ이종호 기자


87년 7월 25일, 나도 모르게 잡은 메가폰


이종호 편집국장(이하 ‘이’)=현대자동차엔 언제 입사했나요?


윤종오 전 국회의원(이하 ‘윤’)=86년도 군대 공수부대 제대하고 현대자동차와 인연이 됐죠.  그 이전에는 81년도 고3 때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부산 사상공단, 거제 대우조선소 용접 일을 했죠. 그러다 공부가 하고 싶어서 벼락치기 대학 공부로 동의대 들어가 1년 다녔습니다. 더 다닐 형편도 안 되고 입대 시기도 돼 군대를 갔고, 자원하지는 않았지만 공수부대를 가게 됐습니다.


86년 제대 3개월 후 직업훈련원 거치지 않고 현대자동차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때는 2주에 500명씩 뽑을 때였습니다. 1주 단위로도 채용하고 한 기수에 500명씩... 줄만 서면 들어가던 때였습니다. 그렇게 좋은 회사가 아니었고 너무 힘들었고 ‘현대 똥구르마’ 이야기도 나오던 때였죠.


당시 시급이 665원이었고 오른 손이 일할 때 왼손이 놀게 놔주지 않는 ‘모답스 기법’이라고 인간 신체 동작을 연구해 일거리를 주고 생산력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썼죠. 1분에 거의 57초 58초씩 일하고요. 내가 축구부터 테니스까지 못 하는 운동이 없는데도 컨베이어가 떠내려가기 일쑤였고, 식사 한 시간인데 30분씩 연장해 일하고, 토요일은 의무휴일이 아니니까 토요일도 일을 하고, 일요일은 무조건 출근이라 쉬는 날이 없어 기계처럼 로봇보다 빡세게 일을 했습니다. 임금을 받으면 월 17만원, 18만원씩 받았습니다. 그렇게 일해도 내 집을 가진다, 내차를 가진다는 생각은 꿈에도 할 수 없던 시기였죠. 연말에 돈 많이 번다고 성과급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명절에 고작 런닝이나 팬티, 비누 쪼가리 정도 줬으니까요.


나는 너무 힘들어서 회사를 때려치우려다가 1년만 더 다니자, 마음을 다지고 그랬었죠. 그러는 사이 87년 7월 25일 아침에 출근을 하고 있는데 누가 유인물을 나눠주기에 읽어보니까 어용노조 이야기였죠. 그 이전에 6월 항쟁이 부산에서 끓어오르면서 직접 데모에 참여하진 않았지만 세상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불만이 끓어올랐죠. 주리원까지는 가지 않았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세상을 많이 몰랐죠. 솔직히 유월 항쟁 집회는 참석 안 했지만 직선제 개헌은 엄청나게 동의하고 지지하는 입장이었죠.


다시 7월 25일로 돌아가 어용조합이 노조 결성식 한다는 유인물 받고 보니까 딱 봐도 냄새가 풀풀 나대요. 노조를 이상범 씨가 먼저 신고하려 했는데 하루 앞서 신고 된 어용노조였죠. 갈아엎어야 한다 해서 동참했고, 본관 잔디밭으로 모여라 해서 갔습니다. 이상범 씨를 비롯해서 기존 발기인들 다 참여하고, 진짜 노조 만드는 싸움이 벌어진 거죠. 처음 일,이천 명이 모였는데 4.5톤 트럭을 끌고 본관 잔디밭부터 시작해서 지금 노동조합 방향으로 사람들이 주욱 따라왔어요. 근데 누군가는 선동해야 하는데 아무도 없고 지금도 사용하는 메가폰을 그걸 내가 쥐고 처음부터 선동을 한 거죠.


이=행진 준비 팀은 없었나요?


윤=노조를 준비하려던 발기인은 있었지만 그런 준비까지는 없었던 거죠. 총회해서 조합원 모인다, 어용노조 엎자는 이야긴 있었지만... 주로 본관 앞이라 1공장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공장은 돌아가고 있었고 무슨 상황이 일어나는 지도 몰랐죠. 4.5톤 트럭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대오가 주욱 이어지고...


그때 부른 노래가 뭔지 아세요? 애국가 불렀어요. 애국가 부르다 “우리의 소원은 노조~ 꿈에도 소원은 노조~” 이렇게 가사를 바꿔 불렀죠. 애국가도 한 두 번이지. 그러던 차에 내가 올라가 선전선동을 하는데 차 밑에서 따라오면서 한 사람이 거기서 훌라송을 가르쳐주더라고요. “어용노조 물러가라 물러가라~ 어용노조 물러가라 물러가라~” 훗날 그 분이 성경식 씨인걸 알았습니다.


훌라송은 쉽잖아요. 한 번 하니까 다 따라 배우는 거죠. 응용해서 개사도 하고, “민주노조 건설하자 건설하자~ 민주노조 건설하자 건설하자~” 밤까지 싸웠죠. 차도 몇 대 불타고... 그러면서 노조 활동을 처음부터 시작하게 됐습니다.


준비하던 사람 없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이크를 잡게 됐고, 나랑 일하는 옆에 친구도 올라타려 하고, 따로 선동을 하려고 했던 건 아니고요. 대오가 2공장 쪽으로 가니 이게 뭐하는 거고? 노조 만들어서 라인 다 끊었다고 하니 다 따라오는 거예요. 망치 던지고 다 따라오고 전 공장이 한 바퀴 다 돌아서 올스톱이 된 거죠.


노동조합 소위원부터 한 걸음씩


그렇게 본격적으로 노동조합 임원선거가 시작됐는데 갑자기 이영복 씨가 자기는 지하에서 했다고 하고, 선거가 처음부터 민주노조 만든 사람에게 안 가고 그리로 간 거고... 그때부터 나는 대의원 밑에 소위원(현재 현장위원)부터 시작했죠. 참 노조 직책을 다양하게 했죠. 이상범 위원장이 2년 후에 잡고 그 때부터 대의원을 시작했죠.


대의원을 두 번 하고, 이상범 씨 물러나고. 3대 이헌구 집행부 때 총무차장부터 시작한 거죠. 대한민국에서 성과급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온 게 현대차 1991년 성과분배투쟁에서 성과급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유명한 투쟁이 시작될 때 총무차장을 하면서 살림 살면서 사수대 지원도 하고요... 노조가 맨 마지막에 퇴진할 때 현대차 공장에 모든 문을 점거하고 신나 박스, 타이어를 사람 키의 두 배 높이만큼 쌓아서 그 위에 올라가 전 문을 다 카바(커버)해서 지키고, 스키마스크하고 정방대 눈만 내밀고 지키고. 또 한쪽은 전방 군대에서 보초 교대하듯이 한번에 40~50명씩 지켰으니까요. 그런 어마어마한 투쟁을 벌이고 1월에 퇴각을 하게 되는 거죠.


노조 맨 마지막에 사실상 나오면서 2~3개월 수배를 당하다 잡혀가 구속당하고 울산에 당시 구치소가 없어 남부서 대용감방에 300에서 500명이 묶여 있고 200명이 수용한계인데 열 명 자는 방에 스물세 명이 자니까 칼잠자고 몸부림치면 다리 아구통에 맞고 그런 생활을 했죠. 수배 때는 울산 부산을 오가며 지냈는데 연락책을 하고 그랬죠.


한 달 살고 기소유예로 나왔는데 임원들 다 구속되고 수배되고 실장들 없고 배만수 동지 사무차장으로 임명하고 내가 총무부장으로 임명되고 임원들 도장 다섯 개를 내가 쥐고 위원장 차도 엑셀 프레스톤가 그걸 내가 끌고 다녔죠. 총무부장이니까 예산권도 있고 직인도 갖고 있고, 노조가 완전 박살이 나서 회사 법규부에서 조합 앞에 차 대놓고 조합에 누가 출입하나 감시하던 시절이었죠.


총무부장 마무리하고는 1공장 사업부 대표가 됐죠. 임원 빼고 밑에 거는 전부 다 해봤습니다. 노조에서 직책이라는 직책은... 교육위원도 한 번 하고 96년도에 정갑득 위원장 당선되면서 조직실장으로 올라오게 됐고, 쟁의부장을 아무도 안 하려 해서요, 하고 나면 구속되니까, 할 수 없이 조직쟁의실장으로 하게 됐습니다.


96~97년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


96년 말 노동법 개악이 시작됐죠. 정치권에 개악 움직임이 있었는데 정리해고법이 날치기 통과돼 노동법 개악 저지 대투쟁에 돌입하게 되죠. 1996년 12월 26일 그 새벽에 국회 날치기 통과됐어요. 줄여서 노개투, 노동법 개악 저지 대투쟁이 일어나죠. 그 전에 준비를 많이 했고, 이미 그전에 그런 (개악) 움직임이 보였기 때문에 조합원 교육부터 시작해서 어마어마하게 시작했죠. 그런데 결론적으로 보니까 투쟁보다 좋은 교육은 없더라고요.


그렇게 40일 정도 파업을 했어요. 성과분배 때 해고자가 100명이 넘었고 구속자도 50~60명을 넘었고 어마한 대가를 치렀는데 노개투 때는 어땠을 거 같아요? 한 명도 구속된 사람이 없었어요. 무단으로 40일을 파업하고 그랬는데도.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된 날 태화강 둔치로 바로 갔는데 적게는 3만에서 5만, 많게는 7만이 모였죠. 한국노총까지 할 때는 7만까지 모였습니다. 보통 집회하면 대오가 그리 길지 않은데 7만 모였을 때는 태화강에서 대오 후미가 빠져나오면 대오 선두가 이미 시청을 한 바퀴 돌고 행진해서 빠져나갔을 정도로 줄이 길었죠.


그때 조직쟁의실장하면서 매일 태화강에서 사회를 봤습니다. 세종공업 있던 최용규 동지하고 교대로 사회를 봤습니다. 그러면서 대중적으로 얼굴이 알려지게 됐고요. 내가 마이크 체질은 아닌데...


기초의원 “새로운 세계가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고민을 다들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새로운 사회로 가는 시발점이 된 거죠. 현장에서 아무리 일하고 임금 올려도 물가 오르고 집세 오르고 의료비 사교육비 많이 오르면 무슨 소용입니까. 그리고 정리해고법을 일방적으로 도입하는 등의 정치는 기성정치권이 하는 겁니다. 노동자들이 이런 것들을 막아내고 노동이 존중 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치세력화가 중요했죠.


이렇게 우리의 대표를 지방의회로 지방자치단체로, 국회로 많이 보내자는 공감대가 형성됐습니다. 6대 집행부 임기 마치고 그 다음에 지방선거가 있었어요. 당시 구의원 출마는 생각도 안 했는데 누가 하도 해보라고 해서 나는 관심 없다, 세 번 정도 찾아왔더라고요. 양정염포, 나는 그때 글로리아아파트 살 때인데 경주 접한 지역이었거든요. 그러다 갑자기 염포에 가게 된 건 박상철 의장이 선배고 모임도 같이 하고 해서, 내가 “내보고 지방선거 한 번 출마하라는데 형님 어쩌까요? 생각이 어떠세요?” 물어보니 형님이 “현장이 아쉽긴 한데 누군가는 가야 하지 않겠나, 근데 가도 회사 앞에 가야 조직하기도 좋고...” 말씀하셔서 3일 전에 옮겨요. 운빨이 있었는지 하여간 한 500표나 이겼나? 그래서 당선이 된 거죠. 정리해고 반대, 살맛나는 지역 건설 등이 구호였고. 그 작은 구의원 선거에 내로라하는 역대 집행부가 다 붙었다 생각하면 됩니다. 정갑득, 이영희, 박상철, 홍영출, 하부영 등등이 명부에 다 올리고... 그때는 다 같은 조직이었거든요.


소시민들은 행정 이러면 동사무소, 요즘은 행정복지센터라고 하는데 등초본 떼는 거 말고 잘 모르죠. 행정과 정치를 잘 모르는데 어떤 시스템인지 잘 몰랐죠. 들여다보니까 정말 새로운 세계가 있더라고요. 노동운동에서 겪지 못한, 우물 안에서 임단협 이런 투쟁들, 부서 내 근로환경 개선 일들 이런 거에 머물렀는데 바깥에 행정하고 접하고 보니 이곳에는 수많은 봉사단체가 있고, 구청이 동에 영향을 끼치고, 구는 시에, 시는 국가에 영향을 받고 다시 국가는 의회의 이런 게 작용하고 이런 것들에 눈을 뜨게 되죠. 주민 삶의 질을 높이고 더불어 잘 사는 길로 가려면 지역에서 어떤 실천 활동을 해야 하나, 현장 활동과 다른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고민을 해야 되나 생각했죠.


먼저 주민의 알 권리가 충족돼야 한다고 봤습니다. 의회가 무엇을 하는지 주민에 알려줘야 관심을 가진다, 노조 사람들 장점이 뭐냐면 노조가 조합원들에게 어떤 투쟁을 하고 사업을 하는지 의견수렴하고 그런 결과가 협상에 이어지거든요. 결과물이 나오면 알려주고 조합원들 고충처리도 해주고 부서에 건의도 해서 어떤 걸 만들고요. 행정서비스도 노조활동과 룰은 똑같은 거죠. 범위가 다를 뿐이고.


기초의원하면서 버스정류장 아파트 통로입구, 마을마다 지역주민 게시판을 많이 만들어 한 달에 한 번씩 알렸어요. 예산이 처리되면 어떻게, 공원 만든다고 하면 예산은 어떻게, 한 건 했다고 알리고 안 된 건 왜 안됐는지 알려줬죠. 전화번호, 주소 남기고 하니까 전화도 많이 오게 되고요. 주민자치위원회나 동장님들 오면 건의사항은 다음 주에 꼭 알려주고 피드백을 확실하게 해드리니까 뭐든 윤종오한테 하는 게 가장 빠르다, 답을 주더라, 안 되면 왜 안 된다고 답을 주더라, 하는 인식이 생겼죠.


그게 아마 지금 생각해보면 ‘마을 만들기’겠죠. 그땐 마을공동체 용어도 없었지만 주민들과 호흡하면서 주부는, 노인은, 어른은 어떤 관심사가 있다. 각각 아이들 교육, 건강, 한글교실, 또 아이들 교육도 있지만 주부는 자아실현, 취미 이런데 관심이 있기 때문에 계층별 맞는 사업을 배치했죠. 염포주민문화센터 25평짜리 조그마한 사무실에 들어가 몇 시까지 사업을 하고 프로그램을 만들고 하게 되는 거죠. 그때만 해도 동 주민센터는 프로그램 초기고 활성화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식 셰프의 경우도 아이들 글쓰기 교실 선생님이었습니다. 창작욕 덕에 나중에 방송대 국문학과를 들어갔는데요. 처음 센터에서 만났을 때 내가 옛날에 당신에게 훌라송을 알려준 사람이라고 말을 하더라고요. 구의원이면 한참 세월이 십몇 년이 지나 까먹고 있을 때인데 성경식 씨는 분명히 기억을 하더라고요. 나는 이따금 그 때 그 사람이 누구였을까 싶을 때가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니까 굉장히 반갑더라고요. 얼싸 안았습니다.


무룡탑 주부대학도 하고 마을문고, 아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마을 환경봉사단 구성해서 청소도 하고 재활용품 수거사업도 했어요. 아파트는 분리수거하면 연말에 모아서 쓰레기봉투라도 나눠주지만 주택은 그런 게 없잖아요. 염포엔 주택이 더 많은데. 사무실에 가져오면 재생휴지로 바꿔줬어요. 신문 우유팩은 얼마에 어떻게 정해서요. 매주 화요일 되면 창고가 꽉 찰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와요. 인구 만 명 안 되는 동네에 몇 바퀴씩 돌고 프로그램 운영하면 현수막 하나에 80~90명씩 찾아왔어요. 유사경쟁업체가 없어서 경쟁이 안 되기 때문에 사람 모으는 게 정말 쉬웠어요.


끝나고 기수별로 동아리별로 스포츠댄스 동아리부터 시작해서 아주머니 글쓰기, 역사동아리, 심지어 연극동아리까지 만들고 연습해서 어린이날 발표 공연도 하고 아주 재밌게 4년을 뛰고 나니까 동네 꼬마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죠. 모르면 간첩이니까... 그렇게 열심히 하다보니까 4년 후에 시의원이 돼 있더라고요. 욕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직분을 다 하다보니까... 그땐 누가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잖아요.


신고리 반대 울산~서울 도보 행군


나는 사부작사부작하면서 ‘윤길동’이라는 별명이 있듯이 주민들과 아주 친근감 있게 결합력을 높이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기초의원과 달리 광역의원은 언론 환경이 정말 좋더라고요. 울산 같은, 중소규모의 아주 작은 도시도 아니지만 중급 규모의 도시는 울산만 방송하고 신문이 뿌려지니까 서울에서는 뉴스가 안 되는 게 울산에서는 뉴스가 되더라고요. 전국 노래자랑하면 박수 치는 사람은 안 비춰줘도 아주머니가 모자 벗어던지고 춤추고 하면 클로즈업 되잖아요. 동네 방송에서는 조금만 열심히 하고 조례안 열심히 발의하면 지역 언론은 비춰주더라고요. 또 친정부적인 분위기에서 내가 지적을 하면 실어주고, 그래서 방송을 많이 탔고 특히 핵발전소 반대운동하면서, 98년부터 박진구 군수가 신고리 신청하면서부터 시작된 투쟁도 열심히 했죠. 시의회로 조례안 발의 시정질의 1등 하고 양과 질 이런 측면에서 열심히 하고 언론환경도 많이 좋아지고 하니까요. 구의원 때 활동을 시의원 때는 화봉동 쪽으로 옮겨서 했죠.


신고리 반대할 때 울산에서 서울까지 도보 운동도 하고 그랬죠. 의회대책위 범시민대책위 주민대책위에 전체 사무국장을 맡았습니다. 반핵운동의 전면에 나선 거죠. 그 때 핵발전소 관련 티브이토론은 내가 다 나간 거죠.


이상범 시의원, 강혁진 북구의원, 나 세 명이 주축이라 지역마다 시민단체와 결합하고 기자회견도 천리행군 13일 걸렸죠. 하루에 40킬로 국도 따라서 걸으니까 한 시간에 도보 5킬로, 6킬로, 그렇게 서울까지 가고. 숙소 없으면 더 걷고, 고개만 넘으면 됩니다, 하는데 두 시간 걸리고. 여관에서도 자고 면사무소 기숙사 방 같은 데 잔 적도 있고, 새까맣게 해갖꼬. 다리가 아파서 힘든 게 아니라 여름이니까 엉덩이가 쓸리니까 그게 더 아프고, 주유소 화장실 있으면 씻고 연고 바르고 물집 잡히고 터지면 진물이 나는데 마비될 때까지는 너무너무 아프죠. 돌부리에 걸리면 너무너무 아프고 붕대 감아놓으면 진물이 흐르다가 굳으면 확 쑤시더라고요. 포도 거봉 이런 특산물 있는데 가서는 박스에 실어서 영양 보충도 하고... 구미 같은 데 가면 기자회견도 하고 울산에서 시의원 구의원들이 왔다고 하는데 대구까지 가니까 키는 조그맣고 반바지에 밀짚모자에 수염까지 덥수룩해서 가니까 의원들은 어디 계시냐고 물어보고...하하.


의원 두 번 하게 된 게... 윤종오가 그냥 노동운동 활동가가 아니라 정치인 윤종오로 변신하는 자양분이 됐습니다. 그래서 2010년도에 구청장 출마하고 진보진영 단일화 과정이 힘들었는데 여론조사 이기고 조합원 투표 이겨서 본선으로 갔죠. 경선은 치열했는데 본선은 수월하게 이겼죠.


북구친환경급식센터, 작은도서관...새 모델
직원 조회 “어머님 한글교실 가장 보람”


의원은 아무래도 책임을 지는 자리는 아니니 주장하고 정책 완성도가 낮은데 지르는 경향이 없잖아 있는데 시민운동, 노동운동이고 반대만 많이 해봤지 정책제안, 자기가 책임지는 운동을 해본 적이 없죠. 핵발전소 반대, 안 좋은 거 들어오면 반대, 정리해고 반대... 우리가 그래서 직접 좀 한 게 친환경급식 무상급식하자, 정책제안운동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하는데 2010년도 구청장에 당선되면서 그동안 내가 하고자 했던 무수한 일들, 제안했던 것들 대부분 안 된다고 시 간부 공무원들이 말했던 일들이 내가 다시 해보니까 되더라고요. 법 때문에 조례, 예산 때문에 안 된다고 했던 것들이 예산은 단체장의 우선순위 따라 결정되고 세 가지 모두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되더라고요.


그래서 친환경급식은 전국적으로도 새로운 모델을 만들게 된 거고, 북구의 장점을 가장 잘 살린 작은도서관 정책도 펼치게 됩니다. 친환경급식은 관련 단위를 모두 추진단위에 참여시키고 교육청, 영양사, 조리사, 급식시민연대 김형근 씨를 센터장으로 앉히고 지역농협, 생산자단체 등을 한 위원회로 꾸려서 민관이 거버넌스 협치의 새로운 모델을 창출하고, 구청이 직접 운영하고, 친환경작목반으로 직접 납품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거죠. 급식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는 교육의 장이 되고 농민들에게는 소득 보장이 되는 기회고, 주민은 지역농산물 친환경 지산지수, 로컬푸드를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돼 마을기업, 사회적기업, 마을공동체를 육성해 1거3득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듭니다. 이웃 동구는 농사 잘 안 지으니까 우리 농산물을 쓸 수 있도록 모델을 만들었죠.


작은도서관은 그저 도서관 많이 짓고 책만 쌓아놓는 것이 아닌 기존의 아파트 마을 도서관을 책만 빌려주는 것에서 시스템을 바꿔요. 원래 상근자가 없는데 이 사람들이 상주해 고정적으로 관리할 사람을 주면서 책만 빌려주다가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키는 거죠. 사서도우미양성과정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 다른 지역에 견학도 많이 보내고 시설 리모델링을 하면서 운영의지가 높은 곳을 우선선정하고 운영비를 일부 지원하고 특히 중앙도서관 권역별 도서관 마을도서관 시스템 통합을 해서 상호대차가 가능하게 했죠. 이를 위해 책에 바코드 찍어서 분류법 교육도 다 시키고... 내 아이 잘 키우려고 보낸 마을도서관에서 우리 아이를 잘 키우고 여성으로 엄마로 지역사회 주역으로 사회에 눈을 뜨게 하는 공간으로 북구의 도서관을 바꿔나갔습니다. 도서관 정책의 전국적 모델이 된 거죠. 북구의 책 선정사업도 하게 되고 책 잔치도 하고 도서박람회처럼... 개별 작은도서관에서 잘 하고 있는 사업들을 다 가져나와서 공유하죠. 북구에는 공식적 등록된 데만 약 15곳, 비공식까지 포함하면 작은도서관이 서른 개 정도 됩니다.


당사낚시공원, 전국에 있는 낚시공원을 다 찾아가 보고 실패한 이유를 찾아서 정 반대로 해봤지요. 낚시인만이 아니라 주민들이 올 수 있는 공간이 되도록 포토존을 만들고, 주민에게 수익이 되도록 했죠. 호수공원은 송정 호수공원이라 하면 그냥 동네 공원인데 박상진 호수공원하면 역사적 공간이 되잖아요. 또 민주노총까지 참여하는 노사민정 협력사업을 열심히 하고 대통령상을 두 번 받고 국무총리상도 받고 주민자치 박람회를 해요. 유치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는데 2013년에 하게 되고.. 이런저런 덕분에 해마다 지자체 평가에서 최우수기관상도 두 번 받고 청장 재임기간에 사업들 성과를 많이 발휘했죠.


어머님 한글교실이 가장 보람되는데 이 사업 하나만 이야기해도 염포동에서는 염포.양정에서 30명밖에 못했는데 구청장되니까 온 동네에 300~400명해도 되잖아요. 직원 조회할 때 “내가 했던 시민사업 중에 한글교실만큼 보람된 게 없더라. 까막눈이 많은 이유가 일제강점기 전쟁 때 배움의 기회를 놓친 거다.” 그러니 동장들이 경로당 찾아다니면서 자기들이 모아서 교실을 만들더라고요. 선생님 양성 프로그램 만들고 연수도 보내고 어머님 공부 프로그램 만들고 경연대회 작품발표회도 하고 편지글 적기도 하고 한글 배워서 좋았던 것을 말씀해주시면 내가 일일이 답장해드리고... 발표회 때 할머니들이 힙합춤도 추고 이런 거 보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 할머니들께서 저를 보면 볼을 비비고 눈물을 죽죽 흘리십니다. 기초자치단체가 주민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서비스가 그런 게 아닐까요. 시설 많이 설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 어떻게 참여시키고 주인의식을 갖게 하고 그 과정에서 일자리가 되고 환경이 되고 복지가 되도록 하는 사고를 가질 수 있는가? 가령 화봉동 공원을 만든다고 해도 행정이 예산 들여 그냥 지으면 쉬워요. 하지만 만들 때부터 어떻게 만들면 좋을까, 비가 오면 이렇고, 물고기는 뭐가 살고, 어르신들부터 많이 말씀을 해주세요. 이건 이런 특성이 있고 저건... 물레방아가 돌고 연꽃이 있으면 좋겠다, 여러 말씀해주시면 그걸 받아서 하다못해 꽃밭을 심더라도 돈 들여 그냥 심지 말고 꽃과 나무는 지역주민들이 함께 심고 문화 전문가가 오고, 생태 전문가가 오고, 정우규 박사 등이 꽃 식물은 어떤 게 잘 자랄까 조언해주고. 내가 그냥 만든 공원이 아닌 주민 모두 다 참여해서 함께 만든 공원은 다릅니다. 주민들이 직접 만든 공원이니까 누가 쓰레기라도 버리면 주민들이 직접 그러지 마라고 뭐라 합니다. 같은 예산이 들더라도 결과가 천지차이로 달라져요.


또 사업은 누구와 협력할 것인지, 어느 부서와 협력할 것인지, 주민참여는 어떻게, 협력은 어떻게 할 것인지 매뉴얼을 만들었어요. 울산대 교수든 발전연구원이든 환경연이든 찾아가고, 아니면 전화라도 해서 지역사회와 함께 하도록 하는 무조건 의견수렴부터 하는 게 기본이 되도록 만들었는데 이게 관심을 안 가지니까 무너지더라고요. 공무원사회는 자기가 절대로 아이디어를 내서 하지 않습니다. 리더가 알려주는 것만 하고 그것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것만 합니다. 진급과 보직에 목숨을 거니까 자기 딴에는 잘했는데 승진 안 될까봐, 탈날까봐, 구청장이 관심을 가지는 것만 하는 거죠. 도시가 어떤 방향을 갈 건 지에 대한 비전을 리더가 가져야 해요. 주민을 참여시키나 안 시키나 결과는 비슷하더라도 관심을 갖도록 열심히 알리고 해야 하는 거죠. 단계를 밟아가면서 축적되고 쌓여서 내가 집행할 때가 되니까 이런 것들을 많이 하게 된 겁니다.


코스트코 반대는 영세상인 보호 위한 결단
“다음 구청장이 5억 구상권 철회하면 돼”


이=코스트코 얘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윤=코스트코 윤. 내 별명이 그렇잖아요. 어떻게 보면 내 인생의 멍에이기도 하지만 소신 있는 정치인 윤종오를 만든 사건이죠. 그 후과는 많이 고통스러웠고 자유한국당 구청장이 구상권을 청구해서 1심 1.5억, 2심도 있고 또 대법을 진행해야 하고, 그 이전에 6년 전으로 돌아가 그때 붙은 소송으로 형사 벌금 천만 원, 민사 진행돼 3억7600만원 확정이 돼 이자가 불어서 하여튼 5억이 된 거고. 아이러니한 건 원래 진장유통단지조합의 옛날 조합원들은 원래 영세상인이었어요. 활용방안을 찾지 못해서 그들이 코스트코에 땅을 빌려준 건데 근데 지금은 그 지분이 모다아울렛으로 조금조금씩해서 다 넘어갔어요. 결과적으로 북구청이 모다아울렛에 돈을 다 주고 그 돈을 지금 나한테 청구하는 거죠. 구청장 개인의 일탈로 벌어진 상황이 아니고 영세상인 보호를 위한 결단이자 구청장 고유의 행정행위인데 이것에 구상권을 청구하는 것은 지방자치의 아주 잘못된 사례를 남기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만약 이명박에게 구상권을 청구한다면 몇십조 원씩을 청구해야 할 겁니다. 인천에도 월미은하레일에 천 억 들었는데 고철이 됐죠. 다시 활용한다는데 해도 몇백억 원이 듭니다. 박맹우 전 시장님 울산에 경전철 놓는다고 설계까지 다 했는데 결국 안했잖아요. 설계비 35억원에 구상권 청구하면 누가 냅니까. 단체장의 정책적 결정이 개인의 일탈이 아닌데도 이렇게 청구하는 건 도리가 아니죠. 정치적 탄압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무리가 잘 될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잘 되도록 해야겠고. 강정마을에 구상권 청구한 거 정부가 얼마 전에 철회했잖아요. 다음 단체장이 구상권을 철회하면 됩니다. 민사하고 비슷한 거기 때문에 방법을 찾아야죠. 모금을 하든 어떻게 하든.

바로 현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정


“억울하지만 담담하게 꿋꿋하게 활동”


이=선거법 위반, 대법원 판결도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윤=일년반 정도 국회의원 활동 하면서 의원 전에 구청장 하여튼 떨어지고 여러 중요한 과정이지만 3년 반 동안 무수하게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구청장 떨어진 배경은, 첫째 내가 많이 부족했고 둘째 분열, 한 걸음 더 들어간다면 통합진보당 사태, 셋째 선거법 위반에 휘말린 것입니다. 그래서 1.7프로 차로 떨어졌는데, 윤종오는 어지간하면 된다 그랬는데 못 넘었죠. 복직도 안 돼 소송도 걸고 효력정지 신청해 옛 안행부 공직자윤리위 결정을 번복해달라고 해서 복직했습니다. 현대자동차에 1년 반을 다니고 했는데 2심에서 패소했어요. 대법원 판결이 났는데 바로 복직이 안 되기 때문에 5년간 제한해서 생계가 문제가 생겼습니다. 구청장 떨어지고 났을 때 참 명색이 구청장이 대단한 자린데 현장에서 콘베이어 탄다는 게 처음에는 맘이 많이 아팠습니다. 나도 사람인 지라.


국회 입성하게 된 건 가장 큰 요인은 진보진영의 대단결이었고, 작은 차이는 극복하고 일치단결, 진보단일화, 야권단일화를 일체 잡음 없이 하다 보니 압승할 수 있었잖아요. 상대는 분열되고. 기초부터 구청장까지 지역사회 저변을 확대하고 여러 정책하고 인간적으로 관계를 많이 넓히고... 플러스 단결. 이런 것들이 승리로 이끈 요인이 됐고요.


일년반 동안 또 노동개악 양대지침, 성과연봉제 철회, 정부의 4대 노동법 개악에 앞장서 싸우고, 박근혜 퇴진투쟁 300명 의원 중에 가장 먼저 박근혜 앞에서 피켓팅도 하고 촛불시위도 안 빠지고, 울산, 경주지진 거치면서 국민 생명 안전을 지키는 정부, 행정, 이런 사회가 되도록 매진했죠. 특히 울산은 핵발전소 둘러싸여 이런 일에 많이 신경 썼죠.


선거법 위반 안 하려 노력했죠. 유사선거사무실 동행마저 제대로 챙겼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전혀 고의성 없고 법을 위반하지도 않았고, 내가 위반할 이유도 없고 위반하면 안 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아는데, 1심 판결 90만원, 스무 번 재판해서 무죄 받은 사실을 갖다가 2심에서 심리 한 번 없이 유죄로, 또 대법원에서 홍준표하고 같이 하는 날 돈 받은 게 너무 뻔하고 상식적으로 다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직접적 증거가 없다고 무죄를 주고, 그걸 비교한다면 나는 주변 다 털어가서 3만5천 통 다 털어서 했는데도 증거가 없다고 나왔는데도 의원직을 상실시킨 건 사법부의 정의가 상실된 거죠. 박근혜 적폐검찰들이 무리하게 압수수색 검찰수사를 했는데 정권 바뀌고도 이런 결과가 나와 참담하고, 나를 지지해준 울산주민, 북구 주민, 노동자들께 송구하고, 억울하지만 현실이기에 담담하게 씩씩하게 이런 거에 구애 없이 꿋꿋하게 활동을 해야지만이 믿고 지지해준 분들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사정이라서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해야겠지만 노동자, 서민, 어려운 분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진정성 있는 활동을 하자, 노동의 가치가 존중 받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내고, 평화통일의 세상을 열어내는 활동을 작은 곳에서나마 실천하며 살아갈 계획입니다.


87년의 경험은 ‘시대와의 조우’
노동자 국회의원 북구 수성 중요


이=87년의 경험이 이후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윤=나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시대와의 조우라는 말을 믿습니다. 1987년 7월에 울산 현대자동차와 인연을 맺고, 큰 사건이 일어나고 수만 명이 같이 맞이했지만 그것을 어떤 식으로 대하고 판단하며 몸을 던질 것인가는 그 사람이, 그 이전에 살아왔던 삶이 그런 결정을 하는 데 영향을 주는 것이고, 그런 순간이 왔을 때 나는 결단을 했던 것이고,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운동을 쉬어본 적은 없고 맡은 바 직분에 맞게 하다보면 길이 열리고 출마하면 당선이 되거나 누군가 일을 같이 하자고 하고...


세상은 돌고 도는 거 같습니다. 1987년에 험한 걸 뚫고 일어섰지만 그런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거죠. 그런 것이 새로운 큰 투쟁을 촉발시키고 노개투, 국제통화기금 사태와 엮이고... 또 20년이 흘러 비정규직 확대, 양극화 심화, 국민 삶의 질 하락 등으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들이 박근혜 국정농단과 함께 시민혁명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거꾸로 돌아가지 않도록, 새롭게 더불어 잘 살고 건강, 환경, 복지권 등이 후퇴하지 않고 확대되도록, 전체적인 삶의 질을 올릴 수 있도록 각 단위가 끊임없이 투쟁하지 않으면 이를 후퇴시킬 세력은 언제든지 존재하므로 우리가 힘을 키워야 합니다. 민주당, 자유한국당이 주도하는 정치 행태로는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이고, 진보진영이 갈라져있고 실망도 많이 줬지만 작은 차이를 극복하고 대단결해 교섭단체도 되고 정권을 잡을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민주진영 전체로 보면 역대 어느 선거보다 올해 지방선거 분위기는 좋은데 진보진영 내부를 보면 그렇지 않아 보이는데요.


윤=지방선거 전에 진보대통합이 이뤄지면 좋지만 시기의 촉박성, 정치지형을 볼 때 야권연대, 진보연대, 정권교체 이후 진보진영의 아주 성과 있는 결과물을 얻어내는 게 쉽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수구꼴통 세력이라 했던 자유한국당의 지역조직이나 인물 측면에서 민주당이나 진보진영이 낫다고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좀 고전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북구 국회의원 선거가 안 열렸으면 뭔가 정리할 수 있는데 이게 분열을 촉발할 수 있는 소재가 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기 때문에 노동운동 진영에서 명망가라거나 사실 제정당 제조직이나 경쟁 구도로 형성될 가능성이 높아서 지난번 선거처럼 중심으로 싹 모아내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어 안타깝습니다.


시장선거도 당연히 매우 중요하지만 노동자 국회의원 북구를 수성하는 것도 지방선거의 관전 포인트 중에 중요한 모티브입니다. 제2의 윤종오 같은 사람이 널려있으면 좋겠지만 단계 밟아서 올라온 사람이 사실상 없기에 주민 표심을 다 받아내는 게 만만찮죠. 민주노총 지역본부, 현대차지부 대기업 노동자들의 활동가들이 내 조직, 내 정당 이렇게 욕심만 낼 것이 아니라 맘을 열고 후보나 이런 것부터 시작해 대단결 노력을 기울여야 기초단체, 광역의원, 기초의원 등에 성과를 얻고 그렇지 않으면 보수꼴통에 울산을 다 넘겨주는 결과를 얻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녹취=이채훈 기자
대담/정리=이종호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