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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월이 화전을 일구었던 검등골에 안내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



부모가 일찍 돌아가서 친척집에 의지하던 해월은 제지소에 들어가면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했다. 제지소 생활을 통해 생활의 안정을 찾은 해월은 키도 크고 힘도 센 청년으로 성장하였다. 열아홉 살이 되자 해월은 늠름한 청년으로 주위의 눈길을 끌게 되었다. 이런 해월에게 흥해읍에 사는 과부가 사람을 보냈다. 어린 나이에 청상이 되었지만 돈이 많았던 오씨가 해월의 용모가 뛰어남을 듣고 매파를 보내왔다. 해월은 비록 가난한 신세였지만 다른 사람의 재물을 통해 졸부가 되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조짐이라고 하면서 청혼을 거절하였다. 자신의 처지가 빈한하더라도 자신의 능력이 아닌 남의 도움으로 살지 않겠다는 해월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장면이다.


이러한 일이 있어서인지 해월은 이 해 가을에 흥해읍 매곡동에 살던 밀양 손씨(?~1889년)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의 행적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으나 처가인 흥해 매곡으로 가서 처가살이를 하면서 농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62년 가을에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가 관의 핍박을 피해 지낼 곳을 문의하자 해월은 이곳 매곡동 손봉조의 집을 소개해서 수운은 한 겨울을 매곡동에서 지내고 봄에 다시 용담으로 돌아왔다. 수운은 이 매곡동에서 동학 최초의 조직인 접주제(接主制)를 시행하였다. 손봉조는 부인인 손씨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이런 점을 볼 때 해월은 매곡동에서도 성실하게 일해 처가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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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월 최시형 어록비. 백성의 벗이었던 해월을 기리기 위해 비석의 글씨는 유명작가의 글이 아니라 신광중학교에 다니는 이향미 학생이 썼다. >



가을에 농사가 끝나면 해월은 다시 터일로 가서 종이 만드는 일을 하면서 10여 년의 시간을 보냈다. 평범한 시골 농부의 모습으로 살아가던 해월은 스물여덟 살이 되던 1854년 신광면 마북동으로 이사하였다. 마북동은 기일(基日, 터일)에서 동쪽으로 고개 하나만 넘으면 있는 동네였다. 마북은 해월이 어린 시절부터 놀러 다니던 곳으로 익숙한 곳이어서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마북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마북저수지가 있지만 필자가 처음 찾았던 1989년에는 저수지도 없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 그대로였다. 포항에서 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마북에 도착하니 한 20호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다. 마북은 아랫마북과 윗마북의 두 고을로 되어 있는데 해월이 어디에서 살았는지 그 동네의 사람들에게 물어도 확인하지 못하였다. 


마북으로 온 해월은 얼마 지나지 않아 집강(執綱)의 직책을 맡았다. 집강은 지금의 이장과 같은 직책으로 관청을 출입하면서 관에서 주문하는 일을 주민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다. 해월이 집강의 직책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로는 문중인 최씨들이 많이 있었던 점도 없지 않았으나 해월이 공겸유위(公謙有威: 공적이고 겸손하며 위엄이 있다.)하였기 때문이었다. 집강의 직을 맡은 해월은 벼슬아치들이 백성을 못살게 구는 것을 막고, 좋은 일을 한 사람을 표창하여 억울한 사람을 잘 보살펴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6년간의 집강을 마치자 동네 사람들이 그를 위해 송덕비를 세워 주었다고 한다.


해월은 마북에서 농사를 지었지만 풍족하지는 않았다. 식구도 늘어나자 해월은 마북에서의 일로는 생활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래서 해월은 33세인 1859년 마북에서 산 골짜기 안쪽의 검등골(劍谷, 검곡)으로 들어갔다. 그는 화전을 하기 위해 이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마북에서 약 40분 정도 괫재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왼쪽 둔덕 위가 검등골이다. 네다섯 가구가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있었고 괫재에서 흘러내리는 개울을 따라 양쪽으로 다랑논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런데 이곳이 1998년 태풍 야니로 인해 산사태가 나서 산에서 자갈들이 쓸려 내려와 아름답던 검등골의 풍광이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검등골 바로 아래에 사태 방지를 위한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해월 사후 폐허가 되었던 검등골을 다시 찾아낸 인물은 평생 동학의 사적지를 찾아다닌 표영삼이었다. 그는 경주 일대를 샅샅이 훑어가며 검등골을 찾았는데 당시 이곳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1978년 이곳을 답사하였는데 4채 정도의 집자리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계곡 건너편 안쪽에는 계단식 밭이 500평 정도가 있었고 사방 산 중턱에는 화전자리가 여기저기 보였다.”(<동학Ⅰ> )


해월은 동학에 입도하기 이전에는 평범한 농부였다. 해월이 살았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해월의 어록비가 이 마을에 세워져있다. 신광읍에서 청하로 가는 68번 국도를 타고 가다 터일과 마북으로 들어가는 신광온천으로 좌회전하자마자 왼쪽 개울가가 그곳이다. 이 어록비는 지금부터 20년 전인 1998년 해월이 이곳에서 성장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천도교인 박노진 씨가 중심이 돼서 마을 분들을 찾아다니며 힘들게 세웠다. 필자도 당시 약간의 보탬이 되었는데 동료인 부산 동천고등학교에 근무하던 최만식 선생님이 이 지역 출신이라 이장들을 찾아 협조를 구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비석을 세웠을 때 특별했던 기억이 있다. 비석을 세우는 것을 결정하고 비문을 누가 쓰느냐에 대해 의논했는데 박노진 씨가 해월이 민중의 벗이기 때문에 비석의 글도 유명한 작가의 글씨보다 이 동네 사람의 글씨로 하자고 해서 신광중학교에 다니는 이향미 학생에게 부탁해서 적었다. 글을 쓴 때가 중학생이었으니 지금은 3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을 것 같다. 잘 쓴 글씨는 아니지만 정성을 다해 적은 해월의 가르침은 아래와 같다. 


‘해월 최시형 선생님 말씀’
사람을 대할 때에 언제나 어린아이 같이 하라. 항상 꽃이 피는 듯이 얼굴을 가지면 가히 사람을 융화하고 덕을 이루는 데 들어가리라. 누가 나에게 어른이 아니며 누가 나에게 스승이 아니리오. 나는 비록 부인과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배울만한 것은 배우고 스승으로 모실만한 것은 스승으로 모시노라. 일이 있으면 사리를 가리어 일에 응하고 일이 없으면 조용히 앉아서 마음공부를 하라. 말을 많이 하고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은 심술(心術)에 가장 해로우니라. 남을 훼방하고 배척하여 삶을 상하게 하는 것은 군자가 이르기를 불효라 하였으니, 사람의 장단을 말하는 것은 도덕에 크게 해로우니라. 양공은 구부러진 재목을 거절하지 아니하고, 명의는 병든 사람을 거절하지 아니하고, 성인(聖人)의 도를 배우는 자리에는 어리석은 사람을 거절하지 아니 하느니라. 말은 행할 것을 돌아보고 행동은 말한 것을 돌아보아, 말과 행동을 한 결 같이 하라. 말과 행동이 서로 어기면 마음과 한울이 서로 떨어지고, 마음과 한울이 서로 떨어지면 비록 해가 다하고 세상이 꺼질지라도 성현(聖賢)의 지위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만물이 시천주(侍天主) 아님이 없으니 능히 이 이치를 알면 살생은 금치 아니해도 자연히 금해지리라. 제비의 알을 깨치지 아니한 뒤에라야 봉황이 와서 거동하고, 초목의 싹을 꺾지 아니한 뒤에라야 산림이 무성하리라. 손수 꽃가지를 꺾으면 그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오, 폐물을 버리면 부자가 될 수 없느니라. 날짐승 삼천도 각각 그 종류가 있고 털벌레 삼천도 각각 그 목숨이 있으니, 물건을 공경하면 덕이 만방에 미치리라.(<대인접물>)


해월의 가장 대표적인 가르침을 적은 이 어록비는 안타깝게도 현재 잘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여름 이 어록비를 찾으니 앞쪽에 누군가 농사를 짓고 있어 어록비로 접근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농작물이 비석이 가려 사람들이 찾기도 힘들어 비석을 세운 의미가 시들해졌다.


해월은 검등골에서 화전을 일구며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초라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그렇게 농사를 지으며 종이를 만들며 생활하였다. 이런 그에게 일생일대의 변화가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와의 만남이었다. 해월이 35세였던 1861년 여름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왔다. 경주 용담에서 신인(神人)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가보자고 권하였다. 마음이 동한 그는 다음날 새벽 몇몇 친구들과 함께 경주 용담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 발걸음이 그의 운명을 바꾸었다.


성강현 부산 동천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