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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화로 유명한 옥문성 화백이 그린 수운 최제우 존영으로 1991년 10월 28일 수운 탄신 167주년을 기념하여 용담정에 봉안하였다. >



해월이 사는 검등골에서 수운 최제우가 있는 경주의 용담까지는 약 50㎞가 되는 짧지 않은 거리이다. 검등골을 출발해 신광, 안강을 거쳐 현곡을 가로질러 가도 한 나절은 꼬박 걸리는 거리다. 용담으로 걸으면서 해월은 수운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소문이 산간벽촌에 사는 자신한테까지 알려졌을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다. 하지만 자신의 기구한 삶의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감을 갖고 용담으로 향했다. 해월이 수운을 찾았던 장면을 최동희는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자기보다 두세 살 더 되어 보이는 연화관에 정결한 도포를 갖추어 입고 직접 뜰아래까지 내려와 맞이하는데, 태도가 어찌나 정중한지 해월은 송구스럽기만 하였다. 키는 그리 큰 편은 아닌 중키요, 몸은 호양호양하고 얼굴의 윤곽이 뚜렷하고 날카로왔으며, 더구나 거울처럼 청수한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데도 이글거리는 두 눈에는 마주 설 수 없는 위엄이 담겨져 있었다.”(최동희, <해월 최시형>) 


해월은 단박에 수운에게 빠져들었다. 우선 해월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운에게서 사람으로 대접을 받았다. 고아로 자라며 천덕꾸러기 신세였던 해월에게 수운의 따뜻하고 정중한 대접은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위의 글에서처럼 수운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존댓말로 극진히 대접하였다. 더구나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분이 겸허하고 친절하게 대접하는 것에 해월은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사람이 한울님을 모셨다는 시천주(侍天主)의 종교 체험을 바탕으로 동학(東學)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는 용담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빈부나 부귀의 차별을 두지 않고 정중하게 맞이하며 동학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다. 해월은 이러한 수운의 진실한 면모에 감동하여 그 자리에서 동학에 입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는 1824년 10월 28일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서 탄생하였다. 아버지는 경상도 일대에 이름이 알려진 유학자 최옥이었으며, 어머니는 곡산 한씨였다. 경주가 본관으로 시조는 신라 말기의 석학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었다. 7대조인 정무공(貞武公)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하다 무과에 급제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으며, 공주영장으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이끌고 경기도 용인의 험천 전투에서 선봉에 섰다 순절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조선의 가장 큰 두 국난에서 공을 세운 조상에 수운은 자부심을 가졌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제’로 알려진 경주 최부자집도 정무공 최진립의 후손이다.


기록에 따르면 수운이 태어나는 날, 오색구름이 집을 감싸고 상서로운 향기가 산실에 가득했다고 한다. 또 마을 앞 구미산이 사흘 동안 크게 우는 신비한 현상이 있었다고 한다. 부친인 근암공이 63세에 낳은 만득자로 태어난 수운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비범했다. 하지만 그는 어릴 적부터 남존여비와 반상의 차별에 대해 비판할 정도로 당시의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 인식을 갖고 있었다. 10세를 전후해 사서삼경에 통달할 정도로 박학하였던 그였지만 신분상 재가녀의 자손이어서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신분이라 인생에 대한 회의감에 빠졌다. 그러나 주위를 살피니 자신과 같은 신세인 백성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기 위해 구도의 길을 결심하였다. 당시 매관매직을 자행하던 세도정치의 문란과 이양선이 출몰하는 어수선한 정세 속에서 살 길을 찾아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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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여시바위골, 수운은 이곳에서 천서를 받는 신비한 체험을 하였고 이후 기도를 통해 동학을 창도하였다. >



10여 년간 유불선(儒佛仙)은 물론 서학(西學) 뿐 아니라 도참서(圖讖書)와 음양복술(陰陽卜術)까지 탐독하였으나 세상을 건질만한 도를 얻지 못한 그는 1854년 처가가 있는 울산의 여시바위골((裕谷洞, 유곡동)에 정착하였다. 수운은 이곳에 초가를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사색을 통한 명상(冥想)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듬해 3월에 신비한 체험을 하였다. 금강산 유점사의 스님 한 분이 찾아와 책 한 권을 내보이며 뜻을 물었다. 수운은 글자는 모르는 것이 없었지만 뜻이 난해하다고 하자 스님은 3일 동안 의미를 파악해 보라고 권하였다. 스님이 간 후 수운이 여러 번 책을 살피니 책의 의미를 확연히 깨달았다. 3일 후 스님에게 책의 내용을 전하자 스님은 이 책이 하늘에서 선생님에게 내린 책이라고 하면서 이 책의 뜻대로 정진하라는 당부를 하였다. 수운이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드니 스님은 홀연히 사라졌다. 천도교에서는 이 사건을 ‘을묘천서(乙卯天書)’라고 한다. 이 책의 내용은 전하지 않으나 다만 기도의 가르침이 담긴 것이었다고만 알려져 있다.


수운은 이 책의 가르침대로 이듬해인 1856년 여름에 양산의 내원암에 들어가 49일을 작정하고 기도에 들어갔다. 그런데 47일째 되는 날 숙부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예지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그는 다시 천상산 적멸굴에 들어가 49일 기도를 마쳤다. 작은 이적은 얻었으나 자신이 원하던 세상을 구할 만한 큰 깨달음을 얻지는 못하였다.


수운은 1859년 10월 가족과 함께 고향 용담으로 돌아와 ‘불출산외(不出山外,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산밖을 나가지 않겠다.)’를 맹세하고 죽음을 각오한 구도에 들어갔다. 이러한 오랜 구도의 결과 1860년 4월 5일 한울님과 만나는 신비한 종교체험을 통해 동학을 창도하였다. 수운은 한울님으로부터 ‘시천주’와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가르침을 받았다.


“내 마음이 네 마음이니라, 사람들이 어찌 이를 알리오.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모르니 귀신이라는 것도 나니라. 너는 무궁무궁한 도에 이르렀으니 닦고 단련하여 그 글을 지어 사람들을 가리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


수운은 자신이 깨달은 무극대도(無極大道)가 세상을 건질만한 가르침인가를 1년 가까이 살펴보았다. 확신이 선 그는 이듬해인 1861년 6월에 자신이 깨달은 도를 세상에 전하는 포덕(布德)을 시작하였다. 그의 첫 포덕은 가족이었다. 평생 구도의 길을 걸으며 고생만 시킨 부인 박씨와 아들, 딸에게 도를 전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이 깨달은 시천주를 바로 실천하였다. 자기 집의 두 여자 몸종을 해방시켜 한 사람은 며느리로 삼고, 또 한 사람은 수양딸로 삼아 가족으로 맞아들였다. 이러한 수운의 결단은 성리학적 가치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남녀 차별과 반상 차별의 과감한 철폐였다. 이러한 수운의 파격적인 언행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구름같이 용담으로 모여들었다. 해월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평생 차별당하면서 살아야 했던 그에게 수운의 가르침은 광명과도 같았다. 해월 인생의 대전환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수운이 창도한 동학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의미를 말하고 있다. 그 중 한양대학교 연구교수인 김용휘는 수운의 핵심 사상인 시천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동학은 결국 수운이 시천주의 자각으로부터 탄생했다. 시천주 사상은 나의 몸이 한울을 모신 거룩한 성소라는 인식과 함께, 다른 모든 사람도 한울을 모신 신령하고 거룩한 존재라는 인식을 낳았다. 이런 몸 중시와 시천주 인식의 확대는 인간 개체에 대한 중시로 발전하여 사람 하나하나가 상하귀천에 관계없이 모두 한울을 모신 평등하고 거룩한 존재라는 개념을 심어주었다. 시천주 개념이 정립됨으로써 비로소 동학은 전통 사상, 서학과 차별성을 띠게 되었고 그 정체성을 찾았다.”(김용휘, <우리 학문으로서의 동학>) 


해월은 수운으로부터 동학의 수행법인 주문(呪文)을 전수받고 검곡으로 돌아왔다. 그는 집 한 켠에 가마니를 두르고 일이 없으면 그곳에 앉아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한 달에 두세 번 검등골에서 용담을 찾아 수운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렇게 그는 동학꾼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성강현 부산 동천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