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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녹두거리 손지도. 법대 85학우 2명이 그려서 88년 졸업앨범에 실은 녹두거리 지도.  지도에 있는 가게 가운데 지금 남아 있는 건 호프집 ‘휘가로’ 밖에 없는 듯하다. >


서울 관악구가 마을관광사업추진단과 손잡고 '박종철거리'를 조성하고 지난 13일 선포식을 열었다. 관악구는 2017년부터 서울시 관광분야의 사업비를 지원받아 '관악, 민주주의의 길을 걷다' 관광지를 조성하고 있다. 지난 해 6월엔 민주항쟁 30주년을 기념해 1987년 1월 14일 사망한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회장 ‘박종철 열사’를 상징적 인물로 정했다. 박종철 열사가 살았던 하숙집이 있던 거리에 기념동판을 설치하고 벽화와 안내표지판도 만들었다. 관악구는 박종철 열사와 민주주의 투쟁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관광코스를 조성하고 마을관광해설사를 양성할 계획이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그 당시 이웃들과 어울려 살았던 생활문화나 감성적인 것들을 건들었다면 영화 <1987>은 당시 정치시대상과 독재정권에 대항해 싸우던 사람들 이야기였다. 영화가 개봉되고 나서 당시 이야기를 하나 둘 꺼내는 일들이 많아졌다.


참 오래된 기억들이다. 기억과 추억은 아름답지만은 않아서 어떤 것은 외면하고 싶다. 어떤 동무는 그 시대 겪었던 일이 너무 충격적이라 특정 사건을 아예 몽땅 잊어버리기도 했다. 고문후유증으로 일상생활에 복귀하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선배들도 더러 있었다. 그 때의 기억들이 그러했다.


과 신입생 환영회 때 본 그 세련되고 멋져 보이는 선배들에 비하면 우리는 막 서울 구경에 어리둥절하던 촌닭들이었다. 서울친구들은 어떤지 몰라도 잔뜩 위축된 신입생이 선배들과 처음 만나는 술자리가 녹두거리였다. 녹두거리엔 큰 식당이 없어 신입생 환영회처럼 큰 술자리는 학교와 많이 떨어진 봉천사거리 큰 중국집 ‘미도관’이나 ‘왕도장’에서 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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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거리 표지판과 벽화.>


입시에 찌들었던 몸과 마음들이 선배들이 권하는 술잔과 말에 습자지가 젖듯이 흐물거렸다.
우리는 선배들이 자기 써클이나 학회로 끌어들일만한 참한 후배들을 고르고 있었다는 것을 잘 몰랐다.


교양으로 듣는 강좌는 재미있어서 대학을 다닌다는 것을 실감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강의를 열심히 듣는다는 것이 사치스런 모습으로 비쳐지던 긴장감 높은 시절이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사복경찰(‘짭새’라고 불렸다)이 학교에 상주하고 있었고 이들을 피해 도서관 창문에서 구호를 외치던 선배가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들이 실감나지 않았다. 교정은 봄빛이 그리 푸르고 아름다웠기에... 간혹 아크로폴리스에 열리는 쩌렁쩌렁한 집회나 게시판을 가득 메운 대자보들이 가던 길을 멈추게 만들었다.


녹두거리는 아래로 흐르는 복개천 옆으로 산 입구까지 길이 뻗어 있었다. 녹두거리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겼을까? 나중에 ‘청벽집’으로 바뀐, 감자탕에 동동주를 싸게 파는 ‘녹두집’이라는 유명한 술집이 있었는데 그 집이 유명해서 녹두거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서울로 올라온 가난한 지방 학생들은 자취, 하숙, 혹은 고시촌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산과 가까워질수록 방세는 쌌고 쪽방고시촌들은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그 곳 집들은 옥상을 가진 다양한 2~3층 짜리 단독주택이 대부분이었다. 방세가 싼 집을 구하느라 지하보일러실을 개조한 반지하방에서 생활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운동하기에 바쁘고 방세 내기도 힘겨운 선배들은 후배들 집을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형편이 좋은 친구들은 하숙을 하기도 했지만 하숙하는 친구를 찾아가면 언제나 밥 한 끼 먹는 일조차 주인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다. 연탄을 직접 갈아야 하는 자취생활이 되레 마음은 편했지만 수시로 몰려드는 동무들은 복병이었다. 두 명이 같이 쓰는 자취방에도 밤 12시가 다되어 라면 사들고 찾아오는 동무들에게 습격당하는 일이 빈번했지만 그런 불편을 참아주는 학우들이 살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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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열사 기념동판.>


정규수업은 학교 안에서 있었지만 비정규수업은 바로 이 이 녹두거리에서 이뤄졌다. 선배들이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을 힘주어 말하고 목줄대 불끈 솟는 노래를 부르거나 술이 거나하게 되어 어디서 듣도 보지도 못한 감성적인 노래를 부를 때면 가슴이 뭉클했다. 어떤 주제는 동료끼리 혹은 선후배가 늦도록 격렬하게 논쟁도 벌였다. 정규과정은 머리로 배우는 과정이었고 비정규과정은 몸으로 실천으로 배우는 과정이었다. 거리투쟁을 나가 돌아오지 못하는 동무가 있는 날은 더 많은 술을 들었다. “투쟁! 투쟁!”


근방에는 작지만 여러 사회과학 서점이 있었다. ‘그날이 오면’, ‘동방서적’, ‘전야’, 복개천 건너편에는 ‘열린글방’이 있었는데 경찰에게 책을 압수당하고 주인이 잡혀갔다는 소문이 간간이 들렸다. 녹두거리 복개천 따라 저 아래 쪽에는 ‘광장서적’이 있었는데 서점을 지키는 주인이 이해찬 전 총리였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이 한때 이 서점 직원으로 일했고 이 의원의 보좌관이 되었다. ‘집현전’ 등 수많은 복사집들이 없었다면 참혹한 그 시대를 싸워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지하로 들어가는 벽에 얼룩지고 곰팡이가 핀 ‘청벽집’에서 자주 모였는데 술값이 싸기도 했지만 지하방이라 아무리 떠들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안주가 다 떨어져 가면 물통 물을 더 붓고 밑반찬을 한꺼번에 부어 끓이면 또 새로운 국물안주가 되었다. 그 시쿰한 총각김치를 몇 번이나 가져왔는지... 탈, 한마당, 달구지, 청석골, 엘리트, 스페이스 등등 그리운 술집들. 술을 파하고 나오면 어둑한 샛골목에는 토해내고 등을 두들기는 학생들도 많았고, 여학우들도 길가에 쓰러져 업혀가는 일도 간혹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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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집 ‘휘가로’. >


군대를 면제 받아 일찍 바로 회사로 들어가게 된 처지라 녹두거리를 떠나왔다. 모두가 다 곤궁했던 시절, 동무들이 득시글거리는 녹두거리에 살면 회사 출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월급이 동무들 술값이나 밥값으로 나가는 것이야 견딜 수 있지만 동무들과 어울리려면 밤 12시가 넘도록 당구장에서 견뎌야 하는데 도저히 체력을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관악구 신림동 달동네를 떠나 신촌 근처 북아현동 달동네로 이사 간 것이 1990년 가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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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거리 벽화.>


살아생전에 박종철 학형을 본 적이 없다. 그 녹두거리 안에서 하숙을 했다니 서로 보고 지나쳤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박종철 열사가 하숙을 한 바로 그 집이 기념관이 되었고 관악구 대학5길 근처가 ‘박종철거리’로 지명되었다. 이제 내 젊은 시절과 같이한 녹두거리에 남아있는 가게 이름이라고는 ‘휘가로’라는 호프집 밖에 없는 듯했다. 30년 이상 세월이 흘렀으니... 다음에 서울에 갈 때도 이 녹두거리에 동무들 불러내어 그 때 기억을 되살리며 술 한 잔 해야겠다.


과거 기억은 혼자 들춰내긴 용기가 많이 필요하니까, 혹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확대재생산하는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니 같이 조심스레 봉인을 해제해야 한다.


이동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