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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와이엠씨에이 중등교육자협의회


이종호 편집국장(이하 ‘이’)=처음 교사 발령을 울산으로 왔나요?


정익화 교사(이하 ‘정’)=처음은 안동이었고 83년도입니다. 그곳 중학교에서 2년 근무하고 결혼하고, 대구 계명대학 동기인 처가 울산 방어진에서 피아노학원을 시작해 결혼 후 6개월 주말부부로 지내다 안 되겠다, 울산에서 지내자 했는데 상북고등학교에 자리가 있더라고요.


방어진에서 상북이 그리 먼지 몰랐는데 와서 합쳐놓고 보니까 차로 세 번을 갈아타야 되더라고요. 시외터미널 우정동 가서 언양 가서 언양에서 석남사 가는 버스 타야 했는데 마침 학교버스가 방어진까지 들어왔어요. 동구에 학교가 모자라 학생은 많은데 교외로 운행하는 버스가 태화종고도 가고 언양도 가고 남창도 가는 버스가 있었습니다. 방어진 중공업이 한창 커지고 애들 숫자도 많은데 현대고 밖에 없을 때라 시외로 많이 나갔고 학교버스도 방어진까지 들어와 통학버스로 통근하고 다녔죠.


음악 전공이에요. 집사람도 씨씨(캠퍼스 커플)고 순수예술주의였어요. 정치 전혀 몰랐는데 재수해서 79학번, 10.26 일어나고 80년 서울의 봄, 광주 일어나도 모르다가 학생시위 때문에 휴강하면 들로 산으로 놀러가고 심지어 그때는 경찰이 잔디밭에 상주할 땐데 저 아저씨가 왜 앉아있나 했으니까. 유인물 뿌리면 와르르 달려들어서 잡아가더라고요. 그것도 남의 일이라 생각하고 어떡하면 독일이나 서울로 유학갈 수 있을까, 독일 유학은 허가 받고 가야하는 때였어요.


안동 사립 중학교가 옛날 봐 왔던 학교가 아니라 족벌 악질 학교였어요. 40대 되는 아들이 교장하고, 선생하고 매점도 가족이 하는 학교였는데 안동 비평준화였을 때라 살아남으려면 공부를 잘해야 하니까 닦달해서 공부시키고 그렇게 굴러가던 때였죠. 인자한 교장 할아버지도 아니고 40대 교장이 50대 선생한테 야 자 반말 하고, 성적 떨어지면 자아비판하라고 하고, 같은 과목 선생끼리 비교하고 안동 평균, 대구 평균 하고도 비교하도록 하는데 교무실에서요. 그러고 밥 한 그릇 사주는데 참 생각해오던 학교 분위기랑 다르고 학교 자체도 열악했어요.


그러다 와이엠씨에이 중등교육자협의회를 알게 됐어요. 종교 활동 말고는 조직이 힘드니까요. 안동 교사들이 대구 출신들이 많았어요. 운동 약간 했던 사람들, 적극적으로 하면 교사가 못 됐으니까. 신우회 성경 공부하자고 해서 모였는데 성경 구절, 찬송 몇 번 하더니 광주 이야기하고 그러더라고요. 책자도 보여주고 그러면서 정치현실에 눈떴죠. 아 이렇구나... 안동 와이엠씨에이 가서 같이 토론도 하고 그래서 알게 됐죠. 영남 중등교육자 모임, 안동 있을 때 노옥희 선생님을 처음 봤어요. 울산 현대공고 계실 때 영남 전체 모임 때 몇십 명 안 되지만 부산 해운대에서 모였어요. 좋은 사람들 있구나 하는 걸 느꼈죠.


바바리코트 입고 거리시위, 연행
경찰 “선생이 어딜 그런 걸 해?”


안동에서부터 무언가 본격적으로 해야겠다 자각했는데 남들은 감옥도 가고 했는데 난 선생인데 이 정도도 안 하면 안 되겠다 싶었어요. 울산 와서 중등교육자협의회에서 노 선생님하고 아는 사람이 없어요. 85년인데, 부산대학, 진주사대 출신이 대부분이라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어요. 대구에서 오다보니 노 선생님하고 와이엠씨에이 가서 몇 사람 소개 받고 글우리에서 김명숙 씨를 소개 받습니다. 그렇게 알음알음 알고 지내다 글우리 쪽에서 김덕분 선생님도 만났어요.


형제교회도 다녔죠. 원래 교회를 다녔는데 어른 돼서는 잘 안 갔는데 교회에서 부흥회 강연회라고 해서 갔는데 시국강연이었어요. 집회도 나갔어요. 겨울에 바바리코드 입고, 울산대 학생들이 나가자고 해서 성남동에서 사열종대로 스크럼을 짜고 머리띠도 주고 얼떨결에 따라 매고 5미터, 10미터도 못 가는데 경찰이 막고 있으니 털썩 주저앉죠. 연행하라고 해서 울산경찰서로 가는데 그래가 한 대 맞을 뻔했는데 신원조회하니까 교사라고 하니까 엄청 화를 내더라고요. 선생이 어딜 그런 거 하냐고. 경찰이 나한테 팔을 번쩍 들고 때릴려다가 말았고. 그 전에도 교회 행사는 몇 번 갔지만 대학교 때도 안 해본 집회를 교사 때 한번 해봅니다. 학교에서 놀래서 산골학교에서 왠 울산시내까지 가서 그러니까. 상북고가 특이해서 사립인데 일종의 면립 성격이라 지역 여러 유지들이 만들어서 굉장히 선생님들이 자유롭고 학교 생활만 잘하면 되니까 더 이상 말도 않았고.


86년 5월 와이엠씨에이 교육민주화 선언
9.6 영남 교육민주화선언 실천대회로 해임


노 선생님하고 둘이 86년 5월 교육민주화 선언에 가게 됐죠. 어떻게 보면 얼마나 위험할까 싶었는데, 일요일날 부산에서 와이엠씨에이 강당에서 이상석 글쓰기 운동 유명한 분, 김광규 등 교육민주화선언이라는 걸 가서 알게 돼요. 부산에서는 박수만 치고 조금 약하게 했는데 그때 경찰이고 장학사가 구름 같이 몰려들어 이름 적고 나가라 그래요. 난 당당하게 울산 사는 누구다 적었더니 그 다음부터 학교에서 난리가 난 거죠. 경남도교육청 장학사가 와서 문답서 작성하게 하고, 누구랑 왜 갔고 가서 뭐했는가 물어봐요. 교사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보호하려고 하는 거다 하면서. 그게 해임통보였어요.


민주화선언에 이름 한 자 올린 게 다인데, 해임. 지금 생각하니까 말도 안 되는 거지만 그 때는 받아들여야죠. 감옥 가는 것도 아니고. 나는 정직 3개월로, 노 선생님은 해임으로. 그런데 박종희 이상희 씨 등이 작전 이야기하면서 당당하게 나가면 된다 해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교육당국에서 이런 걸로 교사를 탄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쓰니까 이 사람도 단순 참가자가 아니라 주동자였구나, 노 선생님이랑 내가 울산교사를 대표하는 걸로 봤는지, 두 사람이 다인데, 나도 해임으로 결정 납니다.


그러다 서울 신일고에서 이수호 선생님 징계위 열리니까 학생들이 징계위 우르르 찾아와 징계위를 막는 일이 일어났어요. 이수호 선생님 징계위가 무산되면서 우리들 징계도 잠잠히 넘어갔는데, 2학기 때 9월달에 영남지역 교사들이 교육민주화선언 실천대회를 한번 따로 더 합니다. 그때 해임이 된 거죠. 징계위 처음에 참가 안 해서 재심, 한 달 만에 속전속결로 해임됐죠. 전국적인 큰 사건일 때는 쉬쉬하고 덮다가 일상으로 돌아가서 아이들 가르치고, 2학기 때 한 번 더 하니까 그렇게 해임시킨 거죠.


9.6 교육민주화선언 이후 한 달 만에 해직 당했는데 10월에 우리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게 86년입니다. 그렇게 되니 집사람은 학원 하고 나는 학원 도와주면서 아이 돌보고, 노 선생님은 노동운동으로 확실하게 중공업 쪽으로 맹렬하게 하고, 같이 동네 살면서도 나는 조용하게 내 이것만 하고 간혹 집회 한 번 가 볼 정도였고, 잘 안 했죠.


그러다가 참 울사협이 있었죠. 울산사회선교실천협의회. 86년. 우리 학교 찾아가서 항의도 해주고 목사님, 사관님, 학교에서는 안 만나주려고 하다가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성당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오르간 연주


87년에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나왔는데 6.10대회 때 그날에는 경찰 두 사람이 우리 집으로 와요. 가택연금이죠. 요주의 인물 중 하나로 봤는지 어디 가지 말고 집에 계셨으면 한다고 젊은 형사도 우리도 위법인 줄 알지만 시키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차 한 잔 마시고 자기들도 갑갑해하다가 다방에 가 있을 테니까 어디 나가지 말고 전화 받고 있으라고, 나도 나가야 하는 건 맞지만 집안일도 해야 하고 애들도 돌보고 해야 돼서 어쩔 수 없다 하는데, 열두시까지 계속 전화 오다가 오후에는 전화 안 오대요. 87 때는 미안할 정도로 한 활동이 없네요.


집회 나갈 때 지금도 기억나는 게 울산성당에서 구호 외치고 나가는데 마지막에 가두행진하자고 “가자!” 하는데 진영우 씨가 외치고 나더러 ‘임을 위한 행진곡’을 오르간으로 쳐달라고 하대요. 성당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니까 참 느낌이 묘하다고 반응을 하시더라고요. 87년에 항쟁할 때 막 그때는 그렇게 성당에서 색다르게...


87년 이전에 노 선생님하고 부산 노무현, 문재인 변호사 사무실을 갔어요. 가니까 노무현 대통령하고 악수도 해봤다, 이야기 듣드만 참 갑갑한 세상이죠, 암담합니다 그래요. 재판을 시작했더라면 당연히 보상 받고 무죄 받고 해임 사유로는 말이 안 되는 건데 87항쟁 일어날 거라곤 상상도 못하고. 그냥 차 한 잔 마시고 왔어요.


도원결의하듯 만든 울산울주교사협의회


87 항쟁 이후 확 바뀌니까 가만히 있으니까 안 불러주나 싶었는데, 신학기 돼도 안 부르고. 학교 측에서는 안 부를 만도 하죠. 근데 전화하니까 자리 있으니까 교장 선생님이 빨리 오라고 하대요. 5월부터 바로 출근했어요. 내 나간 자리에 임시강사를 쓰고 있더라고요. 현대공고는 절대 안 받아줬어요. 미안키는 한데 지금 같으면 같이 싸울 걸 그랬다 싶었는데 나만 들어가고 노 선생님은 울사협에서 계속 있고, 3자 개입으로 감옥에도 다녀오고.


그러고나서 87년 그해 겨울 전국교사협의회가 만들어집니다. 종교 이름 빌릴 필요 없어서 만들어지고... 이영준 선생님이라는 분이 나를 만나러 옵니다. 현충일에 등산 갔다 오니까 술 한 잔 하면서 울산에 교사협의회 만들어서 하자고 해요. 아는 사람 이름 적어주고 전화해서 선생님들을 만났는데 같이 하려고 하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어요. 정찬모 선생님을 이때 만납니다. 늘 축구 같이 하던 총각 선생님이, 자취하는 여 선생님 말이 눈 시커멓고 얼굴 부리부리한 사람이 부정선거 아니냐고 정의롭게 하더라 그래요. 그러면 한번 만나봐야지, 언양 터미널 앞 다방에서 드디어 만났습니다. 저도 뜻이 있었는데 잘 됐습니다 하더라고요. 장인권 선생님도 김덕분 선생님 학교에 키 조그맣고 한 사람 있는데 아주 달변이라고 하면서 한번 모임에 들어와 볼까 하면서 삼국지 도원결의하듯 만났죠.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입니다. 부산 어디 예비군훈련장 가니까 쉬는 시간에 성토를 잘 하더래. 성춘호 선생님인가 전교조 초창기 그분이 아주 열심히 했어요.


울산울주교사협의회가 울산성당에서 발족됩니다. 손덕만 신부님 계실 때, 협의회를 만들고 그때 활기차고 신날 때입니다. 신문도 발간하고 미술 선생님이 제호 울산울주교사협의회 판각도 해주고, 이종대 선생님이 하나둘 규합을 합니다. 재밌는데 지금 함월고 교장인 홍흥구 선생님을 만나보라 해서 알고 보니 계명대 선배더라고요. 아이고 후배님 좋은 일합니다. 공부할 일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뒤에서 열심히 도와주겠다고 하더라고요. 조합원 가입하고 교장 전까지 조합원으로 계속 있었죠. 처음 만났던 이 중에 한 분입니다.


교사협이 알음알음 만나면서 신문 발간하고 성남동에서 이철수 씨 외국어학원 3층 가건물에서 거기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독자적인 사무실 아니라 민족학교랑 같이 있었죠. 박종희 씨가 하면서 이름 하나 얹어서 같이 하자고 하는데 민족학교 사회를 한 번 봤죠. 대본은 종희 씨가 다 써줬지만 교사 출신이라 어울릴 거 같다면서...


민족학교 같이 한다고 하니깐 울산대 교수들 하고 한번 손덕만 신부 사제관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거기 양주가 잔뜩 있더라고요. 참 부럽다, 우스운 이야기도 있고요. 가톨릭에서 대해서는 잘 몰랐을 때인데... 성공회 전재식 신부님도 계시고... 아주 열성적으로 하셨죠.


신문 발간하면 각자 들고 학교에 가서 교무실 책상 위에 하나씩 놓아두고 자기 학교에는 그렇게 하고. 그걸 받아가서 감히 못 뿌리고 사장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도 펼치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죠.


발족 당시 성당 교육관에서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님 초청 강연도 듣고 했죠. 좋았어요. 그때 87 끝나고 88년 교사협의회 만들어지면서 교사들이 강당에 꽉 찰 정도 많이 왔죠. 지금 생각해도 열망이 “해보자” 하는 꿈틀거림이 느껴진 게 88년 가을이었습니다.


이종대 선생님이 대표, 내가 부회장이 됐습니다. 회장, 부회장. 실무랄 거는 젊은 선생님이 잘 하니까 그래서 사람 조직하고 그런 걸 잘 하고, 나는 그런 데 어설퍼서 고까지 하고 나니 내 역할은 다 한 거 같다 싶더라고요.


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으로 전환
같은 학교에서 똑같이 두 번 해직
교직생활, 전교조가 가장 큰 부분


겨울에 거창고 워크샵이 열려요. 그때 교원노동조합으로 전환을 발제하더라고요. 약간 벙쪘죠. 노조가 뭔지도 모르는데... 맞긴 맞는 거 같은데 울산에 와서 전달하니까 허, 우리는 가랑이 째지겠다, 만들자마자 몇 달 만에 노동조합으로 바뀐다고 하니까. 87 전국교사협, 88 울산울주교사협, 교사협은 임의단체다, 법적인 노동단체로 정치해야 한다, 89년에 그렇게 논쟁이 붙다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으로 가더라고요.


고 앞에 전국교사협 대회를 여의도광장에서 한 적이 있어요. 돈도 없고 해서 학교버스를 타고 갔어요. 관광버스도 아닌 학교 통학버스 덜커덩덜커덩하는 버스 타고 서울로 가니까 대화를 못하겠더라고요. 옆 사람이랑 겨우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집회 한두 시간 하다가 고대로 돌아오고, 토요일 근무할 때니 그땐 열정으로 20~30명이 그렇게 갔어요.


전교조가 결성되고 학교에서 다시 해직됩니다. 같은 학교에서 똑같이 두 번 해직된 건 나하고 부산에 이홍구 선생님 밖에 없어요. 전교조 결성으로 징계위 두 번 열린 건 독특한 케이스입니다.


울산에 해직교사는 스무 명, 사무실은 원래 우정동, 따로 얻어서 3층에 카바레 하던 곳인데 공간이 넓어서 자리를 얻어요. 출근하면 토큰 나눠주고, 초대 지부장은 정찬모 선생님이 했고, 성춘호, 장인권, 다들 말 잘하고 활발한 사람들이라... 나는 몇 달 나오다 집에 있게 됐어요. 전공이 같으니까 집사람을 안 도와줄 수가 없어요. 고생은 크게 안 했는데 다른 사람들, 해직자보다 그래서... 미안하죠. 박경렬 울산고 미술 해직교사인데 비주력 과목들, 삐리한 과목들이 어려움을 당하니까 먹고 사는 게 안정되는구나 우스개소리할 정도로...


이삼십만 원 걷어서 교사당 만원씩, 한 가지 기억나는 게 방학때는 고향 다 가니까요. 안 모아지는 거라. 어려워지더라고요. 2만원 내라 하기도 그렇고, 방학 때가 더 힘들더라고요...


노래패도 만들어서 열심히 연습하고 해직자들은 사무실로 출근하듯이 했죠. 나는 집안일 도와주느라 그렇게 못했지만, 정찬모 선생님은 초등학교 선생님이라 사무실 벽 뒤에 붙이고 하는 걸 잘 해요. 목공예도 잘 하고, 시골에 집도 지었어요. 포크레인 하나 불러서 목수 불러서 기초 세우고, 구영리 구 도로 범서 우체국 건물을 정찬모 선생님이 지었어요.


94년에 일괄 복직이 됩니다. 복직은 동구 대송중학교로 합니다. 복직했는데 하고 나서 노 선생님 문제를 제기하니까 현대에서는 안 받아준다 그러고, 그때는 경남교육청 소속이어서 찾아가서 교육감하고 대화하고 많이 했어요. 인제 자기들이 공립에 그럼 발령내겠다, 그래서 명덕여중에 노 선생님이 복직합니다. 그러다 교원위원으로 출마했잖아요. 정찬모 선생님이랑 같이 그때 아주 열정적으로 잘했죠. 분위기도 좋았죠.


복직 후 동구지회장도 하고, 내가 전교조 부지부장을 가장 오래한 사람입니다. 지부장은 안 해봤지만 이쪽 세력 저쪽 세력 할 게 없이 색깔도 없고 무난하니까 제일 오래하고, 집이 그쪽이라 동구지회장도 하고... 교직생활에서 전교조는 제일 큰 부분이었죠.


“차 타고 천천히 돌아다니는 게 재밌어요”
대송중.고, 혜인학교, 행복학교 교가 작곡


이=울산 인근에 잘 안 알려진 명소들을 많이 다닌 걸로 아는데요.


정=취미는 뭐냐 하니까 막연히 독서였는데, 어느 날 보니까 방학 때 차를 몰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돌아다녀요. 심지어 열 시간을, 나가면 경주로 해서 포항까지 청송까지 둘러오고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게 재밌어요. 천천히 가죠. 빨리는 안 가고 내려서 보다가 막 다니고, 집사람이랑 같이 돌고, 어릴 때도 가만 보니 그랬던 거 같아요. 간판 글자 다 보고 쇼윈도 안에 물건 보고 호기심이 많은 거 같아요. 버스도 못 타고 사먹을 돈도 없으니까 하루 종일 땡볕에 돌아다니는 게 취미였죠. 이게 내 적성에 맞는 일이구나. 영월 동강까지 갔다 오니 하루 14시간을 운전했더라고요. 3년 반 남았는데 퇴직하고 택시 운전해야겠다는 생각도 해요. 현대중공업 박대용 씨가 갑장인데 택시운전 알아보고 있다고 하니까 자기도 알아보고 있었다, 같이 알아보자 하더라고요. 나는 천천히 안전하게 가는 택시를 모토로 하면 안 되겠냐 하니까 누가 타겠냐고 하더라고요.


이=울산 인근에 가 볼 만한 곳을 추천해준다면요.


정=강동 주상절리는 사람들이 잘 몰랐는데 군부대 철조망이 철수하고 방치돼 있었어요. 지금 전망대 자리는 서치라이트 있던 자리인데 주상절리가 눈에 잘 보이는 데예요. 거길 왜 방치해 두냐, 그 생각하다가 이제는 모텔 들어서고... 할 수 없죠.


경주 불국사역 앞에 구정동 방형분이라고 있어요. 무덤인데 밑면이 네모난 무덤인데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어요. 재밌어요. 석관도 있고... 삼거리에서 바로 보이지만 그냥 지나가기만 하죠. 애들 있는 사람들 같이 가보면 볼 수 있고 앉아서 들어가 볼 수 있게 해놨는데 돌 관이 별로 안 커요. 사람이 키가 작았는가, 아니면 어린애일리는 없고 평균키가 작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죠.


동남산 서출지 근방에 볼 거 천지입니다. 부처골, 유홍준 씨 책에 있는 미륵골, 절골, 감실, 옥룡암 바위에 탑 새겨놓은 탑골, 석굴암 못지 않은 보리사 석불좌상, 칠불암은 좀 더 들어가야 하는데 염불사 탑을 요새 복원을 했는데 그 탑을 원래가 불국사 삼거리에 옮겨놨다가 원 절에 갔다 놓았더라고요. 관광지화하려고 아무 생각없이 탑을 옮겼는데 제자리 찾기를 했죠. 칠불암에 불상이 마애불이 있고 사면불상이 있고, 그래서 칠불인데 그런 게 볼거리가 재밌죠.


밀양 가면은 옛 기찻길을 이설하면서 원래 기찻길을 걸어만 다닐 수 있게 차량 교행은 안 되고 그런 데로 가는 재미가 있고요. 옛날 철길 흔적만 있어요. 아스팔트 철길인데 신기하죠. 야 그런 데가 다 있냐? 하면서...


이=음악은 어떻게 전공하게 됐나요?


정=고등학교 때 처음엔 사진반에 들어갔는데 카메라가 구식이어서 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나왔어요. 그런데 악대부가 멋있더라고요. 그 전에는 음악 전공해야겠다 생각도 못했는데 동아리가 정말 중요하더라고요. 작곡 전공했습니다. 대송중고등학교 교가도 만들고... 교장 선생님이 아 그러면 됐네, 국어 선생님은 시 쓰시고 해서 혜인학교, 행복학교 교가까지 작곡했어요. 4분의 4박자 낙동강 태백산 들어가고 하면 예술성이 있을 필요 없고...


“전교조가 빨리 법외노조 벗어나면 좋겠어요”


이=87년을 돌아보면 어떤가요?


정=처음에 교사하면서 세상에 눈뜨고 내가 무지몽매하게 살았구나, 교사로 사회민주화, 교육민주화에 기여하겠다 해서 울산울주교사협의회 만들고 그때가 제일 보람 있었어요. 우리 애 크기 전까지 사회가 잘 돼서, 커서 데모하러 뛰어 댕기면 얼마나 힘들꼬, 통일까지 돼야 된다 싶었는데 그래도 촛불까지는 해서 민주화는 된 거 같은데, 박종철이 살던 세상처럼은 안 돼야 할 거 같은데, 교육운동에 요만큼이라도 기여한 게 보람 됩니다. 우리 교감이 나보다 나이가 적으니까 승진 못한 거 후회 안 하냐 하면 절대 후회 안 하고.


전교조만 빨리 법외노조 벗어나서 정규화 되면 좋겠어요. 94년도 복직하고 나서 합법화 된 것도 당장 안 되고 98년쯤이었는데. 2000년대 초반에는 정말 잘 나갔고 신나게 했어요. 그러다 주춤주춤 내려갔는데 다시 활발하게 해서 젊은 사람들 확확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울산시장, 울산교육감 바뀌면 더할 나위 없고요. 대통령도 바뀌었는데 막상 우리 몸담고 있는 울산만 안 되고 있으니까요.


<특별취재팀>
기획,대담=이종호 편집국장
사진=이동고 기자
정리=이채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