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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역. 역사는 민간 사무실로 임대 중이다.


24절기 중 마지막 절기인 대한 날 효문역을 찾았다. 역 앞에 도착하자 마침 지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디냐?”라고 묻기에 “효문역”이라 답했더니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다. “아니, 효문역이 어디야?” 시쳇말로 대략난감이다. 그는 저 먼 강원도 평창 태생으로 직장을 찾아 울산에 내려온 지 언 30년이 넘었다. 평소 처자식 건사하며 알콩달콩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된 울산을 제2의 고향이라고 떠드는 사람이다. 그런 양반에게서 효문역을 모른다는 뜻밖의 말이 나올 줄이야. 인적 없이 찬바람만 휘도는 효문역사를 다시금 쳐다봤다. 이날 이후 필자는 며칠 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이 역의 존재를 넌지시 물어봤다. 결과는 의외였다. 동구나 북구 쪽에 연고가 없는 사람은 효문역의 존재를 아예 모르는 이가 많았다. 안다고 해도 정확한 위치를 대질 못했다.


우리나라 7대 광역시 중에 하나인 울산에서 효문역은 어쩌다 시골간이역보다 못한 존재감을 가지게 되었을까? 효문역은 1992년 동해남부선 울산시내선로이설사업에 따라 병영역을 대체하며 생겨난다. 울산 북구 산업로 900에 위치하며 역명은 효문이라는 동네 지명을 땄다. 언뜻 보면 대한민국 자동차산업의 메카 현대자동차를 옆에 두고 있어 최고의 역세권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효문역은 개업 15년 만인 2007년 6월 여객취급이 중지되는 비운의 운명을 맞게 된다. 이처럼 이 역이 대한민국 철도사에 극히 드문 단명을 기록한 이유는 이용객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은 위치 선정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인근 주거지의 접근성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현대자동차 중문으로 출퇴근하는 노동자들이 이용하기에도 어중간한 거리에 놓였다. 폐쇄 직전 승하차 인원이 하루 열 명을 채우기도 힘들었다. 하루 이용객이 수백 명을 넘던 병영역에 비하면 실로 참담한 성적이 아닐 수 없었다.


민간 사무실로 임대된 역사 대기실은 굳게 닫혀있었다. 효문역사의 외관은 비록 관리를 못해 빛바랬지만 매우 현대적인 모습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영판 태화강역을 축소한 모양새다. 물결모양 차광막 위에 내 걸린 ‘효문’이라는 역명판은 병영역의 옛 영화를 추억하는 듯 산업도로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망연자실 자기 부정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비현실적인 모습이다. 개업 당시 누가 이처럼 초라하게 폐역조치될 효문역의 운명을 점칠 수 있었을까? 마침 태화강역에서 달려온 기차가 효문역의 존재마저 잊은 듯 찬바람을 일으키며 빠르게 지나갔다. 무심히 지나치는 기차를 바라보며 필자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비록 폐역일지라도 간이역을 통과하는 기차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면 어떨까하는 생각이었다. 몇 년 전, 현대차 비정규직 철탑농성장을 지나치며 “빠아앙~빵” 안부를 묻던 연대의 그 경적 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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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효문역 명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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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역 안의 이정표


현대차 비정규직 철탑농성장. 효문역에서 나온 발길이 저절로 현대자동차 중문의 옛 송전탑고공농성장으로 향했다. 대한민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전탑은 여전히 주차장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2012년 10월 17일부터 296일간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최병승·천의봉씨가 이곳에 올랐다. 최병승씨는 7년간의 소송 끝에 대법원에서 “2년 이상 일한 사내하청 노동자도 정규직으로 봐야 한다”는 승소 판결을 받아 당시 우리사회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현대차로 돌아가지 않은 대신 이 철탑에 올라 “대법원 판결처럼 현대차 사내하청 모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라고 요구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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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현대자 비정규지회 철탑 농성장. 철조망을 둘렀다.


154㎸의 가공할 전압이 흐르는 송전탑에 판자를 깔고 만든 고공 농성장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우리는 강하다! 반드시 승리한다!”라고 내건 그들의 깃발처럼 두 투쟁가는 살인적인 폭염과, 영하 15도를 넘나드는 한파, 동상과 저산소증으로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도록 요지부동이었다. 순교자와도 같은 그들의 헌신적인 모습에 송전탑 주변은 전국에서 희망버스를 타고 온 연대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리고 지지자들이 내건 오색 깃발과 현수막이 철탑주변을 마치 축제장처럼 물들였다. 때때로 집회자와 회사 용역 간에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지만, 희망버스를 향한 보수언론의 뭇매와는 달리 학생, 회사원, 주부, 예술인 등 남녀노소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한 집회는 대체로 문화행사 위주로 평화롭게 진행됐다.


철탑농성은 가을, 겨울, 봄, 여름, 사계절을 한 바퀴 다 돌 즈음에야 멈췄다. 지리멸렬한 시간과의 싸움, 희망버스마저 돌아간 외로운 밤들은 내려가고 싶은 유혹으로 무척이나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지독한 고독을 깨우는 연대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철도노조원들이 송전탑농성장 옆을 지나가며 빠아앙~빠아앙 울려대던 기차의 경적소리였다. 명촌교에서, 혹은 효문역에서 매일 같은 시각 철탑을 비추며 지나갔을 기차의 불빛, 그리고 한 번도 빠짐없이 울리던 기차의 경적소리는 그들에게 하늘에서 울리는 천사의 나팔소리와 같지 않았을까? “빠아앙~~ 잘 있습니까? 빠아앙~~ 이 밤도 당신들과 함께하니 힘내세요!~~” 두 사람은 기차가 경적을 울리며 지나갈 때마다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감사합니다. 우리는 잘 있습니다. 안전 운행하십시오!~”


현대차 비정규직 철탑농성은 불법파견이라는 꼼수로 이익을 극대화한 거대 자본의 폭력성을 우리 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한진중공업 사태 때 시작된 희망버스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연대체로 급부상한 계기가 됐다. 두 사람의 노력 끝에 현대차는 사내하청 노동자를 순차적으로 정규직화한다는 발표를 했지만, 아직도 전국의 수십만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들이 올랐던 철탑은 이제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아무도 오를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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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역 전경(태화강역 액자)
 
병영역. 효문역의 전신 병영역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병영은 병마절도사영의 준말로 조선시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머물던 지방 최고 군사시설이었다. 병영은 오랜 역사가 이야기하듯 무수한 옛 이야기를 간직한 고장이다. 동네를 감싼 병영성은 임진왜란 때 가토기요마사가 울산왜성을 쌓기 위해 이곳의 성돌을 가져다 쓰는 바람에 많이 훼손됐다. 산업화 이후 도시 팽창에 따라 흔적만 남았던 성을 최근 당국에서 복원사업을 꾀해 시민들이 성길을 따라 산책할 수 있게 됐다. 병영성에서 병영로를 따라 내려오면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 생가, 고복수 선생의 자취, 병영 3·1만세운동의 무대 병영초등학교, 병영시장과 같은 역사적인 현장이 줄 지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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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성. 복원 사업 후 시민들의 산책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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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솔 최현배 선생 기념관


병영역은 1921년 협궤열차가 달리는 선로로 영업을 개시했다. 어느 블로그의 자료에 따르면 1928년 병영역의 한 해 승하차인원은 1만6944명이었다. 일평균 47명이 역을 이용했다는 얘긴데 교통량이 적은 당시를 생각해보면 엄청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1980년에 병영역은 13만 명이 넘는 년 최고 승·하차인원을 기록한다. 이는 급격한 도시팽창에 따라 주거지역이 과밀화되던 때의 울산시와 그 궤를 같이하는 귀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병영역은 1992년 폐역 당시 만해도 일평균 147명이 이용하던 번화한 역이었다. 자료 사진을 보면 당시 역사는 플랫폼 역할도 겸하며 선로 옆에 바로 붙어 있었다. 역의 위치는 병영사거리 앞 지금의 삼일아파트 입구였다. 당국은 병영역 또한 울산역과 마찬가지로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근·현대사의 중요한 공간 하나가 또 그렇게 우리에게서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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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숙희 시인. 병영로 거리를 추억하는 모습이다.


병영 사거리 삼일아파트 앞에서 이숙희 시인을 만났다. 시인은 어린 시절 진장동에서 살았는데 철길을 따라 병영초등학교를 다녔던 기억을 또렷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기찻길 옆의 딸기밭, 병영역에서 기차를 타고 경주석굴암으로 수학여행 갔던 기억, 병영송신소에서 종일토록 흘러나오던 음악소리는 문학소녀의 감성을 일깨웠다. 1970년대 공업도시로 탈바꿈하던 울산은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드는 사람들로 몸살을 앓았다. 시인의 아버지는 궁여지책으로 집안의 모든 공간을 개조해 셋방을 냈다.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시인의 집은 덕분에 최악의 궁핍은 면할 수 있었다. 냉난방 시설이 열악하던 시절이었다. 셋방은 궁벽한 도시의 변두리에 사는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곤 했다. 수돗간 하나를 두고 일어나던 시기와 질투, 연타가스 사고, 휴일도 없이 잔업과 야근에 지쳐 잠들면 새벽같이 또 일어나 기계처럼 일하러 가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 옛날 울산의 진짜 모습이었다. 시인은 울산의 지금과 같은 풍요는 그분들의 피와 땀이 빚은 결정체라고 했다. 그리고 철도이설 당시 동네 사람들의 추억이 서린 병영역사만이라도 보존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아쉬움을 표했다. ‘병영역’이라는 그녀의 시에는 1970년대 병영역 인근의 애련한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병영역 // 이숙희// 우리는 열두 살 / 강원도에서 전학 온 화숙이는 / 작고 마르고 활발한 아이였다 // 송신소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맞춰 / 논일을 나가시는 아버지 / 학교 회비를 미루는 일은 없었다 // 화숙이는 맨날 놀고 / 논일하는 부모도 없었다 / 회비를 못 내서 / 선생님께 불려 가는 날 / 기찻길 옆 제재소에서 / 나무 켜는 모습을 빤히 쳐다보며 / 회비 내 줄 오빠가 방학하면 온다고 했다 // 그때 우리는 열두 살 / 대학 다니는 위대한 오빠는 / 먹고사는 것도 해결할 줄 알았다 // 여름방학 화숙이는 홀로 / 병영역에서 부산행 기차를 탔다


황주경 시인
울산민예총 문학위원장 / 울산작가회의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