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늘 ‘한파’래 한파.”
“동준아 근데, 한파가 뭔지 알아?”
“아니, 몰라”


네살박이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녀오자마자 새롭게 배운 단어를 집에서 활용하다 엄마의 귀요미 눈에 포착되어 전해진 말이다. 이후로 한파는 계속되었고, 동준이는 한파란 말을 몸으로 익힐 수 있었다. 연일 한파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고 티브이 켜기가 무섭게 연이어 보도되고 있다. 울산에서 생활한 이후로 동파를 대비한 조치를 거의 한 적이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말이다.


며칠 전 아는 언니 집에 잠시 들렸다. 화장실 사용 후 물이 채워지지 않아 당황하고 있으니 “그럴 일이 없는데. 여긴 양지바른 곳인데. 그래서 일부러 이집으로 이사온 건데.” 등등 한동안 동파사고를 인정하지 않았고,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변기고장의 원인과 조치 방법을 구했다. 추우면 화장실도 문제로군.


화장실로 생각이 옮아가자 최근 공중화장실에 쓰레기통을 없애고 위생용품수거함을 설치하는 문제가 생각났다. 직장에선 쓰레기통을 없애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수거함 설치 위치를 두고 또 한 번 문제가 일었다. 청소하는 입장에서 편리하도록 설치했더니, 사용자측에서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결국은 사용자 승! 사소한 것이라도 기존의 것을 변화하는 데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다. 하물며 공중이 이용하는 시설이야 어떨까?


18세기말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은 청나라 연행 중 이런 글을 남겼다. “중국의 제일 장관은 기와조각에 있고, 저 똥덩어리에 있다.” 갑자기 왠 기와조각과 똥덩어리? 연암은 기와조각과 똥덩어리라는 하찮은 것의 사용법을 보고 그 문명의 수준을 가늠한 것이다. 청나라 사람들이 똥오줌을 거름으로 쓸 때 금덩어리라도 되는 양 아까워하는 모습, 말똥을 모으기 위해 삼태기를 받쳐 들고 말꼬리를 따라다니게 하는 모습, 똥을 모아서 네모반듯하게 쌓거나 팔각 또는 육각으로 아니면 누각 모양으로 쌓아올리는 모습, 똥덩어리를 처리하는 방식만 보고도 천하의 제도가 이에 다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고 기록을 남긴다.


그러나 19세기말 <독립신문>(1897.2.2) 논설에는 ‘외국인들이 한국의 서소문안 밤길을 지나며 오물이 섞인 진흙탕 길을 두고 서로 대화나누길, 이런 길을 어디서 또 본 적이 있냐 묻자, 청나라 북경에서 한 번 보고 꿈속 지옥 길에서 봤는데 꿈속에선 냄새는 나지 않았노라’란 대화 글을 싣고 있다. 근대적 위생관념을 논하기 위한 글이었지만, 정갈함과 치밀함 때문에 연암으로 하여금 질투와 감탄을 연발하게 했던 청의 수도가 최악의 더러움을 상징하는 수준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다. 진흙탕도 그런데 하물며 똥이야 어떻겠는가?


똥이 무슨 죄길래 ‘똥’은 모든 계몽주의자들의 적이 되었다. 개화파의 상징 김옥균은 <치도약론(治道略論)>에서 근대적 개혁 중 가장 시급하게 할 정책을 ‘위생’으로 뽑고 있다. 똥이야말로 악취와 불결함, 가난과 질병, 나아가 미개함을 대변하는 기호로 가장 시급히 타파해야할 개혁의 대상이었다. 그는 문명개화의 방법을 열거하며 ‘민가의 변소는 마땅히 각각 따로 만들게 하고, 또 그 집터에 넓고 좁은 것을 헤아려 만든다. 매월 말일이면 각 부내 저장된 대소변을 그 가족의 수에 따라 값을 주고 사들인다...인분은 저장하여 냄새가 새어난다거나 거름 기운이 없어지지 않게 했다가...’ 등등 아주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한 시대의 지식인이 이렇게 똥 처리 방식에 집중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조선시대 도시인들은 직간접으로 농업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분뇨수거에 특별히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어느 정도 모이면 근교 농촌에서 정기적으로 수거해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항 후 이주 외국인들은 오물을 제거할 방법이 없었고 이를 위해 경성주재 일본 영사관에서는 소제규칙(1891.7.)을 만들어 거류민의 쓰레기외 분뇨수거 및 거리 청소를 위한 위생사(衛生社)를 설치하고 매월 호당 10전씩 납부하게 하였다.


위생조치는 1905년 통감부 체제 하에서 점점 더 심해져서 민중의 생활기반 자체를 와해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위생사업을 통해 이득을 취한 일본인과의 갈등, 한탄, 고발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자기 똥을 주고 돈을 내야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 위생을 위해 똥을 모아 놓았는데 그 때문에 더 악취에 시달려야하거나 집값이 폭락하는 곤경에 빠진 상황, 위생 때문에 경찰에 닦달 당하는 등 “위생이 곧 고생”이었던 것이다. 실제 민중일상에 가한 고충을 해학적으로 묘사한 <대한매일신보>(1908.10.23.) 시사평론을 통해 민심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위생국이 설치되면 가가호호 청결하여 무병할줄 알았더니 일본순사 저 등쌀에 밥솥까지 전당잡혀 똥통 설치하였는데 놀보집이 아니어든 똥천지가 무슨일인고, 청결비를 매호매간 2전씩에 제똥 주고 값을 내니 개화법은 이러한가 장래 위생 고사하고 금일 당장 못살겠네. 남의 탓을 할 것이나 똥구멍이 원수로다”


이시기 위생규칙의 항목 하나는 길가에서 대소변을 보지 말 것, 대소변을 아무 데나 버리지 말 것 등이었는데 그 이유인 즉슨 보기에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외국인들 눈에 비친 한국 화장실 쓰레기통이나 뭐가 다를까? 오리엔탈리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어느새 화장실이 문화의 척도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정갈하고 냉난방이 잘 된 수세식 화장실에 가면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고 뭔가 고급스런 대우를 받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문화도 자연과 환경을 위해서라면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우리가 나아가야할 똥통문화는 어떤 모습일까? 적어도 오랫동안 일구어온 생활방식을 무시하는 방향은 아니어야하지 않을까?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언니는 카톡으로 희소식을 알렸다. 옹달샘이 찼다고, 행복하다고^^


참고자료 <위생의시대: 병리학과 근대적 신체의 탄생>(고미숙, 2014, 북드라망)


윤지현 전문 기록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