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에 입도한 후 해월은 한 달에 두세 번씩 용담을 찾아 수운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지금까지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던 해월은 수운의 가르침을 통해 비로소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 해월은 수운이 가르쳐준 대로 동학 수행에 힘썼다. 수운이 가르쳐준 동학 수행의 핵심은 밥을 먹을 때 한울님께 고하는 식고(食告)와 집을 나설 때와 들어왔을 때 고하는 출필고반필고(出必告反必告), 그리고 주문(呪文) 스물한 자를 쉬지 않고 외우는 것이었다. 특히 주문 수행은 동학 수행의 기본이었다.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 영세불망만사지(永世不忘萬事知)’의 스물한 자 속에는 한울님의 기운이 몸에 내리어 한울님 모심을 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라 동학에 입도한 도인들이 너도나도 소리내어 외웠다. 해월도 집 한구석에 가마니를 두르고 들어가 쉬지 않고 주문을 외우며 수행에 힘썼다.


해월이 동학 수행에 몰두하자 자연히 농사와 집안일에 소홀해 질 수밖에 없었다. 해월이 아무리 애를 써도 빈자리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부인 손씨가 해월이 동학을 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해월은 부인에게 자신이 동학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였지만 부인은 해월의 말을 수긍하지 않았다. 그러자 해월은 근심에 빠지게 되었다. 이렇게 마음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용담을 찾으니 해월의 얼굴빛이 밝을 수가 없었다.


수운은 수심이 가득한 해월을 보고,


“자네 얼굴빛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걱정이 있는가?”


하니 해월이,


“스승님, 제 집사람이 제가 동학을 하는 것을 못마땅해 합니다. 아무리 스승님의 가르침을 말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집사람 마음을 바꿀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다. 수운은 빙그레 웃으며,


“집에 가서 부인에게 큰 절을 하게나, 한 번 절해서 안 되면 두 번, 세 번 절을 해보게”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수운은 자신이 도를 깨우치는 20년 가까이 집안일을 소홀히 해서 부인에게 원망을 많이 받았지만 한울님으로부터 도를 받고 난 이후 진실하게 부인께 절을 해 마음을 돌렸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해월은 수운의 가르침에 힘을 얻고 검등골로 향했다.
검등골에 도착하니 부인이 우물에서 항아리에 물을 긷고 있었다. 동네 아낙네 서너 명이 같이 있는 우물가에서 해월은 넙죽 부인을 보고 큰 절을 올렸다. 부인은 갑자기 나타난 남편이 자신을 보고 큰 절을 하자 놀라서 얼른 항아리를 이고 집으로 향했다. 동네 부인들도 해월의 절하는 모습에 놀라 신기한 듯 보고 있었다. 해월은 부인을 따라 집으로 들어와 부엌에서 물을 내려놓은 부인을 향해 다시 한 번 큰 절을 하니 부인은,


“아니, 이 양반이 미쳤나. 왜 안 하던 일을 하고 그러세요.” 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자 해월은 따라 들어가 부인에게 다시 큰 절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동학을 하는 이유를 다시 설명하며 설득하자 부인은,


“이제부터는 내가 당신이 동학을 하는 것을 말리지 않을 터이니 제발 나에게 절을 하지 마세요.” 하면서 마지못해 해월의 동학 수행을 받아들였다. 해월은 이후 지극히 손씨 부인을 위해 큰 절을 하며 정성을 다했다. 손씨 부인은 이러한 해월의 진실한 모습에 마음을 열고 동학을 받아들였고 해월이 동학을 할 수 있도록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해월이 동학의 제2세교조가 된 이후 힘든 상황 속에도 손씨 부인은 정성껏 해월의 뒷바라지를 했다.


당시 남편이 부인에게 절을 하는 것은 ‘개벽(開闢)’이었다. 성리학적 가치 질서가 강화된 조선 후기에는 여성을 철저히 고립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들이 자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았다. 남성들의 출세와 사회적 위신을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했다. 여성들은 남성들이 사회생활에 전념하고 안정적으로 대를 이어갈 수 있도록 출산과 육아, 그리고 가정 관리를 모두 떠맡았다. 여성에게는 순종만이 강요되었다. 이러한 여성차별의 대표적인 상징이 바로 칠거지악(七去之惡)이었다.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내쫓고, 아들이 없으면 내쫓고, 음탕하면 내쫓고, 질투하면 내쫓고, 나쁜 병이 있으면 내쫓고, 말이 많으면 내쫓으며, 도둑질을 하면 내쫓는다.”로 인해 여성들은 숨을 죽이며 살지 않을 수 없었다. 남존여비와 남아선호는 이러한 여성차별을 강화시켰다. 


조선후기의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부인에게 큰 절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신 평등한 존재라는 동학의 시천주(侍天主)는 반상의 차별, 빈부의 차별, 남녀노소의 차별을 근원적으로 혁파하고자 하였고 이것을 수운이 실행하였고 해월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동학의 포덕이 시작되자 많은 사람들이 용담으로 구름같이 모여들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차별에 고통 받았던 민초들이 그만큼 많았음을 반증한다 하겠다. 동학의 확산은 부부가 존댓말을 쓰고 남편이 부인에게 절을 하는 것과 같은 평등의 실천에 기반하고 있었다.


동학 도인들이 늘어나 용담에 사람이 많아지자 동학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포덕을 시작한지 두 달이 지난 8월부터 시작된 동학에 대한 비난은 10월이 되면 더 심해져 수운이 용담에 머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유학자들은 동학의 시천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상에 신분과 남녀의 차별이 분명한데 동학의 시천주는 세상의 질서를 파괴하는 이단(異端)이라고 하면서 뿌리를 뽑아야 한다고 난리를 쳤다. 유학자들이 압력을 가하자 경주관아가 직접 나서서 수운에게 활동을 중지하라고 명령하였다. 경주관아에서는 동학을 ‘천주(天主)’를 사용한다고 해서 서학으로 몰아 탄압을 시작하였다.


관의 압력을 받은 수운은 급히 용담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11월에 제자 최중희를 대동하고 정처 없이 길을 나섰다. 용담을 떠나 그가 찾은 곳은 6년간 살던 처가가 있는 울산이었다. 울산의 서군효(徐群孝, 뒤에 울산접주가 됨)를 찾아 회포를 풀고 이웃을 만나 시간을 보냈다. 이후 수운은 부산-웅천-고성-승주-구례를 거쳐 12월 15일 경에 전라도 남원에 도착하였다. 남원 광한루 앞의 서형칠의 집에서 10일간 머물던 수운은 섣달그믐에 교룡산성의 덕밀암(德密庵)으로 들어갔다. 수운은 덕밀암의 방 한 칸을 빌려 ‘은적암(隱蹟庵)’이라 명명하였다. 수운은 은적암에서 <논학문>, <수덕문>, <도수사>, <권학가> 등 경편들을 저술하여 동학의 종교적 체제를 확립하였다. 수운이 있던 은적암으로 남원의 청년들이 찾아와 시운시변을 물어오자 수운은 이에 답하면서 동학을 전하였고 이렇게 전라도에서의 포덕이 시작되었다. 이때 동학에 입도했던 서인주와 서병학이 뒷날 동학혁명 당시의 전라도 동학군이라 일컬어지는 이른바 남접의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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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교룡산성 안에 있는 은적암 터. 수운은 1861년 겨울 이곳에 은거하며 <논학문><수덕문> 등 많은 경편을 저술하였다.


해월은 부인을 감화시키고 난 뒤 더 열심히 동학 수행에 나섰다. 해월도 스승인 수운과 같이 종교적인 체험을 얻고자 하였다. 하지만 종교적 체험이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수운이 용담을 떠나자 물어볼 곳이 없었다. 수운이 용담에 있을 때 저술한 <포덕문>, <용담가>, <안심가>를 읽으면서 주문 공부에 매진하였다. 해월이 하루는 홀로 생각하기를 스승님은 독공(篤工)하실 때에 한울님 말씀을 들었다고 하였으니 자신도 정성을 다해 한울님을 감동하게 하리라 작심하고 기도를 하였다. 비록 추운 겨울이라도 매일 한밤중에 마을 뒤 계곡에서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였다. 이렇게 정성을 드린 지 두세 달이 되니 물이 또한 차지 아니하고 밤이 어둡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욕재계를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찬 물에 갑자기 들어가는 것은 몸에 해롭다’라는 소리가 들려 주위를 보아도 아무런 사람이 없어 괴이하게 여겨 냉수욕을 끊었다.


해월이 이듬해 봄에 은적암에서 돌아온 수운이 경주 서촌(西村) 박대여의 집에 와 있는 것을 마음으로 알고 찾아가서 이러한 이적(異蹟)을 말하니 수운은 <수덕문>을 펴 ‘찬물에 갑자기 들어가는 것은 몸에 해롭다’는 구절을 가리키며 그대의 정성이 지극하여 내 마음과 통하였다고 하면서 해월의 종교체험을 기뻐하였다. 해월은 다른 몇 가지의 이적(異蹟)을 말하자 수운은 이적이 조화(造化)의 커다란 효험이라고 하면서 해월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아가 해월에게 포덕을 하라고 지시하였다. 해월은 제지소에 다니면서 연고가 있었던 영해, 영덕, 상주, 흥해, 예천, 청도 등지를 순회하며 동학을 권유하여 많은 사람들을 입도시켰다. 해월은 동학에 들어온 지 1년 만에 지극한 수행으로 종교적 체험을 하였고 동학의 교세 확장에도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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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등골의 돌절구. 해월이 화전을 일구었던 검등골에서 찾은 돌절구. 해월과 동네 사람들이 이 절구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해월이 포덕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나자 경주감영에서 해월을 잡으려고 검등골까지 출두하였다. 관속 30여명이 검등골의 해월의 집을 포위하고 해월을 잡으려고 하자 해월은 집에 있는 생삼 한 묶음으로 그들을 제압하였다. 경주의 관속들은 해월을 잡아 돈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해월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젊은 시절부터 제지소에서 일을 했던 해월은 힘이 장사여서 관속들이 잡을 수 없었다. 해월은 이들을 잘 타일러서 돌려보냈는데 이후 검등골에 큰 장사가 났다는 소문이 나서 관리배들의 침해가 없었다고 한다.


해월은 수운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성실하게 동학인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부인에게 큰 절을 해서 부인의 마음을 얻고, 엄동설한에 찬물에 목욕을 하면서 정성을 드리다 천어를 들었고, 하룻밤도 못가는 반 종지의 기름으로 21일간을 보내는 이적도 체험하였다. 또 친척이 원인 모를 병으로 신음하고 있을 때 어루만져 병을 치유할 정도로 종교적인 힘을 갖고 있었다. 해월은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수운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동학의 교의를 하나하나 익혀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해월의 모습이 수운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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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이 살았던 마북 마을의 유래비. 비문 가운데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이 검둥골에 은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강현 부산 동천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