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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규현 신부가 새긴 ‘자구리국수’ 목각판화.>


문규현

< 문규현 신부님(가운데)과 국수집 사장님(오른쪽).>


식당을 나온 아내와 아들은 불만이 가득했다. 아내는 식당에서 카드 결제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런 아내가 카드를 뽑아 든 것이었다. 아들은 아들대로 서귀포시에서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 조성한 음식특화거리의 이미지를 걱정하며 불만을 토하고 있었지만, 비난의 감정은 나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시간이 벌써 1시 30분을 지나고 있었다.


 자구리국수집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하기야! 걸어서 찾아 왔다가 걸어서 찾아 가는 길이었다. 식사 시간을 넘긴 국수집은 자리가 드문드문 비어 있었고, 우리는 의자가 딸린 탁자에 둘러앉아서 넷이서 나눠서 먹자는 속셈으로 자구리국수 한 그릇, 고기국수 한 그릇, 막걸리 한 병을 주문했다. 동생은 막걸리 두 병을 비우고 국수를 다 먹어 가는데도 오지 않았다. 후덕한 인상에 덩치가 큰 나이 지긋한 사장이 동생의 이름을 대며 문어 지짐이 한 접시를 내어 오면서, 단골인 동생의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오전에는 되돌아 나가게 해서 미안했다며 거듭 사과를 했다. 조리사 겸 사장인 그는 이곳 자구리에서 최고 오래 된 원주민이라고 말했다. 그는 광화문 촛불과 세월호 그리고 강정해군기지를 이야기하면서 문규현 신부와 함께 찍은 사진과 문규현 신부가 선물한 목각 현판을 자랑했다-식당의 벽면에는 그가 자랑한 목각 현판과 문규현 신부와 함께 찍은 사진이 액자에 걸려 있다. 그리고 자구리가 무슨 뜻이고, 이곳의 지명이 자구리가 된 유래를 이야기해 주었다.


“자구리는 밴댕이(디포리)의 경기도 해안지방 방언입니다. 그거 왜 국수 육수 뽑는 멸치 같은 생선 있잖아요? 그래요! 그것이 디포리입니다. ‘동음이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구리 때문에 이곳을 자구리라고 불리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그것보다도  훨씬 오래 전부터 자구리라는 지명으로 유래되어 왔었지요. 옛날 옛날에 한양에서 관리가 제주로 부임을 오면서 애첩을 대동하고 제주에 오게 되었습니다. 애첩의 성이 송 씨였지요. 서귀포 진성의 관리로 부임한 관리의 애첩이다 보니 권세가 대단했겠지요. 그러나 관리가 아무리 애지중지하는 애첩이라 해도 관헌에 들인다는 것이 신경에 거슬렸기 때문에 관리는 서귀포 어촌 마을에 집을 구해서 애첩을 기거케 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은 억울한 일도 많았고, 관에 부탁할 일도 많았지요. 요즘처럼 취직이나 승진을 부탁할 일도 있었겠지요. 마을 사람들은 자기 동네에 사는 송 씨가 관리의 애첩이라는 사실을 알고 부탁할 일이 생기면 애첩 송 씨를 찾아가 부탁을 하였지요. 베갯머리 송사라 하였던가요? 송 씨는 지혜로워서 마을 사람들의 거의 모든 청탁을 해결해 주었답니다. 그리하여 애첩 송 씨에게 자문을 구하여 스스로를 구원하는 마을이라는 소문이 제주 전역에 퍼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구하는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한문의 이름 ‘자구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서귀포시에서도 몰라요. 내가 시청 문화관련 담당에게 이야기를 해서 마을 표지판으로 만들어질 예정에 있습니다.”


제주 막걸리를 마시며 국수집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아내와 아이들은 이중섭거리를 구경하고 오겠다며 밖으로 나가는데, 자구리국수 사장님의 제주 자랑은 막걸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제막은요, 제주막걸리를 줄인 말입니다. 생유산균을 담은 백프로 우리쌀 막걸리입니다. 생유산균을 넣었기 때문에 유산균이 살아 있지요. 유산균의 종류도 40여 종이 넘게 들어 있습니다. 요구르트에는 한 가지 유산균만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육지에서는 보기 드문 대단한 막걸리지요. 아마 육지에서는 맛 볼 수 없는 술일 겁니다. 향신료와 방부제 등의 첨가제가 들어 있지 않아 유통기간이 짧은 것이 단점이지요.”


막걸리 자랑을 마치 자기 식당 자랑하듯 하면서 막걸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막걸리를 내어 오신다. 식구들이 나가고 사장은 두 병의 막걸리를 내오고 세 병째 막걸리를 꺼내 오려다가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할머니에게 꾸지람을 듣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내가 있는 테이블로 오는데, 콧수염을 길게 기르고 긴 머리를 질끈 묶은 머리에 창이 넓은 모자를 관자놀이까지 덮어쓴 농부가 밀감 상자를 들고 식당으로 들어 왔다. 순간, 기가 한풀 꺾여서 내가 있는 자리로 오던 국수집 사장의 얼굴에 희색이 돌면서 눈빛이 반짝였다.


농부는 우리가 술을 마시던 탁자 옆에 밀감 상자를 내려놓으며 사장과 인사를 나눴다. 사장은 서귀포에서 감귤농장을 하시는 분이라고 하면서 그를 소개했다. 소개를 받은 그에게 내가 막걸리 잔을 권하자 농부는 “막걸리는 좋아하지만 운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두 잔만 마시겠다.”며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울산에서 온 노칠환입니다. 여기 이 사람들은 저의 가족이고요. 저는 울산에서 횟집을 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우리가 서로 인사를 나누고 술잔을 들자 국수집 사장은 “후 선생이 친구 좀 해주세요. 일이 밀려서요.”라는 말을 남기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동생과의 약속 시간은 지나가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관광을 다녀와서, 길어지는 술자리를 걱정스런 얼굴로 지켜보고 있다. 우리는 처음 보는 사이임에도 10년지기처럼 대화를 주고받았고, 늦어지는 동생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농부 후 선생에게 아내와 아들과 아들의 여자친구를 하나하나 소개-식구들의 표정은 그리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하는데, 제수씨와 동생이 식당 문을 열고 들어 왔다. 제수씨는 “차가 막혀서 늦었다.”며 미안해했고, 동생은 주방에서 고개를 내미는 사장과 목례를 나누곤 우리가 앉은 옆 식탁에 앉았다. 인사와 소개로 말이 길어지자 동생은 삼팔선을 긋듯이 말했다, “한 병만 더 마시고 일납시다.” 동생 딴에는 큰 인심을 쓰는 것이었고, 표정도 큰 인심을 썼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나도 알고 있다. 이럴 때는 막걸리를 천천히 마시면서 시간을 버는 방법을...


농부와의 대화가 사뭇 진지하면서 길어지자 동생의 표정과 행동이 꽈배기처럼 꼬이기 시작하면서 엉덩이를 들썩거린다. 그때였다. “아주버님은 여기 계세요. 저희들은 구경 다닐게요. 그리고 저녁에 만나면 되잖아요.”라고 제수씨가 말했다. 그 말끝에 동생도 흔쾌히 “그라면 되겠네.”라고 동의를 하면서 가족들을 데리고 밖으로 사라졌다.


아내는 못미더운 눈치를 보이면서도 동생 부부의 제안에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막걸리를 마시는 동안 서귀포 관광을 하는 것이 아닌가? 서너 시간 관광을 하다가 돌아오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설마 울산에서처럼 퍼질러 앉아서 밤을 지새울 일은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자구리국수집에서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최소한 저녁을 먹을 때까지 서너 시간은 오로지 나를 위한 나만의 시간을 얻게 된 것이었다. 내가 식구들과 구경 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좋아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술 마시는 것을 더 좋아할 뿐이다. 특히 낯선 곳에서의 우연한 만남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고, 그 무엇이 나를 흥분하게 했다.


조리사 겸 사장은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허리 굽은 할머니에게 꾸지람을 듣고, 주방으로 들어가서 일을 하다가 할머니의 눈치를 봐가며 왔다 갔다 하다가 다시 할머니의 눈총을 받고는, “오늘은 안 되겠어요. 재료가 다 떨어지기 전에는.” 체념한 듯한 국수집 사장의 말에 후 선생은 “재료가 많이 남았나요?”라고 물어 본다. “오늘은 어려울 것 같아요. 두 분이....!” 그런데, 국수집 사장의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평소-횟집에서 일하는-의 내 모습이었다. 아내와 함께 일을 하다가 지인들이 와서 나에게 술을 권하거나 친구들이 나를 객석으로 불러내면, 아내는 언제나 나를 주방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눈치를 준다. 실제로 주방에서 일을 해야 할 때일 경우가 많지만, 가끔은 내가 퍼질러 앉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일부러 부르는 것이었다.


국수집은 네 명이 일을 하고 있다. 한 사람은 직원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고, 한 사람은 사장의 부인인 것 같다. 국수집 사장과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아내의 눈치를 보며 술을 얻어 마시지만, 국수집 사장님은 어머니의 눈치를 보는 것이 다르다면 다를까? 지천명을 넘긴 나이에도 어머니의 눈치를 보는 것이 효자라고 해야 할지 마마보이라고 해야 할지 모호하기는 하지만, 그 모습에서 오랜 모자지간의 정이 훈훈하게 느껴져 후 선생과 나는 흐뭇한 미소를 띄우며 대화를 이어갔다.


후 선생은 미국의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그의 부인도 미국 대학에서 음악 이론을 가르쳤다고 했다. 둘 다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살았을 때는 싸울 일이 없었는데 제주에서 함께 귤 농사를 시작하고부터는 다툼이 자주 일어나 지금은 일을 나눠서-그의 부인은 판매와 고객관리를, 그는 농사를-하고 있다고 했다. 제주에는 귤 과수원이 3만 개가 넘고, 그중에 친환경 농가가 천 개, 유기농친환경 재배농가는 401농가가 있다고 하였다. 그가 감귤 농사를 그만두면 400개가 된다고 하면서 무거운 사명감 때문에 돈 안 되는 농사를 그만둘 수 가 없다고 장난끼와 너스레가 섞인 이야기를 그가 주도하기 시작했다. 무거운 ‘책임감’이란 말과 ‘농사를 그만둘’이라는 말에는 유머와 위트가 꿈틀거렸고, 해학적인 뉘앙스가 풍성하였다.


노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