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김연민

<김연민 울산대 교수.                                                ⓒ이종호 기자>




81년 정몽준 상무 직계 부서로 현대중공업 입사


이종호 편집국장(이하 ‘이’)=울산엔 언제 왔나요?
김연민 교수(이하 ‘김’)=81년도에 현대중공업에 입사하면서 울산에 왔어요. 과학기술원 있을 때 국비 장학금 말고 산학을 선택했는데 현대중공업이 지원하는 장학금을 받았어요. 대신 졸업하고 나면 군대 면제 조건으로 산업체 3년 근무하게 돼 있었는데 현대그룹에 입사하게 된 거죠. 그룹에서 어떤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현대중공업으로 가라고 하대요. 정몽준 씨가 상무일 때, 그 부서 부장이 강력히 요구해서 과학원 출신들을 네다섯 명 중공업으로 오게 한 거죠. 당시 부장이 최기선 전 사장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 담당 과장이 지금 사장이 된 이재성 씨입니다. 정몽준 상무 직계 라인이었죠.


이=계속 있었으면 지금 현대중공업 사장이 됐을 수도 있었겠네요?
김=아니, 쫓겨났겠지.(웃음) 중공업 3년 근무하다가 관두고, 학교를 알아봤는데 별로 받아주는 데가 없대요. 그래도 울산대는 과학원 출신이 산업공학과에 여덟 일곱 명이 있어서 선후배 간에 다 알고 중공업 있을 때 시간강사도 하게 돼서 자연스럽게 이직을 하게 됩니다. 문제는 정몽준 씨가 이쪽도 관할하니까 이사장이 사인을 안 해주는 거야. 실질적으로 반대해서... 그래도 나중에는 해주대요. 그래서 84년 학교로 옵니다.


와이엠씨에이에는 울산 오자마자 왔다갔다 합니다. 이상희 선배가 82년에 왔나 그랬는데 오자마자 교류한 거죠. 명숙 씨 글우리 독서회 했고, 조승수도 고등학교 때 날 봤대요. 노옥희 선생님 중심으로 와이엠씨에이 중등교육자협의회를 만들었는데, 그때 정식 멤버는 아니었지만 거기 끼어들어서 같이 작업을 했지요. 나중에 전교조가 발족하면서 울산대 교수들도 조합원으로 가입했어요. 나도 조합원이었어요. 여덟 명 아홉 명 있었나? 더 있었나? 그런 멤버가 있었는데 전교조는 그걸 잊고 있대요. 대학교수들이 멤버였다는 사실을 그냥 전국적으로 망각했더라고요. 초기에는 교수들이 다 있었어요. 전교조 합법화 이후에 법적으로 교수들은 거기에서 빠지게 되는데 합법화 전에는 교수들도 멤버였습니다. 실질적 활동은 거의 못하고 초기에는 많이 도와줬죠. 울대에서 돈 모아서 보태줬죠.


동양나일론 같은 데 소그룹 조직해 야학하자고 했는데 교재가 문제가 돼서 결국 무산되기도 했었고. 상희 형이 와이 중심으로 한계가 있는 거 같아 소그룹으로 해야겠다 해서 양정교회 김영락 전도사가 현대자동차 이상범, 하인규 등을 모아서 소그룹을 하고, 노 선생님이 천창수 선생님하고 아는 사이라 중전기에도, 중전기 그룹 쪽도 함께하고, 합동은 아니지만 가서 보니까 권용목도 알게 되고요. 같이 했었죠. 또 이재현, 사용운, 오종쇄도 있었고요. 금강 같은 데 고적답사도 같이 했는데, 감명 깊던 게 봉고차 안에서 공부를 하는 거예요. 보통 노는데 이 그룹은 뭔가 할 수 있겠다 싶대요. 평강교회도 따로 있었고... 나중에 서울에서 장명국 씨를 끌어들여서 전재식 신부님이 하던 성공회교회에서 모임을 자주 했죠.


형제교회에도 있었어요. 당시 백무산 시인도 간혹 나왔는데 사람들이 천재라고 했어요. 그때만 해도 백 시인이 방랑벽이 있었는지 어느 날 갑자기 와서 시계도 고치고 가고 그랬어요. 전태일문학상 받은 정인화 씨도 나오고 진영우 씨도...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나왔어요. 한 번 해보겠다고.. 근데 술 먹고 담배 피고 하는데 잘될 리가 있나, 개판이었지. (하하)
울사협 창립총회 사진에 내 사진이 찍혔던데, 첫 번째 젊은 사람이 나 같던데, 양복 입은 젊은 사진.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다고 하대요. 난 소그룹만 열심히 했지 울사협은 열심히 하지 못했습니다. 교수니까 얼굴마담으로 아마 부르지 않았을까요? 상희 형이.


대학교수의 공장 위장취업


86년 방학 때 중전기로 들어갑니다. 총각이라 기숙사 생활할 땐데 학교 오고 1,2년 돼서입니다.
이=80년대 중반에 교수 신분으로 공장에 위장취업한 건 교수님이 유일하지 싶은데요.
김=객기지 뭐. (하하) 도장공장에서 일했는데, 요새 허리가 아픈 게 그때 디스크가 왔어요. 젊으니까 쇠 캐비넷 라미네이트를 칠하고 열에다가 응고시키는데 뜨거운 데 들어갈 때 내가 맨 앞을 잡아요. 제일 무거운 걸, 그 뜨거운 데서 그걸 놓을 수도 없고, 허리가 뜩 하더라고요. 젊을 때는 괜찮은데 그게 축적되니까 늙어서 디스크로 발전하대요.


나는 본명으로 들어갔어요. 학벌은 그때는 아무도 안 따졌어요. 이력서는 적었지만 학력은 고졸로 하고, 그땐 별 문제가 안됐어요. 내가 또 착실하게 생겼잖아요. (하하)


밤에 야근 많이 시키대요. 야근하고 퇴근하고 나면 나중에 따로 용접도 배우고 거기 동료 친구한테요. 친구집 놀러도 가고 했는데, 그런 친구들이 생각보다 취직이 안 되대요. 그때도 내가 좀 티나게 했어요. 책도 읽고 해서 학삐리인줄 알았을 거야. (하하)


한 달도 못 있어요. 울산대 학생들 견학 와서 들켜버렸어요. 실습이요. 분명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나를 봤어. 그걸 느껴서 얼마 못 있다가 나와 버렸어요. 한 한달 있고 싶었는데 일주일이나 열흘밖에 못 있었어요. 신분이 노출될까봐...
나중에 노동부 근로감독관 여성 분이랑 친했는데 현장 점검 가자고 해서 따라 갔는데 마침 그때 일했던 데로 갔어요. 문제 사업장이었나 봐. 반장이 이상하다는 눈초리도 계속 쳐다보대요. 나는 모르는 척 했지. (하하) 양복 입고 갔는데... 그런 일화도 있습니다.


울산서는 돌까진 못 던지니까...


86, 87년 이때만 해도 노조 만드는 데 깊게 관여해서 해직 걱정도 했죠. 황한식 선배라고 크리스챤아카데미 활동했던 분이 있는데 대학 서클 선배여서 상의를 많이 했어요. 부산대 경제과에 계셨는데 부산대에 자주 놀러 가서 해직 될 수 있겠다 염려하면서 의논했었죠. 그런데 87년에 크게 투쟁이 벌어지고 팍 깨지면서 나와서 문제가 안됐어요. 폭발하던 시기였으니까. 노조가 조직되고... 황한식 교수가 독일 객원 교수를 했는데 독일에서는 대기업에서 노조가 투쟁하지 않는데 브레멘대 교수가 견학을 와요. 그런 이들 데리고 중공업 구경시켜주고 서울에서 온 사람들도 그렇고.


6월 항쟁 때는 학생들이 중심이던 항쟁이라 옆에서 거드는 정도였어요. 김승석 선생은 항쟁 때 빨간 복면을 해서 잡혀갔어요. 경찰에 교수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항의해서 풀어주고. 최현오 선생하고는 81년부터 알았는데 성남동에서 가방 장사하셨어요. 87년 항쟁 때 최 선생이랑 부산에 같이 갔는데, 최 선생이 자꾸 소문을 내요. 교수가 전경한테 돌을 던졌다고. (하하) 원정투쟁이죠. 울산에서는 돌까지는 못 던지니까. 87년에는 그랬던 거 같아요. 교수 신분이 있으니까 완전히 정면에서는 못하고.


교통사고도 났었어요. 학교 차였나 공용차였는데 그걸 타고 사람 만나러 가다가 그때는 너무 피곤했나 봐요. 자동차 정면충돌해서 죽을 뻔했어요. 현대자동차 앞쪽에서 운전하고 가다가 깜빡 졸아서 마주오는 트럭 귀퉁이를 쳐서 사고가 났어요.


이=87년 7월 5일 현대엔진부터 시작해서 현대자동차 터지고 정신없을 때였죠?
김=이미 현장은 통제 밖이라 너무 빨리 돌아가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없대요. 장명국 선생이 자주 와서 주도적으로 했죠. 연세도 있으시고 경험도 많으니. 장 선생이 비밀리에 전국조직을 했는데 나하고 이상범을 오라고 해서 갔었어요. 권용목은 그때 갔는지 안 갔는지 모르겠는데, 그쪽은 너무 똑똑해서 자기들끼리 잘 돌아갔으니깐. 노조 만들 때만 조금 도움을 받고요. 천창수도 있고 했으니까. 하여튼 그랬어요. 그 전국조직이 87년과 무관하게 전국 노조를 만드는 데 언더로 하려고 했던 거 같아요. 그때 장 선생이 전국조직에 오려면 모순론 정도는 읽고 와라 그랬는데 이상범이 읽었는지 모르겠어요. 안 읽었나? (하하) 장 선생은 사례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노조 설립은 어떻게, 투쟁은 어떻게, 86년 즈음에 가르쳐줬던 거 같아요. 졸지에 87년 되면서 장 선생이 떴죠. 울산을 다 한 걸로 알려졌으니. 장 선생이 설득력 있게 이야길 잘 해서 실제 많이 조직한 거 같은 느낌이 나고, 나는 조수였죠 뭐. (하하)


민교협 회장, 시민단체 대표 직함 줄줄이


88년에 결혼을 해요 내가. 외곽에 있었으니까 별로 관여는 못하고, 결혼하고 나서 아무래도 활동범위가 줄어들었죠. 민족학교는 박종희가 하자고 해서 상의했는데 교수진이 들어가야 하니 나와 김승석 교수하고 또 외부에서 영입해 철학이나 경제사 그걸 가르친 게 민족학교에서였을 거예요.


88년에 현대중공업에서 식칼테러 일어나고 민족학교에서 대응을 하니까 학교에서 총장이 불러요. 당시 총장이 정정길 총장인데 나중에 이명박 대통령 비서실장도 하고. 총장이 ‘하는 건 좋은데 현대에다가 칼을 겨누는 건 할 수 없지 않느냐.’ 그래서 이름만 형식적으로 빼는 걸로 퉁쳐요. 그래서 민족학교에 이름만 빼는 걸로 했죠. 성명서 같은 건 그냥 하고. 현대에서 자꾸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래요.


그 이후로는 주로 학교 일에 많이 휩싸여요. 총장 직선제 때문에 교수협의회를 만들었는데 초기에 간사를 해요. 직선제를 초기에 했는데 그 다음에 안 된다는 거야. 인정한 적이 없다는 거야. 교수동 밑에 다방 있는 자리에서 농성했죠. 겨울에. 졸업식 때 창문에 직선제 총장 인정하라 붙이고. 박살났죠. 정몽준 회장 밑에서 근무했던 것 때문에 그랬는지 그래도 쫓겨나진 않았어요.


학교 일에 말려 바깥일은 못하고, 바깥 단체 일이라고 해봐야 나이도 있고 직함만 거니까요.
이=그래도 직함이 상당히 많은데요.
김=우리겨레하나되기울산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청소년교육공동체 함께 이사장, 또 전에 울산경실련 상임대표 했고, 울산시민연대 쪽은 내가 안 한다고 해서 김승석 교수가 들어가게 됐고요. 경실련 외국인센터장도 하고요. 울산노동역사관 관장은 지금 하고 있고. 더 뭐 있을까? 아, 민교협(민주화를위한울산대교수협의회)은 회장을 한 12년 넘게 했을 거야. 아무도 안 할라 그래서. 탈핵에너지교수모임 상임대표, 탈핵학교 교장도 하고 있고요.


원래 전공이 생산전략입니다. 전략론이라고 경영전략이 있고 그 밑에 기업전략이 있고 사업부전략이 있고 부분전략이 있고 한데 생산전략으로 논문을 쓰고, 전공으로 자동차라든지 중공업에 근무하면서 조선, 자동차 생산관리에 관해서 했죠.


예전에는 산업심리학 시간에 노동법도 가르쳤어요. 석탑에서 나온 <노동법 해설>로 한 학기 가르치고 했어요. 그러다가 운동에서도 전공을 가져야겠다, 공대 교수로 정체성이 있는 걸 해야겠다 해서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 탈핵 쪽에 관심을 두게 됐죠. 그래서 탈핵을 좀 곁들이면서 산업생태학, 환경경제학도 가르치고요.


마침 월성원전 스트레스 테스트 시민검증단 단장을 하게 됐죠. 1년 반 동안 한수원에 과외를 시켰죠. 원자력 전문은 아니지만 깊이 이해를 하고,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했는데 어렵긴 어렵대요. 워낙 방대한 분야고 비전공자로는 많이 아는 축에 속하게 돼 자연스럽게 탈핵에 관여합니다. 황한식 선배는 자꾸 지방자치 쪽으로 하라고 하는데 그런 유혹도 뿌리치고 하는 분야가 생겼습니다.(다음호에 계속)


대담=이종호 편집국장
정리=이채훈 기자